안녕하세요! 작년 6월에 발간된 슨딕 앤솔 1탄 [종말론적 연애사]에 이어서 두번째 앤솔인 [어떤 판타지 로맨스 세계관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정해져 있다]가 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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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국판) 사이즈 236페이지에 달하는 성인본으로, 이즈넷/칙슈/달과자/시엔나/꼬리 5인이 참가합니다.

발송 예정일은 3월 16일이며, 선입금 예약자분들을 위한 작은 선물도 준비하고 있어요.

검과 마법, 차원이동과 계약결혼,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슨딕 두사람의 로맨스를 확인하세요>ㅅ<!!!!

 

※ 소설 샘플 발췌분의 더블엔터는 웹용으로 보시기 편하도록 편집한 것이며, 회지에서는 여백 없이 동일한 줄간격으로 인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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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나/웨인 대공가 첫째 아들 가출사건/48p

“와아아아 감사합니다!!”

새가 지저귀는 듯, 어린아이가 노래하는 듯 발랄한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튀김빵을 파는 노점 앞에서 웬 젊은 남자가 갖은 아양을 다 떨어대며 동그란 빵을 연신 베어물고 있었다. 고무처럼 쭈욱 늘어나는 빵을 호호 불어먹는 청년 앞에서 노점상 주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튀김빵을 종이봉투에 담았다.

“감사합니다. 여기 빵 값이요!”

“.....?!”

순간 제이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청년이 뒤적뒤적 주머니를 끌러서 꺼낸 것은 눈깔사탕만한 크기의 금화였다. 순도 높게 제련된 싯누런 황금빛이 화창한 햇살 아래 번쩍 빛났다. 노점상 주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고 주변 상인들마저 입을 떡 벌린 채 모두의 시선이 청년의 손에 들린 금화에 꽂혔다.

제이슨은 잽싸게 청년에게 다가가서는 턱 금화를 가로채며 어깨동무를 했다.

“헤이 조셉. 맛있는 건 많이 사먹었어? 나랑 같이 길드 들르기로 했잖아.”

“응? 조셉? 조셉 누구.......”

“하하, 튀김빵 사먹고 있었네? 이거 맛있지. 내 것도 같이 산거야?”

“어? 아니, 이건 내가 저녁에 먹을......”

“에헤이, 거 쪼잔하게. 알았어 알았어 내가 먹을 건 내돈으로 살게, 됐지? 거 아저씨, 그 튀김빵 두개만 더 담아주쇼. 이녀석이 먹은 것도 내가 한꺼번에 낼 테니까.”

제이슨은 청년에게 헤드락이라도 걸 기세로 꽈아아아악 어깨동무한 팔에 힘을 주고 구리동전 몇 잎을 꺼내서 노점상 주인에게 지불했다. 당황해서 어? 어어? 하고 버벅거리던 노점주인은 종이봉투에 튀김빵을 두 개 더 담아서 제이슨에게 건네주었다.

“하핫, 잘먹겠습니다. 많이 파십쇼.”

제이슨은 따끈따끈 김이 오르는 봉투를 청년의 가슴팍에 턱 안겨주고 노점상 주인을 향해 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청년을 데리고 척척 광장을 빠져나왔다.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어깨동무한 팔을 풀고 청년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정신 나갔어? 미쳤다고 그런 금화를 저런 노점에, 서.......”

버럭 짜증을 내려던 제이슨은 그러나 입을 연 순간 제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까먹어버렸다. 조금 전에는 상황이 급해서 미처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슨을 올려다보는 청년은- 웬만한 사람들을 꽤나 만나봤다 자부하는 제이슨조차도 익히 본 적이 없는 미인이었다. 무결점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눈동자 위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윽하게 그늘을 드리웠다. 결 좋은 머리카락과 잘 다듬은 것처럼 모양 좋은 눈썹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윤기가 흘렀다. 밀빛으로 부드러운 피부는 잡티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완벽한 각도를 이루는 광대뼈와 턱선이 도톰한 입술과 대조를 이루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제이슨은 천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년 앞에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문을 잃고 머뭇거렸다. 청년의 눈이 깜박거리더니 의아한 듯이 고개를 한쪽 옆으로 기울였다.

“조셉이 누구야?”

“뭐? 그게 누군데.”

“어..... 당신이 조금 전에 조셉이라고.”

