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x탈론/ 울트라맨x딕

2015. 8. 2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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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딕 합작 단편

2015. 7. 3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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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슨 경관의 전 파트너인 에이미 로어바흐는 청렴한 경찰인 동시에 좋은 아내였고, 귀여운 두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리고 햇병아리 순찰경관으로 배속된 딕을 이끌어준 멘토이기도 했다. 딕은 직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블뤼드헤이븐 시경을 휩쓸고 지나간 부패사건은 안 그래도 부족하던 인력난을 더더욱 부추겼다. 그 과정에서 초고속으로 승진하게 된 에이미 외 몇몇이 은밀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었다. 모름지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온갖 정치질과 견제가 난무하기 마련이고, 그것 뿐이라면 말단 순찰경관에 불과한 딕이 참견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고급 용병에게 청부살인을 사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그건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 용병이 딕 본인과 끈질긴 악연으로 엮인 사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3만하고도 1달러 50센트. 에이미 로어바흐를 죽이지 말 것. 명예를 아는 용병은 순순히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만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나이트윙이 지키려고 고군분투한 블뤼드헤이븐의 젊은 경감은 이제 최고급 청부업자의 손으로부터 안전해졌다.

딕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맨션으로 돌아왔다. 연 이틀째 부상당하고 얻어맞은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블뤼드헤이븐은 고담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범죄가 들끓는 도시였고, 그나마의 부패경찰들이 대거 잘려나간 이후로는 더더욱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딕은 자경단으로서 옥상 위를 뛰어다니는 밤에는 물론 경찰로서 거리를 순찰하는 낮에도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와중에 난데없이 등장한 데스스트록은 그 명성에 걸맞게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필이면 그 타겟이 딕의 전 파트너이자 지금의 직속 상관인 에이미인 것에 이르러서는 이 지긋지긋한 악연이 마치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쨌든 딕은 도박을 걸었고, 용병은 순순히 물러갔다. 에이미는 살아남았다. 데스스트록을 고용하여 에이미를 노린 의뢰인이 또 어떤 일을 꾸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코앞에 직면했던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이틀이 지나가고 상황이 얼추 해결되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리 제 집이더라도 까맣고 파란 쫄쫄이를 입은 채로는 현관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딕은 창문을 통해 불 꺼진 빈 집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집안은 며칠째 이어진 정신없는 생활을 반영하듯 어수선했다.
딕은 발에 채이는 옷가지나 잡동사니들을 적당히 피해가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도미노마스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갑도 한 쪽씩 벗었다. 그리고 먼지와 땀으로 꼬질꼬질해진 나이트윙 수트의 상의를 막 벗으려는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지며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멈춰.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한기가 내달렸다. 등줄기를 따라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딕은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에서 저벅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슬레이드.”

목까지 감싸는 질긴 수트 위로 단단하고 뾰족한 금속이 닿는 기척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거리를 감안하면 그가 애용하는 대검은 아닐 것이다. 탄화 텅스텐으로 코팅된 컴뱃 나이프가 딕의 경추를 겨누었다. 수트의 목덜미가 예리하게 가로로 갈라졌다.
딕은 무척이나 민첩한 편이었지만, 슬레이드라면 딕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목뼈 사이로 칼날을 비집어넣어 척수를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딕은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목을 죄어왔다. 거실을 채운 폭력적이고 불온한 기류가 답답하게 숨통을 압박했다.

“당신은 살인자이긴 하지만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 물론이지. 꼬마. 그 여자는 더 이상 내 타겟이 아니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그 여자와 관련된 어떤 의뢰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그렇다면 무슨 볼일이지?”
“너와 나 사이에 딱히 볼일이 있어야만 하던가?”

답지 않게 유들유들한 대답에 딕은 실소를 흘렸다. 당신과 나 사이라니, 사람한테 칼을 들이밀어놓고 참 재미있는 말을 하네. 딕이 혼잣말처럼 이죽거렸고 용병은 딕의 목덜미에 댄 칼날을 조금 더 꾸욱 밀었다가 떼어냈다. 손 안에서 빙글 방향을 바꾼 컴뱃나이프가 홀스터의 제 자리를 찾아들어갔다. 딕은 두 손을 내렸지만, 아직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팔의 부상이 꽤 불편해 보이더군.”
“하하, 고양이 쥐 생각이라더니. 새삼 참 고맙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거창하게 총상씩이나 남겨주셔서 대단히 자랑스러우시겠어.”
“빈정거리지 마라, 꼬마. 그 정도도 피하지 못한 건 네가 부족했다는 증거다. 아니면 뭐, 잠이 부족했다고 변명이라도 할 셈인가?”
“.......”

슬레이드의 말에 딕은 입을 다물었다. 적으로부터 이런 식의 지적을 받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막캡슐이 됐건 섬광탄이 됐건 하다못해 손에 집히는 뭐라도 던져서 슬레이드가 제대로 조준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어야 했다. 그의 총구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킨 채 총알이 빗나가길 바라며 단순히 몸을 옆으로 날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대응이었다. 왼쪽 어깨를 스친 부상으로 그친 것은 오히려 운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제 목숨이 날아갔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리고 딕이 그렇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에는 누적된 피로가 한 몫을 했다. 딕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 적에게 자신의 현재 컨디션과 상황을 단번에 간파당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움직임이 둔하고 상황 판단도 미흡했어. 박쥐의 망토 아래 있을 때에 비해서 나아진 점이 없더군. 컨디션을 엉망진창으로 관리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예전만도 못해. 말해봐라, 딕 그레이슨. 도대체 이 도시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근거없는 날조라던지 싸구려 도발이면 무시하고 넘기면 그만일텐데, 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심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차는 슬레이드의 목소리에는 그러나 어쩐지 즐거운 듯한 기색이 담겨있었다. 치욕적이었다.

“이번 일만 봐도 박쥐는 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어. 이런 작은 도시에 매여서 의미없는 싸움에 스스로를 갈아넣는 것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딕 그레이슨.”

