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5)



딕은 며칠을 앓았다. 치명적인 외상은 없었지만 열이 심하게 올랐다. 브루스는 내내 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알 굴이 일으킨 반란은 점점 그 파도를 키우고 있었다. 들끓는 소요가 마계의 도시를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잠식해 들어왔다. 견고하게 짜여진 방어체계는 수장의 부재로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브루스는 딕의 곁을 뜨지 않았다. 팀과 알프레드는 브루스의 귀를 시끄럽게 할 이야기를 굳이 전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8년 전 처음으로 웨인성에 왔을 때 받았던 서쪽 별궁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갇히지도 않았고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지도 않았다. 웨인의 이름을 박탈당하지도 않았고 죄인의 낙인이 찍히지도 않았다.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데미안.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제게 주어진 최초의 장소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내릴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창 반란을 진행중인 어머니도, 아들의 죄를 벌해야 할 아버지도 그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버림받던 순간의 절망감도, 딕을 범하고 죽일 뻔했던 분노도 길을 잃고 흩어졌다. 700년동안 벽돌 하나, 창틀 하나, 가고일 석상 하나에까지 스며든 웨인성의 침묵과 고독이 어린 청년을 집어삼켰다. 감정을 박탈당한 데미안은 그저 조용히, 기약도 없이 기다렸다. 눈동자 안에 오만하게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까맣게 사그라들었다. 전용 축사에서 쫓겨나 공동 사육장에 갇힌 타이투스가 주인을 부르며 구슬프게 울었다. 데미안이 직접 주는 먹이만 받아 먹던 사나운 용은 날짜를 거듭할수록 기력을 잃어갔다. 점점 작아지던 울음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게 되었다.

브루스는 영주의 방을 폐쇄하고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앓는 동안 눈에 띄게 수척해진 딕은 몸이 회복된 후에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주 부드러운 음식도 삼키기 힘들어했고, 적은 양을 먹고도 자주 토했다.

한겨울의 추위가 사그라들고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까지 둘은 별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딕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 달 하고도 보름이 걸렸다. 3주가 더 지난 후에는 핏속을 돌던 붉은 열매의 독소도 완전히 빠져나갔다. 브루스는 깨지기 쉬운 크리스탈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딕을 품안에 감싸고 조용히 성을 빠져나왔다.

축사를 관리하는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열쇠를 꺼내왔다. 브루스는 손수 새까만 용을 끌어내서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웠다. 충성스러운 용은 제 주인이 채비를 마칠 때까지 커다란 몸을 세우고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망토로 머리끝까지 덮어씌운 딕을 안아들고 올라탔다. 스스럼없이 기대오는 몸은 지난 가을 웨인성에 왔을 때에 비해 훌쩍 가벼워져 있었다. 브루스는 한 손으로 딕의 등을 단단히 받치고 나머지 한 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이내 무겁게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용이 훌쩍 떠올랐다.
브루스가 아끼는 검은 용은 사육장에서 번식시킨 개체들 중 가장 노련하고 안정적인 비행 실력을 자랑했다. 그들은 고담 곳곳에 일어난 소요를 피해 평소보다 높은 고도로 비행했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기류가 안정적이었다. 숲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목적지에 다다른 용은 날개를 최대한 펼치고 선회하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인간계와 같은 공기가 흐르는 웨인성과 달리 숲의 공기는 끈적끈적하고 매캐했다. 용은 석조우물 공터 주변의 나무 몇 개를 쓰러뜨리며 착륙했다. 브루스가 먼저 안장에서 내려와 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딕은 순순히 그 손을 잡고 용의 등에서 내려왔다. 웬만한 높이에서는 맨몸으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딕이었지만, 브루스의 이런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브루스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오로지 사랑할 시간만으로도 부족했다. 둘이 만난지는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계절을 함께하지도 못했다.

브루스는 딕의 손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눈을 감아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아직 완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은 숲은 고요했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잘그락거렸다. 약초 채집가들이 석조우물이라 부르는 공터는 차원이 겹쳐지는 교차점이었다. 딕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푸른 빛이 잠시 스며들었다. 그리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딕은 무의식중에 오한을 느끼고 브루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움츠러든 어깨가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브루스를 끌어안은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쉬잇, 괜찮다. 다정한 목소리에 딕은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캐하던 공기가 어느 순간 청량하게 느껴졌다. 마른 풀과 나무의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딕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주변의 풍경은 눈을 감기 전과 비슷했지만,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십 년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숲의 공기가 익숙하게 그를 감쌌다. 딕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는 묵묵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은 채 딕의 얼굴을 응시했다. 딕은 브루스를 마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브루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까지 데려다주마."

"아니예요. 괜찮아요."


딕은 웃으며 브루스의 품에서 물러났다. 정말이예요. 여긴 내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는걸요.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딕의 뺨을 쓸었다.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바람결은 쌀쌀했다. 딕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따스한 손에 기댔다.