“뭐? 아아, 조셉 호프만이라고 있어. 고담성 북문을 지키는 경비대장놈.”

“그렇구나.... 그런데 그사람이 왜?”

“아니 그냥 생각나는 이름 아무거나 튀어나온 거니까 네가 신경쓸 거 없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으응?”

“조금 전에. 이 금화 말야. 저런 노점에서 이딴걸 내는 멍청이가 어딨어?”

제이슨은 자신이 청년에게서 낚아챘던 금화를 퍽, 하고 청년의 가슴팍에 밀어붙이.....려다가 얌전히 청년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청년은 동그란 눈을 말똥거리며 제이슨의 얼굴을 봤다가 제 손에 올려진 금화를 봤다가 다시 제이슨의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음식을 샀으면 돈을 내야하잖아.”

“그야 그런데, 저런 노점에서는 이런 큰 단위의 돈은 거슬러줄 수 없다고!”

“괜찮아. 안 거슬러 받아도. 이렇게 말랑말랑 쫄깃하고 맛있는 빵은 처음 먹어봤는걸! 이 금화의 가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으니까 준 거야.”

“아니 그러니까! 그쪽이 돈이 튀는건 알겠는데, 그거 아니라고. 이런 광장 노점에서 그런 돈을 쓰는 건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어? 틀려먹은 행동이라니까?”

제이슨이 신경질적으로 다다다다 쏘아붙이자 말갛던 청년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청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다가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왜는 없어. 모르겠으면 그냥 외워. 이런 금화는 이런 곳에서 쓰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다른 돈이 없는데.”

청년은 이제 완전히 자신없어진 얼굴로 주섬주섬 돈주머니를 꺼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두툼한 주머니의 입구를 벌리자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광채가 제이슨의 눈을 직격했다. 번-쩍-!! 섬광처럼 시야를 불태우는 새하얀 빛에 제이슨이 저도모르게 크헉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엄지손가락 한마디만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가 한낮의 강렬한 직사광선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핑크 베릴. 사파이어. 굵기가 새끼손가락만한 백금 체인. 눈깔사탕만한 루비 주변으로 오팔을 촘촘하게 박은 브로치 등등.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순도 99퍼센트를 자랑하는 금화들이 보석 사이사이에 뒤섞여있었다. 아니 뭔.... 4차원 주머니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엔 손바닥만한 돈지갑 안에 뭐가 저렇게 많이도 든 거야??? 제이슨은 망막에 아른거리는 햇빛의 잔상에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며 후다닥 주머니를 여미고 청년의 자켓 안주머니로 쑤셔넣었다.

 

이즈넷/마법사와 늑대/34p

오두막 벽에 난 동그란 창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산들거렸다. 딕은 거친 호밀빵을 스튜에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마을의 메리 아주머니에게 관절염에 좋은 약초를 드리고 받아온 호밀빵이었다. 까슬한 호밀빵은 따끈한 스튜에 젖어 적당히 먹기 좋게 촉촉해졌다. 양파와 닭고기의 맛이 배어든 호밀빵을 우물거리며 딕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끼리, 특히 가족들끼리 살던 생활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평화로운 일상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딕을 ‘지나치게’ 걱정한 동생들이 몰래 보냈던 덫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딕은 오늘 아침에도 덫을 4개나 해제했다.

“대체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그렇게 잘 보내는 거지?”

딕은 투덜거리며 호밀빵을 한 입 더 먹었다. 물론 동생들의 애정을 알기에, 웃음이 섞인 가벼운 투정이었다.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다보니 동생들이 걱정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을뿐더러 딕이 열심히 덫을 해제하고 숲 전체에 인식마법을 걸었기에 인명피해도 적었다. 가끔 동물들이 피해를 입긴 하지만. 딕은 오늘 아침 발견한 맷돼지를 떠올리고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거꾸로 매달린 맷돼지가 애처롭게 꿰엑꿰엑 울부짖고 그 아래 토끼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올려보던 모습은 마법사인 딕으로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정말 사람 안 다친게 천만다행이지.”

딕은 중얼거리던 찰나에 퍼엉,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남성의 비명이 들렸다. 딕은 먹던 호밀빵을 떨어뜨렸다.