용병의 손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두터운 장갑을 낀 커다란 손바닥이 예리하게 잘려나간 수트 아래의 맨살을 천천히 더듬었다. 딕은 움직이지 않았다. 슬레이드는 끈질기게 딕의 목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질긴 케블라 장갑이 목에서부터 승모근을 따라 왼쪽 어깨로 내려와서는 슬레이드 본인이 남긴 총상 위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애지중지 아끼는 새한테 이렇게 흠집이 났으니 박쥐가 이를 갈았겠군.”
“배트맨과는 상관 없어. 나는 내 의지로 내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니까.”
“네 도시라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어리석은 말 하지 말아라. 너는 스스로가 박쥐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할런지 몰라도, 사실은 여전히 그의 통제력이 미칠 만한 곳에 보란 듯이 자리잡고서 그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야. 이런 식으로라면 영원히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뱀과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유혹했다.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지. 나는 너의 재능과 열정을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박쥐처럼 너를 방치하지 않을 거다. 너는 뛰어나지만, 아직 좀 더 갈고 닦아야 해. 내가 진정한 스승으로서 너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마.
타락을 종용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딕의 고질적인 컴플렉스를 자극했다. 딕은 독립을 원하면서도 결코 고립되기를 원치 않았다. 주변인들을 밀어내는 배트맨의 행동에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그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했다. 딕은,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언제나 유대감과 소속감에 목말랐었다. 그것은 서툴기만 한 브루스가 결코 채워줄 수 없었던 결핍이었다.
슬레이드 본인을 뛰어넘을 때까지 딕을 이끌어주겠노라 유혹하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음습하면서도 감미로웠다.

한 순간, 딕이 웃었다. 딕은 제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슬레이드의 손등 위로 자신의 오른손을 덮었다. 장갑을 벗은 흉터투성이의 맨손이 용병의 두터운 장갑 위에 포개졌다.

“내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혼잣말처럼 반문하는 딕의 목소리에 자조적인 미소가 섞여있었다. 용병의 거친 손 위를 뭉근한 손길이 어루만졌다. 딕은 슬레이드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반바퀴를 돌아서 나이든 용병을 마주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파란 눈 한 쌍이 가면을 벗은 외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속눈썹이 촘촘한 눈꺼풀이 반쯤 내리감겼다.
딕은 왼손을 슬레이드의 어깨에 가볍게 얹고 살짝 당겼다. 발 뒤꿈치를 살짝 들어 까치발을 서자 자신보다도, 배트맨보다도 커다란 용병과의 키 차이가 훌쩍 줄어들었다. 딕은 고개를 쳐들고 용병을 끌어당기며 순종적으로 눈을 감았다. 남자에게서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체취에 배어든 화약냄새가 났다.
슬레이드는 제가 휘두른 폭력으로 여기저기 긁히고 멍든 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눈동자를 숨긴 눈꺼풀이 설풋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용병은 주저없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한 팔로 늘씬한 등을 감아 당기자 유연한 몸이 순순히 품안에 안겨들었다.
표면이 살짝 부르튼 입술을 가르고 매끈한 이를 혀로 더듬자 안쪽의 혀가 화답하듯 조심스럽게 응해왔다. 두툼한 혀가 치열을 가르고 입 안으로 깊게 침범해 들어왔다. 다소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안쪽을 휘젓자 으응, 하고 나지막하게 목을 울리며 용병의 단단한 어깨에 얹어진 손 끝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슬레이드는 사양치 않고 무방비한 입안을 마음껏 탐했다. 까슬한 수염이 부벼지고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부딪혔다.

매달리는 것처럼 슬레이드를 끌어안고있던 팔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혀를 감아올리고 타액을 훑어내던 진한 키스가 끝나고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살며시 감겨있던 눈이 두어번 깜박거리다가 나이든 용병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열정적인 키스의 여운은 어디로 갔는지,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표정에 슬레이드의 외눈이 멈칫 찌푸려졌다.

“스승이 제자에게 해주는 키스 치고는 너무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나?”

딕의 입술이 한 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용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기를 띤 외눈이 딕을 노려보았다. 딕은 슬레이드의 벨트에서 슬쩍해낸 소형 케미컬 수류탄을 보란듯이 얼굴 앞으로 들어보였다. 검지손가락 끝에 걸린 핀은 금방이라도 뽑혀나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돌아가 슬레이드. 다시는 내 도시에 오지 마.”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안겨오던 몸이 반보 물러섰다. 얌전하게 내리깔았던 눈이 도전적으로 용병을 노려보았다. 슬레이드는 잠시동안 딕을 마주보며 대치하다가 이내 두 손을 들었다.

“알겠다. 이번에는 이쯤에서 물러가도록 하지.”

 위협적인 거구가 반 바퀴 돌아서 창으로 향했다. 공격하려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채였지만, 딕은 섣불리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병은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열린 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와 블라인드가 흔들렸다. 딕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소파에 주저앉았다. 몇 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고, 요 이틀간은 에이미의 청부살인 건으로 심신이 극한까지 몰아붙여진 채였다. 어깨의 총상으로부터 욱씬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딕은 이를 갈며 한 팔로 눈을 가렸다. 진통제조차 사용하지 않아서 집요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통증이, 마치 아픔을 느낄 때마다 슬레이드를 떠올리도록 그가 의도적으로 남긴 낙인처럼 느껴졌다.

죽을 만큼 피곤했다. 찰나의 수면이 절실했다. 딕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새벽까지 사나운 꿈자리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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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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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를 간신히 덮는 노란 망토가 활짝 펼쳐졌다. 소년은 마치 새처럼 날았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밤공기에 울렸다.
이제 막 보석상을 털고 도주하던 강도들이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사이 시커먼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익히 알려진대로, 배트맨 앞에 총을 들이대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범인들을 묶어놓고 손을 탁탁 터는 로빈의 뒷모습을 보며 배트맨은 눈을 찌푸렸다. 이제 막 성장기를 맞이하여 길쭉하고 늘씬한 다리에 새롭게 긁힌 상처와 멍자국이 생겨있었다. 배트맨의 시선을 느낀 딕이 빙글 몸을 돌렸다.

"다 끝냈어요!!!"

경쾌한 발소리가 탁탁 골목길을 두드렸다. 배트맨은 소년을 재빨리 위아래로 훑으며 다른 부상은 없는지 확인했다. 늘씬한 몸이 스스럼없이 다가와서는 배트맨의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꼈다.

"죄송해요, 싸우다가 그래플링 건의 실린더가 조금 찌그러진 것 같아요."

배트맨은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제 망토로 소년을 감쌌다. 맞춘 듯이 착 달라붙어오는 몸은 무척이나 가볍고 유연했다. 소년의 허리를 단단히 한 팔로 감아안고, 배트맨은 빌딩의 가고일상을 향해 와이어로프를 쏘아올렸다.
배트맨의 허리춤을 두 팔로 끌어안고 매달린 소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몸에 밀착된 회색의 방탄수트 위로 작은 진동이 전해져왔다. 와이어로프가 당겨지며 박쥐의 검은 날개가 허공에 펼쳐졌다.

