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슨 경관의 전 파트너인 에이미 로어바흐는 청렴한 경찰인 동시에 좋은 아내였고, 귀여운 두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리고 햇병아리 순찰경관으로 배속된 딕을 이끌어준 멘토이기도 했다. 딕은 직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블뤼드헤이븐 시경을 휩쓸고 지나간 부패사건은 안 그래도 부족하던 인력난을 더더욱 부추겼다. 그 과정에서 초고속으로 승진하게 된 에이미 외 몇몇이 은밀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었다. 모름지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온갖 정치질과 견제가 난무하기 마련이고, 그것 뿐이라면 말단 순찰경관에 불과한 딕이 참견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고급 용병에게 청부살인을 사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그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용병이 딕 본인과 끈질긴 악연으로 엮인 사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3만하고도 1달러 50센트. 에이미 로어바흐를 죽이지 말 것. 명예를 아는 용병은 순순히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만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나이트윙이 지키려고 고군분투한 블뤼드헤이븐의 젊은 경감은 이제 최고급 청부업자의 손으로부터 안전해졌다.

딕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맨션으로 돌아왔다. 연 이틀째 부상당하고 얻어맞은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블뤼드헤이븐은 고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범죄가 들끓는 도시였고, 그나마의 부패경찰들이 대거 잘려나간 이후로는 더더욱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딕은 자경단으로서 옥상 위를 뛰어다니는 밤에는 물론 경찰로서 거리를 순찰하는 낮에도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와중에 난데없이 등장한 데스스트록은 그 명성에 걸맞게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필이면 그 타겟이 딕의 전 파트너이자 지금의 직속 상관인 에이미인 것에 이르러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이 마치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딕은 도박을 걸었고, 용병은 순순히 물러갔다. 에이미는 살아남았다. 데스스트록을 고용하여 에이미를 노린 의뢰인이 또 어떤 일을 꾸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코앞에 직면했던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이틀이 지나가고 상황이 얼추 해결되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리 제 집이더라도 까맣고 파란 쫄쫄이를 입은 채로는 현관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딕은 창문을 통해 불 꺼진 빈 집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집안은 며칠째 이어진 정신없는 생활을 반영하듯 어수선했다.
딕은 발에 채이는 옷가지나 잡동사니들을 적당히 피해가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도미노마스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갑도 한 쪽씩 벗었다. 그리고 먼지와 땀으로 꼬질꼬질해진 나이트윙 수트의 상의를 막 벗으려는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지며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멈춰.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기가 내달렸다. 등줄기를 따라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딕은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슬레이드.”

목까지 감싸는 질긴 수트 위로 단단하고 뾰족한 금속이 닿는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거리를 감안하면 그가 애용하는 대검은 아닐 것이다. 탄화 텅스텐으로 코팅된 컴뱃 나이프가 딕의 경추를 겨누었다. 수트의 목덜미가 예리하게 가로로 갈라졌다.
딕은 무척이나 민첩한 편이었지만, 슬레이드라면 딕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목뼈 사이로 칼날을 비집어넣어 척수를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딕은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목을 죄어왔다. 거실을 채운 폭력적이고 불온한 기류가 답답하게 숨통을 압박했다.

“당신은 살인자이긴 하지만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 물론이지. 꼬마. 그 여자는 더 이상 내 타겟이 아니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그 여자와 관련된 어떤 의뢰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렇다면 무슨 볼일이지?”
“너와 나 사이에 딱히 볼일이 있어야만 하던가?”

답지 않게 유들유들한 대답에 딕은 실소를 흘렸다. 당신과 나 사이라니, 사람한테 칼을 들이밀어놓고 참 재미있는 말을 하네. 딕이 혼잣말처럼 이죽거렸고 용병은 딕의 목덜미에 댄 칼날을 조금 더 꾸욱 밀었다가 떼어냈다. 손 안에서 빙글 방향을 바꾼 컴뱃나이프가 홀스터의 제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딕은 두 손을 내렸지만, 아직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팔의 부상이 꽤 불편해 보이더군.”
“하하, 고양이 쥐 생각이라더니. 새삼 참 고맙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거창하게 총상씩이나 남겨주셔서 대단히 자랑스러우시겠어.”
“빈정거리지 마라, 꼬마. 그 정도도 피하지 못한 건 네가 부족했다는 증거다. 아니면 뭐, 잠이 부족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셈인가?”
“.......”

슬레이드의 말에 딕은 입을 다물었다. 적으로부터 이런 식의 지적을 받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막캡슐이 됐건 섬광탄이 됐건 하다못해 손에 집히는 뭐라도 던져서 슬레이드가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어야 했다. 그의 총구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킨 채 총알이 빗나가길 바라며 단순히 몸을 옆으로 날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대응이었다. 왼쪽 어깨를 스친 부상으로 그친 것은 오히려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제 목숨이 날아갔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딕이 그렇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에는 누적된 피로가 한 몫을 했다. 딕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 적에게 자신의 현재 컨디션과 상황을 단번에 간파당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움직임이 둔하고 상황 판단도 미흡했어. 박쥐의 망토 아래 있을 때에 비해서 나아진 점이 없더군. 컨디션을 엉망진창으로 관리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예전만도 못해. 말해봐라, 딕 그레이슨. 도대체 이 도시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근거없는 날조라던지 싸구려 도발이면 무시하고 넘기면 그만일텐데, 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 슬레이드의 목소리에는 그러나 어쩐지 즐거운 듯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치욕적이었다.