 

황급히 딕이 달려간 장소는 딕의 오두막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샘이었다. 아니, 작은 옹달샘이었던 곳은 터저서 잔해만 남아있었고 그 주변에 옷가지들과 검 한 자루가 널브러져있었다. 딕은 망연한 얼굴로 샘이 있던 장소와 남성의 옷가지를 번갈아보았다. 아무래도 딕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덫 하나가 발동한 듯했다. 그것도 최악의 방법으로.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손을 탄 흔적이 역력한 검을 보고 딕은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갑옷을 더 살펴보니 묵직한 돈주머니와 용병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용병패까지 남아있었다.

“이 용병이 샘에 목욕을 하려고 벗어둔 건...”

물론 아니겠지. 샘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이런 크기의 옷을 입을 남자라면 발을 담그는 게 고작이었다. 설령 남자가 과도한 도전을 즐겼다고 쳐도 날아간 샘을 보건대 남자 또한 멀쩡할 리 없었다. 딕은 넋이 나가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그래봤자 다른 차원에 있을 동생들이 보일 리 없었지만.

“기어코 사고를 쳤구나.”

그래도 그 역시 딕의 잘못이었다. 딕은 침통한 얼굴로 옷가지를 추슬렀다.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보았어야 했는데, 하나를 놓쳐버린 바람에 한 생명이 증발해버렸다. 용병패를 살펴보니 진흙이 묻어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이 옷 주인의 성은 토드고 나이는 스물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딕은 참담한 심정으로 잠시 묵념을 하고는 갑옷을 추슬렀다. 보기보다 묵직한 갑옷을 양팔로 끌어안은 후 검까지 집으려는 찰나 거대한 앞발이 검을 짚었다.

“크르르릉...”

“깜짝이야!”

개? 아니, 늑대인가? 딕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주문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건 거대한 개과의 동물이었다. 개라고 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사나워 보이며 늑대라고 하기에는 야생성이 없는 동물이 딕을 이를 드러내며 노려보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딕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그 동물을 살펴보았다. 머리께에 흰 털이 섞인 검은 늑대는 딕이 들고 있는 갑옷을 보고 매섭게 짖었다.

“크릉, 컹!”

“이, 이거?”

딕은 당황스레 들고 있던 갑옷들을 내려놓았다. 늑대는 단숨에 그 앞에 고개를 묻고 용병패와 돈주머니를 확인하더니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딕을 공격할 것 같던 기세가 누그러들자 딕은 슬금슬금 늑대 옆으로 다가갔다.

“설마 이 용병이 네 주인이니?”

딕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용병들은 맹수를 길들여 함께 의뢰를 해결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늑대는 딕을 짜증스레 올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한다! 딕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 정도는 딕에게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딕의 동생 중 하나는 동물들과 교감하는 데 아주 능숙해서 마치 수족처럼 데리고 다니곤 했다. 딕은 허리를 숙여 늑대와 눈을 마주했다. 아무리 그래도 알고는 있는 사이 같은데?

“주인은 아니고 친구인가? 네 이름이 뭐니?”

늑대는 갑갑한 듯 딕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끼적이며 앞발로 무언가를 적었다. 터져버린 샘으로 인해 바닥은 온통 진창이었고 앞발로 적는 글이다 보니 늑대가 쓴 글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딕은 미간을 좁혔다.

“제이...? 제이라고 부르면 될까?”

늑대, 아니 제이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해 보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딕은 굳은 얼굴로 제이의 앞발을 양손으로 잡았다.

“제이, 나는 마법사거든? 아무래도 네 친구인 이 용병을 내가 터트려버린 것 같아.”

늑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칙슈/Spell/42p

화려하게 조각된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이 실내를 훤히 밝혔다. 은사로 수놓아진 얇은 커튼이 요정의 날개처럼 반짝인다.

나는 대체 어째서 독립된 한 개의 방이 이렇게까지 커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커다란 직육면체의 공간을 돌아보았다. 재질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미색의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높은 천정을 받친 몰딩에는 창과 일관된 스타일의 조각이 이어져 있다. 세밀하게 조각된 그것은 섬세한 세공 덕에 단정한 색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느낌을 주었고 조각된 틈새 어디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들과 사람들이 잔뜩 그려진 조각은 자세히 보니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신화나 역사의 한 장면일까? 나는 조각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찌푸렸다.