케이브로 복귀하는 것에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담의 공기를 흠뻑 머금은 검은 차체가 폭포의 벽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제트엔진의 굉음이 동굴 안의 돌벽에 부딪히며 웅웅 울려댔다. 콕핏의 해치가 열리자 노란 망토를 나풀거리는 작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상처부터 소독해라."
"네~엡!!"

부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타박상과 찰과상에 불과했지만 어린 군인은 충실하게 배트맨의 지시를 따랐다.
갈색 병에 든 소독약과 핀셋과 탈지면을 챙겨 간이의자에 앉은 딕은 무릎과 정강이의 상처에 조심스레 소독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워 올린 희고 늘씬한 다리 위에 적갈색 얼룩이 점점이 수놓였다. 소년의 피부는 일반적인 코카서스에 비하면 살짝 부드러운 밀빛을 띄고 있었다. 아직 2차성징이 오지 않아 옅은 체모와 매끄러운 피부는 양질의 흙을 잘 빚어서 구운 도자기인형을 생각나게 했다.
배트맨은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담의 밤을 누비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소년의 살갗에는 자잘한 흉터가 늘어나고 있었다.

무릎과 정강이의 상처를 소독한 딕이 간이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년은 엉덩이께에서 달랑거리는 망토자락을 한쪽으로 걷어 모아쥐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목울대가 튀어나오지 않아 미끈한 목을 길게 빼고 허벅지 바깥쪽의- 거의 뒤쪽에 가까운- 베인 상처를 살피는 파란 눈이 깜박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려보기도 하고 다리를 옆으로 쭉 뻗어보기도 하며 한참이나 몸을 숙였다가 폈다가 이리저리 틀어대던 딕은 이내 브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브루스. 손이 잘 안닿아요. 약 좀 발라주세요."

소년은 천진한 표정으로 도움을 청했다. 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브루스를 향한 무한한 신뢰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아요. 당신이 모든걸 해결해줄 거라 믿으니까요!' 소년의 태도는 종종 무방비하게 느껴질 정도여서, 예민하고 까다로운 박쥐의 걱정을 샀다.

브루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딕에게 다가갔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 쥐어져있던 핀셋이 브루스의 커다란 손으로 옮겨졌다. 딕은 한 손으로 망토자락을 모아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간이의자의 등받이를 짚으며 브루스로부터 돌아섰다. 허벅지 바깥쪽에서부터 약간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베인 상처가 잘 보이도록, 소년은 시키기도 전에 알아서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몸을 뒤쪽으로 내밀었다.
빨간 조끼를 껴입은 등판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해 가느다랗고 좁았다. 브루스는 탈지면에 요오드 소독액을 적셔 베인 자국을 따라 가볍게 두드렸다. 상처가 따가운지 갸름한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다. 딕은 흡, 하고 숨을 삼키며 의자 등받이를 짚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딱 맞붙이고 있던 무릎이 저도모르게 살짝 떨렸다.

"아픈가?"

브루스가 나지막하게 물었고 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이 정도야 별 거 아닌걸요."
"......그래."

소독약을 다 바르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밴드까지 꼼꼼히 붙인 브루스는 구급용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건틀렛을 낀 손이 딕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래도 다음 번에는 다치지 않도록 좀 더 조심하는 것이 좋겠구나."

딕은 배트맨을 향해 돌아서며 넵!! 하고 대답했다. 나일론으로 된 가벼운 망토자락이 팔락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직 젖살이 남아 부드러운 뺨이 복숭아빛으로 뽀얗게 물들었다. 치료해주셔서 고마워요. 소년은 도미노 마스크를 벗은 화사한 얼굴로 헤헤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12년, 혹은 13년 전이었던가. 브루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깔깔거리며 그의 왼팔에 매달린 몸은 한 손으로 목덜미를 달랑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맞은편의 팀은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이트윙."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미간에 골 생긴거 봐, 고담 일등 신랑감 자리를 사수하려면 이제 주름관리도 좀 해야죠."
"딕."
"모르간의 마법은 브루스도 익히 체험해 봤잖아요?"

변성기를 맞이하지 않은 어린애 특유의 높은 목소리가 재잘거렸다. 당신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듯 파란 눈동자에 브루스를 가득 담고 올려다보던 소년은, 어느덧 능청스러운 어른이 되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브루스를 이겨먹으려 들었다.
그것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지금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브루스는 겨우 자신의 명치께에나 닿을까말까 할 정도로 작아진 딕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딕은 꼼지락거리며 브루스의 팔을 잡아당겨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하고있는 팀을 슬쩍 곁눈질하며 귓속말을 속삭였다. '사실은 제가 일부러 이번 임무에 자원한 거예요.'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모처럼 어려졌는데, 이대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엔 아깝지 않겠냐는 말에는 은밀한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아깝다니, 도대체 뭐가?

"앞으로 다섯시간 정도 남았다구요. 네?"

고사리같은 손이 배트맨 수트의 박쥐 마크를 콕콕 찔러댔다. 브루스는 아연해서 말을 잃었다. 다섯시간이 남았으면 남은 거지, 도대체 뭘 어쩌자고? 대놓고 따지고 싶었지만 차마 팀 앞에서 할 말이 아닌지라 브루스는 턱끝까지 올라온 말을 꾹꾹 삼켰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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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완성하면 단편란으로 옮길 예정;;;;


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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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겼다, 딕. 당장 케이브로 오도록.]

어느날 브루스로부터 날아온 문자메시지에 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다 저렇다 설명도 없이 딸랑 한 줄 짜리 메시지가 PDA에 깜빡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그들이 평소 사용하는 채널로 통신을 연결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브루스가 자세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자신의 일가를 호출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럴 때는 빠른 연락을 위해 통신 회선을 열어놓는 편이었는데.
딕은 의아해 하면서도 망설임없이 수트를 갈아입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늦은 새벽이라서인지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고담까지는 전속력으로 40분이면 충분했고, 딕은 한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케이브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음성 인식으로 보안 시스템을 통과하여 들어왔을 때, 케이브에는 아무도 없었다.

“브루스?”

딕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텅 빈 동굴에선 메아리만 울렸다. 사용자가 없는 시간까지도 바쁘게 돌아가며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고담의 거리를 모니터링하는 컴퓨터의 소음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일단 케이브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사람을 불러놓고 자리에도 없는 거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 브루스에게 통신을 연결해보려던 딕은, 문득 컴퓨터의 키패드 앞에 떡하니 앉아있는 제3의 생물체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고양이?