“이번 일만 봐도 박쥐는 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어. 이런 작은 도시에 매여서 의미없는 싸움에 스스로를 갈아넣는 것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딕 그레이슨.”

용병의 손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두터운 장갑을 낀 커다란 손바닥이 예리하게 잘려나간 수트 아래의 맨살을 천천히 더듬었다. 딕은 움직이지 않았다. 슬레이드는 끈질기게 딕의 목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질긴 케블라 장갑이 목에서부터 승모근을 따라 왼쪽 어깨로 내려와서는 슬레이드 본인이 남긴 총상 위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애지중지 아끼는 새한테 이렇게 흠집이 났으니 박쥐가 이를 갈았겠군.”
“배트맨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내 의지로 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니까.”
“네 도시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어리석은 말 하지 말아라. 너는 스스로가 박쥐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할런지 몰라도, 사실은 여전히 그의 통제력이 미칠 만한 곳에 보란 듯이 자리잡고서 그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야. 이런 식으로라면 영원히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뱀과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유혹했다.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지. 나는 너의 재능과 열정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박쥐처럼 너를 방치하지 않을 거다. 너는 뛰어나지만, 아직 좀 더 갈고 닦아야 해. 내가 진정한 스승으로서 너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마.
타락을 종용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딕의 고질적인 컴플렉스를 자극했다. 딕은 독립을 원하면서도 결코 고립되기를 원치 않았다. 주변인들을 밀어내는 배트맨의 행동에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그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딕은,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언제나 유대감과 소속감에 목말랐었다. 그것은 서툴기만 한 브루스가 결코 채워줄 수 없었던 결핍이었다.
슬레이드 본인을 뛰어넘을 때까지 딕을 이끌어주겠노라 유혹하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음습하면서도 감미로웠다.

한 순간, 딕이 웃었다. 딕은 제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슬레이드의 손등 위로 자신의 오른손을 덮었다. 장갑을 벗은 흉터투성이의 맨손이 용병의 두터운 장갑 위에 포개졌다.

“내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혼잣말처럼 반문하는 딕의 목소리에 자조적인 미소가 섞여있었다. 용병의 거친 손 위를 뭉근한 손길이 어루만졌다. 딕은 슬레이드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반바퀴를 돌아서 나이든 용병을 마주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파란 눈 한 쌍이 가면을 벗은 외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속눈썹이 촘촘한 눈꺼풀이 반쯤 내리감겼다.
딕은 왼손을 슬레이드의 어깨에 가볍게 얹고 살짝 당겼다. 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 까치발을 서자 자신보다도, 배트맨보다도 커다란 용병과의 키 차이가 훌쩍 줄어들었다. 딕은 고개를 쳐들고 용병을 끌어당기며 순종적으로 눈을 감았다. 남자에게서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체취에 배어든 화약냄새가 났다.
슬레이드는 제가 휘두른 폭력으로 여기저기 긁히고 멍든 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눈동자를 숨긴 눈꺼풀이 설풋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용병은 주저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한 팔로 늘씬한 등을 감아 당기자 유연한 몸이 순순히 품안에 안겨들었다.
표면이 살짝 부르튼 입술을 가르고 매끈한 이를 혀로 더듬자 안쪽의 혀가 화답하듯 조심스럽게 응해왔다. 두툼한 혀가 치열을 가르고 입 안으로 깊게 침범해 들어왔다. 다소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안쪽을 휘젓자 으응, 하고 나지막하게 목을 울리며 용병의 단단한 어깨에 얹어진 손 끝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슬레이드는 사양치 않고 무방비한 입안을 마음껏 탐했다. 까슬한 수염이 부벼지고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부딪혔다.

매달리는 것처럼 슬레이드를 끌어안고있던 팔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혀를 감아올리고 타액을 훑어내던 진한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살며시 감겨있던 눈이 두어번 깜박거리다가 나이든 용병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열정적인 키스의 여운은 어디로 갔는지,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표정에 슬레이드의 외눈이 멈칫 찌푸려졌다.

“스승이 제자에게 해주는 키스 치고는 너무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나?”

딕의 입술이 한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용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기를 띤 외눈이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슬레이드의 벨트에서 슬쩍해낸 소형 케미컬 수류탄을 보란듯이 얼굴 앞으로 들어보였다. 검지손가락 끝에 걸린 핀은 금방이라도 뽑혀나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돌아가 슬레이드. 다시는 내 도시에 오지 마.”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안겨오던 몸이 반보 물러섰다. 얌전하게 내리깔았던 눈이 도전적으로 용병을 노려보았다. 슬레이드는 잠시동안 딕을 마주보며 대치하다가 이내 두 손을 들었다.

“알겠다. 이번에는 이쯤에서 물러가도록 하지.”

 위협적인 거구가 반 바퀴 돌아서 창으로 향했다. 공격하려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채였지만, 딕은 섣불리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병은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열린 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블라인드가 흔들렸다. 딕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소파에 주저앉았다. 몇 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고, 요 이틀간은 에이미의 청부살인 건으로 심신이 극한까지 몰아붙여진 채였다. 어깨의 총상으로부터 욱씬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딕은 이를 갈며 한 팔로 눈을 가렸다. 진통제조차 사용하지 않아서 집요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통증이, 마치 아픔을 느낄 때마다 슬레이드를 떠올리도록 그가 의도적으로 남긴 낙인처럼 느껴졌다.

죽을 만큼 피곤했다. 찰나의 수면이 절실했다. 딕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새벽까지 사나운 꿈자리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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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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