“제이슨, 넌 내 운명이라니까. 안 그래 시종장?”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두툼한 대리석의 테이블, 그리고 그 테이블과 한 세트인 것이 분명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조각의 내용을 이해하려 애쓰는 나를 두고, 내 앞의 두 사람은 신나게 말을 주고받았다. 아니, 신나는 것은 둘 중 한 명뿐으로, 나머지 하나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종알대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내 운명의 상대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소환 마법을 썼더니, 제이슨이 하늘에서 팡, 떨어진 거잖아!”

“그렇습니다.”

“이건 하늘이, 아니 마법의 창조자인 드래곤께서 점지해준 배필임이 틀림없다고.”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둘이 떠들거나 말거나, 나는 조각 속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대체로 역사적인 장소나 예술품 속 이야기가 그렇듯, 이 조각은 어떤 영웅의 모험담을 그린 것이었다. 내가 눈이 향한 부분은 그가 새로 변장한 신이 물어다 준 편지를 받고 연인에게 키스한 뒤 위험에 빠진 그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것이 아마도 이 나라의 건국 신화쯤 되는 이야기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대부분의 나라의 건국 신화처럼 고난을 이겨낸 영웅이 힘과 재치로 사람들을 구하고 고난을 이겨내 나라를 세우는 그런 이야기가 이어지리라. 양각으로 새겨진 작품만으로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꽤 단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지만 내가 감탄한 부분은 내용보다는 조각의 섬세함 쪽이었다. 새로 변신하는 신의 모습이라든지, 영웅의 날렵한 검이라든지, 그를 껴안는 연인에게서 은은하게 발하는 빛이라든지...이야기의 과정이 어찌나 아름답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지 과연 이걸 하나하나 조각한 사람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에 정신이 팔려 속으로 감탄을 반복하던 나를 정신 차리게 한 건, 맞은 편 자리에 앉아 혼자 한참이나 종알대던 그의 한 마디였다.

“그럼 역시 제이가 내 아내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뭐....에엑??????????”

제이슨 토드, 21세. 전 고담 대학교 체육과 3학년.

나는 지금 대륙 최강의 마법사이자 권력자이며, 최고의 물귀신에게 휘말려 내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 잡힐 위기에 처한 것이 분명하다.

 

달과자/북부대공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50p

“아무리 그래도 잠깐 가출했다고 얼굴도 못 본 남자에게 손자를 팔아치워 버리는 건 좀 아니죠! 안 그래요?!”

호위들은 딕의 비명에 별 반응이 없었다. 하긴 딕의 이런 발작은 한두번이 아니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들은 백작가 고용인으로서 딕의 온갖 기행에 익숙했다. 샹들리에에 올라가 그네를 타고, 사냥터지기 아이들과 편을 짜고 사슴을 잡아 고깃국을 끓여먹고, 평민인 척 거리 빵집 1일 직원으로 취직해 물건을 팔아치우고-3시간 만에 매진시켰다-, 노백작이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곰 머리 박제를 경매에 출품해 번 돈을 빈민가에 나눠주다가 수상쩍게 여긴 경비병에게 쫓겨다니는. 마지막 사건에서 경비병들은 백작가 물건을 훔쳐 경매에 팔아먹은 신원 미상의 인물-딕-을 잡지 못해 엄청나게 깨졌고, 나중에 그들의 처지를 알게 된 딕이 매우 미안해 하며 사과해 경비병들은 자존심을 더 다쳤다.

타닥타닥 눈발이 마차 유리창을 두드렸다. 딕은 손을 뻗어 유리창에 뽀득뽀득 결혼 상대, '제이슨 토드'를 써 보았다.

“......망나니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북부는 가혹한 기후에 땅은 척박했지만 희귀 광물이 나는 광산이 몇 있었고, 북부 수림의 몬스터는 흉폭하나 수렵하면 굉장한 자원이었다. 웨인 공작가의 세력은 북부 전역은 물론 대륙 중앙의 수도에도 퍼져 있고 가주 브루스 웨인은 왕과도 막역한 사이라고 들었다. 좋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딕은 언젠가 결혼을 해야 했다. 귀족들의 결혼은 사랑의 도피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정략결혼이 된다. 이왕 해야 한다면 딕은 아주 끝내주게 해 볼 작정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특기였으니까.