케이브에 고양이라니, 설마 데미안이 또 유기동물이라도 주워온 걸까? 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배트 컴퓨터 앞에 자리잡고 앉은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등을 세우고 고개를 꼿꼿이 쳐든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고양이가 딕을 향해 돌아보더니 짤막하게 야옹, 하고 울었다. 반지르르하게 온 몸을 덮은 칠흑같은 검은색 털에, 새파랗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었다. 딕을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은 제가 응시하는 대상을 꿰뚫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무의식적으로 반 걸음 물러난 딕의 표정이 애매하게 찌그러졌다.
설마.
설마...?

“.....브루스?”

긴가민가 조심스레 운을 띄운 딕은, 고양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야옹, 하고 울자 진심으로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야?! 브루스가 고양이가 되다니??
고담의 다크나이트가 지금 겨우 12파운드짜리 고양이가 되어버렸다고???

“브루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가 이모양 이 꼴이....”

당황해서 고양이에게 다가가려던 딕은 고양이....아니, 브루스가 두 귀를 젖히며 우우웅,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자 황망하게 그 자리에 멈춰섰다. 중장모의 새까만 털로 풍성하게 뒤덮인 꼬리가 컴퓨터의 키패드를 탕탕 내리쳤다.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딕은 저도 모르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팀은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걸까?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평소와 다르게 음성 통신이 아닌 문자를 보낸 게 이런 이유였던 걸까?
딕은 브루스의 불편한 심기를 고려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턱 아래부분에서 가슴 윗쪽까지 손바닥만한 마름모형의 흰 털을 제외하면 전신이 새까만 색이었는데, 일반적인 단모보다 기다란 이중모에 매끄러운 윤기가 흘렀다.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고양이들보다 몸집이 상당히 큰 것을 보면- 고양이들 중 몸집이 큰 편에 속하는 노르웨이 숲고양이니 메인쿤 정도의 크기는 되는 것 같았다- 과연 고양이가 되었어도 브루스는 브루스인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바싹 젖혀져있던 귀가 슬그머니 다시 세워졌다. 딕은 가뜩이나 기분이 저조할 브루스를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두 걸음 정도로 가까워진 위치에서 고양이, 아니, 브루스를 살펴보고 있으려니 막막한 기분이 밀려왔다. 일단 눈에 띄는 외상은 없는 듯 했지만, 털길이가 짧은 귀나 콧잔등 부위에는 아문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자잘한 흉터들이 보였다.

“맙소사 브루스.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딕은 약간 질린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고, 시무룩한 표정을 한 브루스가 고개를 숙이며 꼬리를 좌우로 휙휙 흔들었다. 보아하니 말은 할 수 없는 것 같은데- 고양이와 사람의 구강구조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그럴법 했다- 도대체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런지. 역시 리그 차원에서 나서야 할 문제인가. 딕은 자꾸만 산만해지는 머릿속을 추스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케이브의 컴퓨터에 저장된 리그의 사건 기록을 열람해본 적이 있었다. 전미급, 나아가서 전세계급의 사건을 처리하는 리그답게 온갖 희한한 기록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원더우먼 다이애나가 모종의 마법에 걸려 돼지의 모습으로 변한 채 반나절 가량을 지냈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흐음, 역시 그렇겠죠. 멀쩡한 인간을 전혀 다른 종으로 바꿀 수 있을만한 것은 역시 마법 정도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자타나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까요?”

무의식적으로 브루스를 향해 손을 내밀려던 딕은 매섭게 손등을 찰싹 후려치는 손길에 움찔 손을 거두었다. 오른쪽 앞발을 치켜든 브루스가 흉흉한 눈초리로 딕을 쏘아보고 있었다. 딕은 순식간에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었다.

“세상에, 브루스. 지금 그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저를 친 거예요? 불러서 왔는데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장갑을 끼고 있어서 발톱에 긁히지도 않았고, 고양이 앞발에 맞아봤자 아플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딕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브루스는 파란 눈을 치뜨며 애옹, 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알았어요, 알았어. 크기가 20분의 1로 줄었어도 당신 성격이 어디 갈리가 없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잘못했어요. 알았으니까 그 손, 아니 앞발....아니, 그러니까 손 좀 내리세요.”

안 그래도 다루기 어려운 사람인데, 동물이 되어버리니 더더욱 까탈스러워진 모양이었다. 하긴,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케이브까지 들어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 것이며, 생체인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컴퓨터는 또 어떻게 실행시켰을 것이며, 저 북실북실한 앞발로 키패드를 눌러 딕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은 또 얼마나 험난했겠냐는 말이다. 이번만큼은 브루스가 받았을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로부터 비롯된 예민한 반응을 딕이 전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옳았다. 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저는 전적으로 당신 편이라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일들이 얼만데, 이 정도야 금방 되돌릴 수 있을 거예요. 으음, 하지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컴퓨터 위에 털이 떨어지면 안되잖아요? 보세요, 지금만 해도 당신이 키패드 위에 떨어뜨려놓는 털로 장갑을 한 켤레 짤 수 있을 정도라구요. 당신이 운전석을 양보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컴퓨터는 저에게 양보해주면 안될까요?”

어차피 당신은 타이핑도 제대로 할 수 없잖아요.... 딕은 까맣고 짧은 털로 복슬복슬한 브루스의 앞발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밉살스럽게 꼬리만 휘휘 저어대는 브루스는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문득, 꼿꼿하게 앉아있던 브루스의 자세가 움츠러들었다. 앞발과 뒷발과 꼬리까지 전부 몸 아래로 깔아넣고 쭈그린 모습이 마치 잘 구워진 식빵같았다. 물론 잘 구워진 식빵이라기엔 시커먼 색깔이 다소 심상치 않았지만. 어쨌든 브루스는 바닥면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인 자세로 몸을 웅크리고 가느스름하게 눈을 감았다.

“브루스, 피곤해요?”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딕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브루스는 귀를 한 번 탁 털었을 뿐, 딕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가슴 앞으로 꼼꼼하게 말려있던 앞발이 스르륵 풀어지고, 브루스는 제 앞발을 턱에다 괴고 아예 키패드 위에 엎드려버렸다.
기운없이 쭈그리고 눈을 게슴츠레 감은 모습이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딕은 그러한 브루스를 짠한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그가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아, 그러고보니 식사는 어떻게 한 거예요? 신진대사가 빨라진 만큼 금방 허기를 느낄 텐데, 알프레드에게 말해서 먹을만한 거라도 가져올.....”

그러나 알프레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브루스는 날카롭게 딕을 노려보며 북슬북슬한 꼬리로 키보드를 팡팡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존심 강하고 독선적인 배트맨은 그의 충직한 집사에게조차도 자신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싶은 모양이었다.

“음, 알았어요. 그럼 알프레드에겐 비밀로, 제가 먹을만한 걸 좀 챙겨올게요. 일단 우유라도 한 접시 드리면 되겠어요?”

브루스가 꼬리끝을 살랑살랑 까딱거렸고 딕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가 되어버린 다크나이트는 특유의 위압감이 없어졌기 때문인지 꼭 땡깡부리는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어쩐지 좀 우스워서, 딕은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브루스로부터 전수받은 잠입 스킬은 딕이 나이트윙 복장 그대로 저택의 주방에 숨어들어가는 임무에 활용되었다. 노집사의 동선과 기척을 예민하게 분석한 딕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입에 성공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중탕으로 미지근하게 데우고, 데운 우유가 담긴 보틀과 파스타 접시를 챙겨서 무사히 케이브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순조로웠다. 브루스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딕을 기다리고만 있었어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케이브에 돌아와서 컴퓨터 앞으로 왔을 때,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키패드 위에 뜨문뜨문 떨어진 새카만 고양이털만이 브루스가 방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던 딕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의자 밑을 샅샅이 살피며 애타게 브루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브루스, 도대체 어디 간 거예요? 제발,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요. 그런 모습으로 아무데나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
"딕.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냐."

한 손에는 파스타접시를 들고 옆구리엔 따끈따끈한 우유가 담겨진 보틀을 낀 채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고양이를 찾던 딕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저도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울과 망토 차림의 배트맨이 별 해괴한 광경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이트렌즈 너머로 가느스름해진 눈이 미심쩍다는 듯 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딕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브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브루스? 어떻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예요?"
"......? 원래의 모습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니, 조금 전까지 분명......“

딕이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야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치에 따끈하고 북실북실한 것이 치대기 시작했다. 딕은 깜짝 놀라서 거의 펄쩍 뛸 뻔했다. 의아한 표정을 하고있던 브루스가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찡그렸다.
웬 송아지만한 시커먼 고양이가 구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첫 번째 양자의 다리에 치대고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종아리에 번갈아가며 옆구리를 철썩 밀착시킨 채 8자형으로 이리저리 감고 비벼대는 몸은 무척이나 유연했다. 브루스는 카울을 벗고 비난의 눈초리를 담아 딕을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이건...... 평소의 매끄럽게 돌아가는 혀는 어디로 갔는지, 어버버버 말을 더듬는 딕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브루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질책하는 듯한 말투로 딕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것을 케이브에 데리고 온 거지?"
"네? 제가 뭘 데리고 왔냐는.....제가요? 아니예요, 분명 제가 오기 전부터....."

어느 상황에서건 유쾌함을 잃지 않는 나이트윙이 저렇게나 당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패드 위에 잔뜩 흐트러진 까만 터래기들을 본 브루스의 인상이 사정없이 찡그려졌다. 딕을 향하는 시선에 담긴 무언의 힐난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이미 온갖 종류의 가축들을 케이브로 들이는 친아들 때문에 충분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진작에 독립해나간 첫 번째 양아들까지 같은 문제로 그를 괴롭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딕의 손에 우유가 들려있음을 민감하게 눈치챈 고양이가 애옹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목청도 우렁차서 당장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는 모양새가 공갈협박 저리가라였다. 브루스는 편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고, 딕은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한 채 안절부절 못했다.

“일단, 입부터 막아라.”
“네, 네에.....”

파스타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보틀의 우유를 따라주자 고양이가 허겁지겁 달려들어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 한 끼가 될만한 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딕은 지나치게 많은 우유를 데워왔고, 덕분에 접시 안에는 반절 이상이 남아서 고스란히 개수구로 직행해야 했다.
그리고 전용 우유가 아닌 사람 우유를 그대로 먹인 탓에 고양이는 배앓이로 고생해야 했고, 딕은 막내동생의 비난을 한 몸에 들으며 까탈스러운 고양이의 병간호 겸 수발을 들어야 했다.


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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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딕은 며칠을 앓았다. 치명적인 외상은 없었지만 열이 심하게 올랐다. 브루스는 내내 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알 굴이 일으킨 반란은 점점 그 파도를 키우고 있었다. 들끓는 소요가 마계의 도시를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잠식해 들어왔다. 견고하게 짜여진 방어체계는 수장의 부재로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브루스는 딕의 곁을 뜨지 않았다. 팀과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귀를 시끄럽게 할 이야기를 굳이 전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8년 전 처음으로 웨인성에 왔을 때 받았던 서쪽 별궁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갇히지도 않았고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지도 않았다. 웨인의 이름을 박탈당하지도 않았고 죄인의 낙인이 찍히지도 않았다.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데미안.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제게 주어진 최초의 장소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내릴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창 반란을 진행중인 어머니도, 아들의 죄를 벌해야 할 아버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버림받던 순간의 절망감도, 딕을 범하고 죽일 뻔했던 분노도 길을 잃고 흩어졌다. 700년동안 벽돌 하나, 창틀 하나, 가고일 석상 하나에까지 스며든 웨인성의 침묵과 고독이 어린 청년을 집어삼켰다. 감정을 박탈당한 데미안은 그저 조용히, 기약도 없이 기다렸다. 눈동자 안에 오만하게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까맣게 사그라들었다. 전용 축사에서 쫓겨나 공동 사육장에 갇힌 타이투스가 주인을 부르며 구슬프게 울었다. 데미안이 직접 주는 먹이만 받아 먹던 사나운 용은 날짜를 거듭할수록 기력을 잃어갔다. 점점 작아지던 울음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게 되었다.

브루스는 영주의 방을 폐쇄하고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앓는 동안 눈에 띄게 수척해진 딕은 몸이 회복된 후에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주 부드러운 음식도 삼키기 힘들어했고, 적은 양을 먹고도 자주 토했다.

한겨울의 추위가 사그라들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까지 둘은 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딕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 달 하고도 보름이 걸렸다. 3주가 더 지난 후에는 핏속을 돌던 붉은 열매의 독소도 완전히 빠져나갔다. 브루스는 깨지기 쉬운 크리스탈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딕을 품안에 감싸고 조용히 성을 빠져나왔다.