물론 약혼자가 건방지거나, 재수없거나, 지나치게 무례하다면 딕도 많이 참지는 않을 것이다. 할아버님의 가문도 소중하지만 딕의 미래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딕은 석 달간 항해하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풍광 좋은 섬 몇 개를 도피처로 눈여겨 봐 두었다.

도착했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북부대공의 성은 내리는 눈발 속에서 위협적으로 높게 우뚝 서 있었다. 고개를 꺾어야 첨탑 끝이 겨우 보였다. 대공의 아들이 만약 이 성 같다면 자존심이 세고, 조금 거칠고, 고집도 있을 것이다. 소문만큼 강퍅하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눈보라 속에서 마중 나온 이들이 보였다. 맞이하러 마차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 섞인 바람이 얼굴을 후려쳐 딕은 눈살을 찌푸렸다. 엄청난 눈보라였다. 정말, 이런 추운 계절에 혼약을 맺을 게 다 뭐람! 적어도 날이 풀린 다음에 혼약서를 보내지.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순간 훅 바람이 잦아들었다. 추위 역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자 마중 온 이가 검은 망토로 눈발 들이치는 방향을 가리고 서 있었다. 키가 딕보다 약간 더 컸다. 턱을 들고 올려다 보니 약간 녹색 섞인 푸른 눈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그......북부에, 잘 왔어.”

상상보다 더 어색해 하는 얼굴과, 잠긴 목소리.

딕은 첫인상으로 딱 결론을 내렸다. 망나니는 아니네.

*

“안녕. 반가워, 약혼자님.”

눈 붙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하는 청년의 눈동자가 웃음기를 담고 새파란 바다빛으로 반짝였다. 제이슨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재난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

 

꼬리/동화의 기원/36p(+a)

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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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토드 x 딕 그레이슨 커플링으로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글 그림 합동지 [종말론적 연애사]를 예약 판매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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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김나슬/비늘/서민/G0ringo/JoHa 다섯분의 존잘님들께서 보내주신 축전까지>ㅅ<♥♥♥

멸망한 세상에서 농장을 꾸리고 자급자족 생활을 시작해보세요!! 모든 것이 얼어붙은 소빙하기가 찾아와도, 좀비 아포칼립스가 도래해도, 바이러스로 인류가 절멸했어도, 괴물이 활보하는 황무지 세계에서도 슨딕이들은 꿋꿋하게 연애질을 합니다.

세계는 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 지향!! 2020년 상반기 슨딕러들을 위한 후회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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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슈/38p

고요를 깨고 끼익거리는 문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자연스럽게 제이슨의 고개가 향했다. 헛간으로 쓰는 건물에서 딕이 억새 더미를 제 상체보다 더 높이 쌓아 들고 나오고 있었다.

“뭐 하려고?”
“헛간에 해가 잘 안 들어서, 바싹 마르지 않네. 바깥에서 말려 넣어야 할 것 같아.”
“이리 줘.”

제이슨이 얼른 딕에게 다가가 억새의 반 정도를 빼앗듯 건네 들어, 일궈진 밭 한쪽에 놓인 너른 테이블에 고르게 펼치기 시작했다. 딕도 제이슨을 따라 고르게 억새를 흐트러뜨렸다. 둘이 거주하고 있는 집 근처의 웅덩이는 빼곡할 정도로 억새로 덮여 있었고, 이 억새를 잘 말려 건초로 만들면 헛간에서 키우는 가축들에게 안성맞춤인 식사가 된다. 헛간에는 젖소가 세 마리, 염소가 둘이 있었고, 헛간 곁의 공항의 철조망을 뜯어 든든하게 지은 우리에는 여러 가지 품종의 닭들이 있었다. 가축들은 제이슨과 딕이 이 공항 터에 자리 잡기 전에 거쳐 온 근처 농가에서 데려온 녀석들이었다. 경비행기 정도가 이착륙을 했음 직한 공항 근처는 허허벌판이었고, 차로 이 삽십분을 내달리면 농가 몇이 모인 작은 마을이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마을을 돌며 둘은 먹을만한 음식들과 냉동 및 저장식품, 여러 농작물의 종자, 농기구, 엽총, 생필품과 석유등을 그러모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들른 농장의 헛간의 염소 소리를 듣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두 데려오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둘은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왔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을 한 하얀 강아지는, 이름이 다 지워진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가축들을 모두 데려오기 위해, 둘은 농가의 트럭도 가져와야 했다. 트럭에 가축과 남은 사료, 농기구를 모두 싣고, 잠시 나뉘어서 차를 몰았다. 원래도 한적한 시골길은 고작 이차선의 도로였지만, 어쩌다 길에 멈춘 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둘은 그 길을 따라 달리다, 너른 벌판에 위치한 공항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저녁은 뭐로 할까?”
“닭들이 오늘 알을 많이 낳았던데, 계란으로 뭔가 하지 뭐.”