축사를 관리하는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열쇠를 꺼내왔다. 브루스는 손수 새까만 용을 끌어내서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웠다. 충성스러운 용은 제 주인이 채비를 마칠 때까지 커다란 몸을 세우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망토로 머리끝까지 덮어씌운 딕을 안아들고 올라탔다. 스스럼없이 기대오는 몸은 지난 가을 웨인성에 왔을 때에 비해 훌쩍 가벼워져 있었다. 브루스는 한 손으로 딕의 등을 단단히 받치고 나머지 한 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이내 무겁게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용이 훌쩍 떠올랐다.
브루스가 아끼는 검은 용은 사육장에서 번식시킨 개체들 중 가장 노련하고 안정적인 비행 실력을 자랑했다. 그들은 고담 곳곳에 일어난 소요를 피해 평소보다 높은 고도로 비행했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기류가 안정적이었다. 숲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목적지에 다다른 용은 날개를 최대한 펼치고 선회하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인간계와 같은 공기가 흐르는 웨인성과 달리 숲의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매캐했다. 용은 석조우물 공터 주변의 나무 몇 개를 쓰러뜨리며 착륙했다. 브루스가 먼저 안장에서 내려와 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딕은 순순히 그 손을 잡고 용의 등에서 내려왔다. 웬만한 높이에서는 맨몸으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딕이었지만, 브루스의 이런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브루스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오로지 사랑할 시간만으로도 부족했다. 둘이 만난지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계절을 함께하지도 못했다.

브루스는 딕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눈을 감아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아직 완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은 숲은 고요했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잘그락거렸다. 약초 채집가들이 석조우물이라 부르는 공터는 차원이 겹쳐지는 교차점이었다. 딕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 빛이 잠시 스며들었다. 그리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딕은 무의식중에 오한을 느끼고 브루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움츠러든 어깨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브루스를 끌어안은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쉬잇, 괜찮다. 다정한 목소리에 딕은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캐하던 공기가 어느 순간 청량하게 느껴졌다. 마른 풀과 나무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딕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주변의 풍경은 눈을 감기 전과 비슷했지만,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십 년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숲의 공기가 익숙하게 그를 감쌌다. 딕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는 묵묵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은 채 딕의 얼굴을 응시했다. 딕은 브루스를 마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브루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마."

"아니예요. 괜찮아요."


딕은 웃으며 브루스의 품에서 물러났다. 정말이예요. 여긴 내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는걸요.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딕의 뺨을 쓸었다.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바람결은 쌀쌀했다. 딕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따스한 손에 기댔다.

둘은 잠시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채도가 다른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딕이 웃으며 말했고 브루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프레드랑 팀에게 안부 전해주시구요. 그동안 고마웠다고도 전해주세요. 브루스는 나직하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딕은 뺨이 홀쭉해진 얼굴로도 환하게 웃었다.

딕은 몸을 돌려서 자갈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예닐곱 걸음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아직 그 자리에 서있는 브루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잎새가 무성한 수풀 사이로 접어들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렇게 열 걸음 남짓을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브루스의 모습은 금세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은 어쩐지 브루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공터에서 꽤나 멀어져 있었고, 아무리 기웃거려도 석조우물의 끝자락조차 볼 수 없었다. 딕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른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땅에서 풋풋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근 십 년간 맡아왔던, 그립고도 익숙한 내음이었다.


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느렸지만 한 번도 멈추는 법은 없었다. 브루스와 헤어진 석조우물 자체가 비교적 숲의 가장자리에 가까운 지점이었고, 제 오두막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곧 아담한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울타리를 이십여 미터 남겨놓았을 때 즈음에 문이 벌컥 열렸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셔츠바람으로 뛰쳐나온 제이슨이 딕을 끌어안았다.

다녀왔어, 제이. 딕은 저보다도 훨씬 커다란 동생의 등을 마주 안아주었다. 그리고 숨죽여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제이슨은 비쩍 말라버린 딕의 모습에 무척이나 화를 냈다. 그 빌어먹을 작자는 으리으리한 성에 살면서 밥 한끼 제대로 안 챙겨먹였냐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딕은 제이슨이 그럴 때마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해서 오히려 제이슨의 성질을 부추겼다.

제이슨은 사냥꾼 캠프에 합류하는 날짜를 미루면서까지 오두막에 머물렀고, 그 동안 어떻게든 딕을 살찌우겠다면서 온갖 잔소리를 해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이슨이 제일 착해."

"미친.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사랑해, 제이."

"됐거든요?"


제이슨은 매번 틱틱거리면서도 엉겨붙는 딕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딕은 한동안 일을 쉬었다. 다행히 그 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아득바득 긁어모았던 예금이 깎여나가는게 좀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기도 했다. 제이슨은 고맙게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험악한 성질머리랑 다르게 은근히 꼼꼼한 구석이 있는 제이슨은 잡다한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제이슨이랑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할 거야. 딕은 몇 번인가 밑밥을 깔며 혹시 제이슨이 만나는 아가씨가 있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제이슨이 매번 노발대발 짜증을 내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점점 길어질수록 기온 역시 따뜻해졌다. 겨우내 말라있던 나뭇가지에 물이 차오르고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완연한 봄이 되어 아침저녁으로도 두꺼운 외투가 필요없게 되었다. 제이슨은 사냥꾼 캠프에 뒤늦게 합류하기 위해 떠났고, 딕 역시 약초 일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 주 목요일을 쉬는 날로 정했다.


데미안은 겨우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효과적으로 딕을 망가뜨렸다. 육체적으로 가해진 고문의 기억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딕은 아직까지도 밤에 잠을 설쳤다.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랐고, 툭하면 끼니를 걸렀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더 이상은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어야 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애써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몸의 반응은 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피곤한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기억하지도 못할 꿈에 시달리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면 시트와 베개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동트기 전 새벽이었고, 주변은 숨죽은 듯 고요했다. 딕은 무의식적으로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데미안이 뜯어냈던 것보다 작고 둥그렇게 생긴 펜던트는 마계를 떠나기 전날 밤 브루스에게 받은 것이었다. 네 안전을 위해서니까, 불편하더라도 지니고 있는 게 좋겠구나. 딕은 잠자코 그것을 받아 걸었다. 그가 준 것인데, 불편할 리가 없었다.

브루스는 어떨지 몰라도 딕은 아직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과는 별개로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자신을 고문하던 데미안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사정없이 가해지던 폭행의 잔상이 일상생활 중에도 불시에 튀어나와 숨통을 틀어막았다. 일방적인 폭력은 몸에 남은 외상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혔다. 딕은 아직까지도 아팠다.

그렇다고 브루스에게 그의 후계자와 정부 중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데미안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딕 스스로가 겁이 났다. 브루스가 제 아들이라는 이유로 데미안을 용서하고 그의 죄를 덮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맨정신으로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에게 당한 일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딕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렇다고 브루스가 데미안을 완전히 내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후계자를 안겨줄 수도 없는 정부 때문에 친자를 버렸다가 나중에 후회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브루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데미안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내려지건 간에 두 사람의 관계에 시한폭탄으로 남을 것은 뻔했다.

브루스도 결국엔 부모였다. 지금까지는 데미안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지만 언젠가는 제 후계자로서 받아들이고 그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게 될 관계였다. 부모란 원래 그렇다고들 하니까. 