억새를 펼친 뒤 테이블 옆에 쭈그려 앉아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딕에게 제이슨이 답했다. 닭장의 닭들은 정성껏 돌보는 둘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처음 데려왔을 때보다 깃에는 윤기가 돌았고, 매일 낳는 알의 개수도 조금씩 늘었다.

“그럼 나는 빵이라도 구울게.”

딕이 말하며 읏차, 하고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버릇처럼 제이슨을 보고 싱긋 웃는 딕의 얼굴은 건강해 보일 정도로 빛 좋게 그을려 있었고, 여전히 빛이라도 나는 듯했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딕이 다시 한번 눈을 접어 웃었다.

“뭐가 좋다고 또 웃냐.”
“나쁠 것도 없잖아. 평화롭네. 좀 조용하지만.”

제이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겉으로는 혀를 끌끌 대면서도 실은 제이슨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쁠 것도 없었다. 물론, ‘그 날’ 이후 절대적인 힘 앞에 투쟁할 의지를 잃은 것은 사실이었다. 언제 갑자기 또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다음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둘 중 누군가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날고 기는 두 사람이라고 해도 둘은 뛰어넘을 수 없는 힘을 경험한 약해 빠진 인간이었고 그런 경험을 겪은 이상 마음의 기저에는 불안함이 항상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고 나면, 지금의 생활 자체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즈넷/32p

“제이, 왔어?”

사전에 이야기해둔 방식으로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환한 얼굴의 딕이 뛰쳐나왔다. 제이슨은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꾹 누르고 엄하게 말했다.

“노크 암호를 통과해도 경계는 하고 있으라고 했잖아.”

고담은 어쩌면 이 미국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일지 몰랐지만 제이슨의 경계는 끝이 없었다.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매일매일 노크 암호를 바꾸고 총기를 싫어하는 딕이 호신술을 익히는 걸 도와주며 제이슨의 걱정은 깊어질지언정 해소되지 않았다. 딕은 늘 그랬듯이 제이슨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제이슨을 끌어안았다. 바스락, 등 뒤에 숨겨둔 꽃다발이 가볍게 눌리며 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꽃다발이네!”

환하게 웃는 얼굴에 제이슨도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며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선물이야.”

지금 고백할까? 아니면 조금 더? 꽃다발을 품안에 안은 딕은 발그레 웃으며 제이슨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제이! 정말 예쁘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제이슨은 딕을 살짝 끌어안았다. 딕이 소중하게 안고 있는 꽃다발이 찌그러들지 않을 정도로 살짝만. 붉어진 귀를 감추기 위해 제이슨은 억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조심은 해. 근방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동맹을 맺었다고 해도 언제 침입자가 들어올지 모르니.”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너인 건 바로 알 수 있는걸?”
“그러다 된통 당하지.”

해맑은 목소리에 제이슨은 웃어버렸다. 이럴 때가 아닌데, 진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슨이 좀 더 조심하는 수밖에. 웃고 있는 차에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 오늘 저녁은 뭐야?”
“로스트 치킨, 간만에 솜씨 좀 발휘했지.”
“치킨?”

제이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동물이 귀하지 않겠느냐 싶지만 크기도 작아 데리고 다니기 쉬우면서 매일 달걀을 생산해내는 닭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나마 저렴한 수탉은 번식용으로, 암탉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로스트 치킨이라니? 딕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헨리 아주머니가 주셨어. 살이 꽤 오른 수탉인데 번식능력은 영 아니라고 해서 일 좀 도와드리고 얻어왔지!”

제이슨 역시 헨리 아주머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고담에서 닭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딕을 특히 귀여워했다. 딕은 매일 일을 도와드리고 달걀을 얻어왔는데 제이슨과 딕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래도 닭요리라니.

“잘됐네. 마침 와인도 가져왔는데.”