브루스가 오랜 시간 장고를 거듭하건 단번에 결정 내리건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내린 결정으로 데미안의 죄를 묵인하건 처벌하건 앙금으로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딕은 모든 결정과 책임을 브루스에게 맡긴 채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아담한 별궁에서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브루스는 더할나위 없이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단 한순간도 딕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서투른 손길로나마 정성껏 간호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민감한 주제를 건들지 않기 위해 대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영역에서 펼쳐졌다. 전설과 신화, 말로만 들어보았던 미지의 세계. 브루스에겐 천일하고도 하루 동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그 유명한 여인만큼의 입담은 없었지만, 무척이나 근사한 목소리가 있었다.

딕은 브루스가 속삭이는 부드러운 저음에 이끌려 오로라가 펼쳐지는 설원과, 붉은 노을이 지는 사막과, 열대어가 춤추는 산호초 섬을 여행했다. 몸이 힘겨웠던 것과는 별개로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는 것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얇은 살얼음판 위에서 밀어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신분이 다른 상대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고아에 사냥꾼 출신인 약초 채집가였고, 상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귀한 집안에 속해있을 사람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빠져있건 간에, 한 때의 불장난으로 끝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언제나 둘이었을 뿐, 서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름조차 본명이 아니었다. 시작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던 만큼, 어느 한 쪽이 숲을 찾지 않게 되면 그것으로 끝날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당신과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펼쳐보는 것은 즐거웠다.

설령 그것이 백일몽에 불과할지라도.


그래서 딕은 매 순간 그를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언젠가 다가올 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어떠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해도 상관 없었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불신과 서운함으로 채우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가 암행을 즐기는 귀족 나부랭이 따위가 아니라 마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것이 새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인간이 아니라면 세간의 이목이나 출신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을 테니까.

다만, 브루스는 언제까지나 지금 모습 그대로일 텐데 나 혼자서만 늙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늙어가며 죽는 날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은 없겠지만, 다행히 딕은 아직 젊었고, 나이에 비해서도 동안이었다. 딕은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 이끌리는 것 이상으로 그의 내면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반반한 껍데기 따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딕은 자신이 브루스에게 반한 것 만큼이나 브루스 역시 자신에게 빠져있음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무한한 시간을 가진 마족이었다. 인간에게는 평생을 바쳐야할 시간도 그에게는 찰나의 유희에 불과할 터였다. 브루스에게 있어서 상대의 젊음과 외모가 연인으로서의 매력을 결정짓는데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십오 년 동안은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딕은 스스로 수긍했다. 이걸로 된 거야. 그 동안 행복했으니까 됐어.

힘든 일을 겪긴 했지만, 그렇게 멋진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열락을 알게 되었고, 가슴이 터질 듯한 충만감도 느껴보았고, 사랑받은 만큼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마지막 두 달간 아픈 모습을 보였던 건 조금 속상했지만, 그래도 헤어질 때는 웃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었다.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기억속에서 꺼내 행복할 수 있도록. 소중했던 경험이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눈물이 흘렀다. 공터에 서있던 브루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정작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으니 조금만 더 그 얼굴을 새기는 거였는데. 자신은 뭐가 그리도 급했던가. 추억으로 되새기기엔 아직까진 헤어진 서러움이 더 컸다. 그와 함께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려 해도 못 박힌 듯 서있던 마지막 모습만 남았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쓸쓸한 침대에 내려앉았다. 펜던트를 움켜쥔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외로웠다. 못 견디도록 그가 그리웠다.




* * * * * * * * * * * * * * *




다시 여름이 되었다.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 가장 바쁜 계절이았다. 제이슨은 보름 전부터 연합 캠프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주에는 혼자 휴일을 보내야 할 듯했다.

제이슨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딕이 쉬는 목요일마다 거의 매 주 들렀었다. 아무래도 딕의 체중이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항상 자신이 제이슨을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사이엔가 어른스러워진 동생에게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꽤나 이상했다. 그것이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새벽에 가볍게 비가 내린 날이었다. 발밑의 풀이 빗방울을 머금어 축축했다. 딕은 하늘의 구름을 한 번 확인하고, 배낭에 우비를 챙겼다. 요새는 숲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채집량이 영 시원치 않았다.

야곰야곰 까먹은 예금을 다시 채우려면 열심히 벌어놔야 할 텐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요즘 들어 자꾸만 꾀가 났다. 그러고보니 상회에 재등록을 하러 갔을 때 그쪽에서 감정사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었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딕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큰 가방은 나무에 걸어두고 작은 주머니만 챙긴 가벼운 차림새였다. 각 계절마다 채집할 수 있는 약초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여름에는 그 종류가 특히 많았다. 새벽나절에 잠깐 내렸던 비로 온 사방에 빗방울이 맺혀있었다. 순식간에 장갑과 신발은 물론 옷자락까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평소 다니던 곳에 비하면 숲의 가장자리에 가까운 지점이었지만, 딕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수시로 주변을 살피고 둘러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시에 마물과 맞닥뜨린 것은 딕이 부주의 해서라기 보단, 단순히 운이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가르랑거리며 풀더미에서 기어나온 마물은 굉장히 작은 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위협적이기 마련이었지만, 저 정도로 특별히 작은 것들은 예외였다. 모체로부터 떨어나온지 얼마 안 된 개체라는 의미였고, 그말인즉슨 아주 가까운 곳에 훨씬 더 크고 사나운 모체가 있다는 뜻이었다.

새끼가 어미를 부르기 전에 재빨리 단검으로 목을 내리쳤지만, 아무래도 한 박자 늦은 듯 싶었다. 인간의 가청영역을 벗어나는 초고음의 진동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단칼에 절명해버린 새끼 마물의 몸체가 바람이 빠진 것처럼 흐물흐물 쭈그러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모체가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딕은 새끼의 체액이 튄 장갑을 벗어 내팽개치며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뱀을 닮은 저 마물은 무척이나 후각이 예민했다. 아마도 금방 제 새끼의 살해자를 찾아낼 것이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최대한 유리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끌어들여 싸우는 편이 나았다. 브루스에게 받은 보호의 아뮬렛은 유계의 생물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대검이 없으니 상대하기 까다롭겠지만, 한 마리 정도라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딕은 커다란 고목을 기점으로 와이어를 걸어 순식간에 트랩을 설치했다. 그리고 석궁을 겨누며 나무 위에 매복했다.