간만에 근사한 저녁이 될 것 같았다. 닭 요리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고 한참 분위기 좋아질 때에 반지를 내밀어야지. 제이슨의 가슴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녁은 예상대로 즐거웠다. 로이가 대충 던져준 줄 알았던 와인은 맛이 좋았고 딕의 실력이 완전히 발휘된 치킨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고소했다. 다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이슨은 반지를 줄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고 결국 식사가 끝날 때 까지 반지를 주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는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다 제이슨은 딕과 눈이 마주쳤다.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간 눈은 부드럽게 풀려 제이슨을 올려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꿈결처럼 몽롱하게 풀린 채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이슨은 그 순간 이 허름한 집 안에서, 망해가는 세계에서 그것만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 보드라운 딕의 뺨을 만지며 제이슨은 힘겹게 입을 꺼냈다. 바로 지금이었다. 쏟아져 나오려는 감정을 내보내기에 적절한 순간은.

“딕, 할 말이...”

그보다 딕의 입술이 더욱 빠르게 제이슨의 입에 맞닿았다.


랑슈/32p

겨울바람이 따뜻했다. 예전이었다면 누군들 코웃음을 칠 법한 소리였으나 지금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오직 겨울. 황량한 땅을 끊길 줄 모르는 눈발이 뒤덮고 온 세상을 몸서리쳐지는 창백한 색으로 물들이는 하늘 아래, 살을 에는 찬바람은 희미한 기억 속의 봄바람과 비슷한 수준의 감상을 남겼다. 이런 바람이 불 때면 좋은 일이 두 가지 있었고 나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앞이 보인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종류가 다른 마지막 한 가지는,

“입이 잘 안 움직이네.”

그것이 날뛰기 시작한다는 것. 제이슨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어깨에 걸쳐 둔 밧줄이 흔들렸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던 제이슨은 잠시 휘청였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목소리는 여전히 예쁘지?”

지랄하네. 짤막한 욕설을 입 안으로 씹어 삼킨 제이슨은 밧줄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 과정에서 제이슨은 자신이 구태여 필요하지 않았던 추가적인 힘을 들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등 뒤의 그것 역시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도 얼마 안 될 텐데, 머리가 녹았으면 슬슬 생각이란 걸 좀 해 봐. 네가 날 끌고 가는 게 이득일까, 내가 널 업고 가는 게 이득일까?”
“누가 누굴 업어?”

순간적으로 기가 차 내뱉어 버린 말에 제이슨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제 혀를 씹었을 때, 뒤에서는 쇠를 긁는 듯 날카롭고 건조한 웃음소리가 났다.

“왜 이래! 너 하나쯤 업고 달리는 건 내겐 일도 아니야. 알잖아? 제이버드.”

그때 제이슨은 더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눈밭에 반쯤 파묻힌 채 질질 끌려 제 몸으로 길을 내고 있던 그것을 덮쳐 한 손으로 목을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 머리채를 붙잡았다. 기습적인 공격에도 그것은 목이 졸리는 소리를 토해내긴커녕 숨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붙잡힌 머리칼에 잔뜩 붙어 있던 눈은 제이슨이 지척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차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녹은 물이 느릿하게 한 줄기 흘러 안구로 스며드는 순간에도 그것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일렁이는 금빛을 띠는 눈동자가 오롯이 제이슨을 응시하다, 제 머리채를 붙잡은 손을 보려는 듯 위를 향했다.

“기분 나빴어?”

그 말이 들린 순간 제이슨은 그것의 목을 잡고 있던 제 손에 힘이 풀렸음을 깨달았다. 장갑 너머로 간신히 쥔 것에는 온기가 없었다. 김 서린 숨을 내쉴 때마다 눈이 녹아가는 속도는 더 빨라졌지만, 손 아래 가린 것은 눈밭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희었다. 그리고 그 흰 피부 아래의 눈은 조금도 녹지 않았다. 제이슨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과 팔꿈치에 붙어 있던 눈이 후둑, 후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쌓였다.

“대답 좀 해 주지 그래? 폭력적이야. 내가 네 반응을 보고 행동을 결정해야 해?”