수풀을 헤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마물이 딕을 향해 솟구쳤다. 시위의 장력을 최대한 팽팽하게 조절한 석궁의 볼트가 단번에 삐죽한 대가리를 꿰뚫었다. 어차피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하고 사냥꾼을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물은 볼트에 연결되어있던 와이어에 대가리를 꿰인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딕이 설치해둔 트랩이 마물의 몸통에 감겼다. 올무처럼 가죽을 파고들어간 고리가 각각 다른 세 방향에서 당겨지며 포획물을 꽁꽁 옭아맸다. 즉석에서 설치한 트랩 치고는 꽤나 성공적으로 작동한 편이었지만,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스러워할 새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단단히 일진이 꼬이는 날인듯 싶었다.

마물은 두 마리였다. 트랩에 감긴 녀석보다 좀 더 작은 마물이 나무 위로 달려들었다. 볼트를 발사한 석궁은 아직 재장전도 못한 채였다. 반사적으로 물러선 발이 가지를 헛디디며 휘청거렸다. 딕은 어이없게 나무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대로 낙법을 쓰기엔 오히려 높이가 낮았다. 팔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딕은 꼴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갑도 없는 맨손에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딕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고, 첫 번째 습격에 실패한 마물이 저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마물의 숨결까지 코앞에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카만 칼날이 마물의 목에 박혔다.

마물은 공중에서 뛰어내리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꿈틀거리는 몸은 꽥꽥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두꺼운 목줄기에 박힌 칼날은 손잡이 없는 아치형으로 유려한 곡선을 갖고 있었다.

칼날 한가운데서 깜박거리던 붉은 빛이 점점 빠르게 점멸하는가 싶더니 퍽 하고 터져나갔다. 대검으로 단번에 끊어놓지 않으면 끊임없이 재생하는 목줄기가 산산히 찢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버르적거리던 마물의 움직임이 이내 완전히 멎었다.


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렸다. 초조한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브루스? 인기척은 커녕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딕은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여기저기를 헤맸다. 한껏 곤두세운 귓가로는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려왔다.

어디지. 어디에서? 칼이 어느 쪽에서 날아왔었지?

아무리 잘 알고 있는 숲이라지만 방향 없이 헤치고 다니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조난은 둘째치고서라도 어디서 마물을 마주치게 될지 모르므로 숲에서는 절대로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십년동안 숲에서 살다시피 한 딕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기본적인 수칙조차도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석조우물 공터로 향한 것은 절반쯤은 무의식에 이끌린 것이었다. 물에 젖은 자갈을 밟을 때마다 바지자락에 물방울이 튀었다. 딕은 익숙한 돌무더기 앞에서 멈췄다. 아무도 없는 공터는 언제나와 같이 조용했다.

돌무더기 사이로 푸른 잡초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늘진 쪽으로는 드문드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났는지 어느새 볕이 들고 있었다. 돌무더기의 젖은 표면이 반짝거렸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거칠던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느린 바람이 공터를 쓸고 지나갔다. 이 주변에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문득, 딕은 일종의 기시감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이 순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딕은 뒤를 돌아보았다.


4개월. 긴 시간은 아니라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브루스는 지나칠 정도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진중한 눈매도, 굳게 다물린 입술도, 딕을 바라보는 눈빛조차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또다시 바람이 불었고, 브루스의 등 뒤에 매달린 무거운 망토자락이 흔들렸다. 초여름의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조차 마지막 모습 그대로라서,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단 하루도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딕은 물끄러미 브루스를 응시했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서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딕이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닥에 늘어진 망토자락이 바람결에 잠깐 펄럭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너를 올려보내고, 나는......"


브루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풍이 불었다. 비에 젖은 들꽃 냄새가 풀내음에 섞여 실려왔다. 흰 나비가 팔랑팔랑 풀줄기 끝에 내려앉았다. 브루스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서로의 얼굴만 봐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데, 그들은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가 하려던 말조차 잊어만 갔다.


"데미안은......"
"말하지 마세요."


브루스는 말을 멈췄고, 딕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브루스의 턱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딕의 태도는 단호했다.


"알고 싶지 않아요."

".......그래."


브루스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지만, 딕은 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나타난 브루스의 잘못이었다.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주제에 딕이 다치도록 내버려두지도 못한 브루스가 잘못한 일이었다. 딕이 브루스를 그리워했던 것만큼 브루스 역시 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딕에게 들킨 것까지 전부 브루스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브루스의 책임으로 돌리면 될 것이었다.

딕은 좀 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마족들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저에게 잘해줬던 알프레드나 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마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데미안이 미웠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이 저를 증오한 탈리아가 싫었다. 브루스가 마왕의 자리를 수락함으로써 멸망으로부터 지켜낸,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를 죄책감으로 옭아매는 음울한 도시가 싫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왕을 돌려주지 않을 셈이었다.



"데미안은 상관 없어요. 전부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속죄는 당신이 하세요."
"그렇게 하마."
"마계로 내려가지 말아요.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당신은 여기를 떠날 수 없어요."
"그래."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멀찍이 서있지 말고 당장 이리로 와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딕이 원하는 것도 대답 따위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시간은 이미 충분히 길었다. 더이상은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구두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접근한 남자가 딕의 뺨을 쓸었다. 삼나무 장작, 그리고 옅은 화약의 냄새. 그리웠던 체취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졌다. 딕은 매달리듯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딕의 등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세게 끌어당기며 품속으로 가뒀다. 빈틈없이 밀착한 두 몸이 서로의 체온으로 녹아들었다. 브루스의 어깨와 목덜미가 금세 딕의 눈물로 젖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격한 호흡 사이로 딕이 속삭였다.


"보고싶었어요."
"그래."
"정말로, 죽을 만큼 보고싶었어요."
"그래."

사랑해요. 언제나와 같은 고백은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도 간절했다.
석조 정원에 느린 바람이 불었다. 하늘이 개어 따스한 볕이 비췄다.


딕은 다시는 그를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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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결론은 어쨌든 브루딕입니다!!!! 후일담으로 숲의 가장자리 오두막에 들른 여행객이 이런 깡촌에서 예상치 못한 미남을 둘이나 만나고 어머///// 하는 이야기라던지-_-;;;; 딕과 제이슨이 자란 고아원에 데미안 웨인이라는 이름의 웬 건방진 꼬마가 들어온 이야기 등등을 쓰고싶었지만;;;;; 본편도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는 후일담은 뭔놈의 후일담일까요ㅠㅠㅠㅠㅠㅠ


생각보다 너무 늦어져서 미르님께 죄송함미다ㅠㅠ 제가 저를 너무 믿었어요-_-;;;; 결말이 좀 응? 스럽다라도 그냥 적당히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는 뉘앙스로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으흑으흑으흑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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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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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딕 판타지AU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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