입이 잘 안 움직이긴 개뿔이. 눈밭에 눕혀진 그것이 지껄이는 소리를 무시하며 제이슨은 놓쳤던 밧줄을 다시 잡아 손등에 세 번 단단히 둘러 감았다. 반응을 보고 행동을 결정해? 제이슨은 코웃음을 쳤다. 처음에는 비웃음에 가까웠던 그 소리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허탈한 숨으로 바뀌어 갔다.
그 망할 자식은 단 한 번도 내 반응을 보고 행동한 적이 없었어.
속으로 중얼거린 것이 입 밖으로 조금 새어 나갔는지, 등 뒤로 이어지던 질질 끌리는 소음 사이 짧고 나직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그 소리가 기억 속의 어떤 것과 구역질이 나도록 비슷해 제이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엔나/52p

딕은 고글을 착용하고 중이륜 바이크에 탑승했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제이슨이 딕의 뒷자리에 냉큼 올라탔다. 웬만한 중소형 차량급의 출력을 자랑하는 몬스터 바이크는 그만큼 기름도 징그럽게 처먹었다. 중간중간 보급하기 위해 실어두었던 기름통은 전부 비어있었다.

“짐은 다 챙겼어? 탄환은? 넉넉해?”
“놉. 슬러그 탄만 세 개 남았어. 석궁은 어찌어찌 고치긴 했는데 이것도 쿼렐이 한 카트리지밖에 안 남았고.”
“으음, 애매하네. 기름이 정말로 간당간당해서 브릿지 시티까지 직선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중간에 서버릴 것 같은데.”
“무리야. 직선경로를 타면 틀림없이 가르노스 떼거리들이 달려들걸. 37번 도로로 우회하자. 기름이 닿는 데까지 가보고, 내려서 걸어야지 어쩌겠어. 바이크는 맥크레디한테 견인해 달라고 하고.” 

거기까지 말한 제이슨은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제기랄 맥크레디 녀석. 쎄빠지게 벌어서는 매번 그새끼한테 갖다 바치는 돈이 얼마야. 빌어먹을.
딕은 웃으며 제이슨의 뺨에 키스했다.

“화 풀어, 제이. 그래도 이번 의뢰는 제법 큰 건이었으니까. 데이터 큐브만 전달하고 나면 견인비를 좀 떼어줘도 쏠쏠하게 한 몫 챙길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좋으니까 가자.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겠어.”
“좋아. 후방 커버 부탁해.”

딕은 주저없이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배기량 1400cc에 달하는 4기통 엔진이 굉음을 토해냈다. 딕의 허리를 끌어안은 제이슨의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바이크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이며 37번 도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브릿지 시티는 문명시대의 마지막 날에 살아남은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인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수송대원들이 왕래했다. 
수송대는 각 지역의 위험요소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스페셜리스트였다. 교통 시스템이 파괴되고 도시와 도시가 고립된 이래로 황무지를 건너기 위해선 수송대의 동행이 필수였다. 그들은 사람과 물자와 정보까지 돈이 될만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운송했다. 딕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이슨과 단둘이 활동했기에 대형 화물이나 대규모 인원을 수송할 수는 없었지만, 탁월한 기동력과 높은 성공율 덕분에 귀중품이나 기밀문서의 운송 의뢰가 꾸준히 들어왔다.
딕은 제이슨과 함께 터벅터벅 브릿지 시티의 게이트를 통과했다. 게이트 수비대가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브릿지 시티를 베이스 캠프로 삼고 활동하는 나이트윙과 레드후드는 적어도 이 도시에서만큼은 통행증 없이 얼굴만으로도 프리패스였다. 딕은 수비대원 중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부숭부숭한 대머리 사내에게 살갑게 말을 건넸다.

“안녕 트로이. 맥크레디는 사무소에 나왔어?”
“헤이 프리티. 오랜만이네. 맥크레디 녀석? 글쎄, 별다른 얘기 없었으니 사무소에 있겠지? 왜, 또 차를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오셨나?”
“차가 아니라 바이크야. 캐브 나인 시티에서 오는 길이거든. 게이트 진입을 4, 5킬로미터 남기고 기름이 똑 떨어졌지 뭐야.”
“허. 캐브 나인에서 바이크로 달려오다니. 그런 미친 짓을 하는 건 너희들 밖에 없을 게다.”

대머리 사내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딕은 웃음을 터뜨리며 대머리 사내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후드를 깊게 눌라쓴 제이슨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두사람은 곧장 브로커 사무실로 향했다.


꼬리/20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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