둘은 잠시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채도가 다른 푸른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딕이 웃으며 말했고 브루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프레드랑 팀에게 안부 전해주시구요. 그동안 고마웠다고도 전해주세요. 브루스는 나직하게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딕은 뺨이 홀쭉해진 얼굴로도 환하게 웃었다.

딕은 몸을 돌려서 자갈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예닐곱 걸음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아직 그 자리에 서있는 브루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잎새가 무성한 수풀 사이로 접어들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렇게 열 걸음 남짓을 걷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브루스의 모습은 금세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은 어쩐지 브루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공터에서 꽤나 멀어져 있었고, 아무리 기웃거려도 석조우물의 끝자락조차 볼 수 없었다. 딕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마른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땅에서 풋풋한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근 십 년간 맡아왔던, 그립고도 익숙한 내음이었다.


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은 느렸지만 한 번도 멈추는 법은 없었다. 브루스와 헤어진 석조우물 자체가 비교적 숲의 가장자리에 가까운 지점이었고, 제 오두막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곧 아담한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울타리를 이십여 미터 남겨놓았을 때 즈음에 문이 벌컥 열렸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셔츠바람으로 뛰쳐나온 제이슨이 딕을 끌어안았다.

다녀왔어, 제이. 딕은 저보다도 훨씬 커다란 동생의 등을 마주 안아주었다. 그리고 숨죽여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제이슨은 비쩍 말라버린 딕의 모습에 무척이나 화를 냈다. 그 빌어먹을 작자는 으리으리한 성에 살면서 밥 한끼 제대로 안 챙겨먹였냐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딕은 제이슨이 그럴 때마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해서 오히려 제이슨의 성질을 부추겼다.

제이슨은 사냥꾼 캠프에 합류하는 날짜를 미루면서까지 오두막에 머물렀고, 그 동안 어떻게든 딕을 살찌우겠다면서 온갖 잔소리를 해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이슨이 제일 착해."

"미친.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사랑해, 제이."

"됐거든요?"


제이슨은 매번 틱틱거리면서도 엉겨붙는 딕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딕은 한동안 일을 쉬었다. 다행히 그 동안 모아둔 돈이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아득바득 긁어모았던 예금이 깎여나가는게 좀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되겠지 싶기도 했다. 제이슨은 고맙게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험악한 성질머리랑 다르게 은근히 꼼꼼한 구석이 있는 제이슨은 잡다한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제이슨이랑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할 거야. 딕은 몇 번인가 밑밥을 깔며 혹시 제이슨이 만나는 아가씨가 있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제이슨이 매번 노발대발 짜증을 내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점점 길어질수록 기온 역시 따뜻해졌다. 겨우내 말라있던 나뭇가지에 물이 차오르고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완연한 봄이 되어 아침저녁으로도 두꺼운 외투가 필요없게 되었다. 제이슨은 사냥꾼 캠프에 뒤늦게 합류하기 위해 떠났고, 딕 역시 약초 일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 주 목요일을 쉬는 날로 정했다.


데미안은 겨우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효과적으로 딕을 망가뜨렸다. 육체적으로 가해진 고문의 기억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딕은 아직까지도 밤에 잠을 설쳤다.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랐고, 툭하면 끼니를 걸렀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더 이상은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어야 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애써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몸의 반응은 제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피곤한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기억하지도 못할 꿈에 시달리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면 시트와 베개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동트기 전 새벽이었고, 주변은 숨죽은 듯 고요했다. 딕은 무의식적으로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데미안이 뜯어냈던 것보다 작고 둥그렇게 생긴 펜던트는 마계를 떠나기 전날 밤 브루스에게 받은 것이었다. 네 안전을 위해서니까, 불편하더라도 지니고 있는 게 좋겠구나. 딕은 잠자코 그것을 받아 걸었다. 그가 준 것인데, 불편할 리가 없었다.

브루스는 어떨지 몰라도 딕은 아직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과는 별개로 그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자신을 고문하던 데미안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선뜩해졌다. 사정없이 가해지던 폭행의 잔상이 일상생활 중에도 불시에 튀어나와 숨통을 틀어막았다. 일방적인 폭력은 몸에 남은 외상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입혔다. 딕은 아직까지도 아팠다.

그렇다고 브루스에게 그의 후계자와 정부 중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데미안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딕 스스로가 겁이 났다. 브루스가 제 아들이라는 이유로 데미안을 용서하고 그의 죄를 덮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맨정신으로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에게 당한 일보다도 더욱 확실하게 딕의 정신을 갉아먹을 것이다.

그렇다고 브루스가 데미안을 완전히 내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후계자를 안겨줄 수도 없는 정부 때문에 친자를 버렸다가 나중에 후회하기라도 하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브루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는 믿고 있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데미안에 대한 처분이 어떻게 내려지건 간에 두 사람의 관계에 시한폭탄으로 남을 것은 뻔했다.

브루스도 결국엔 부모였다. 지금까지는 데미안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지만 언젠가는 제 후계자로서 받아들이고 그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게 될 관계였다. 부모란 원래 그렇다고들 하니까. 

브루스가 오랜 시간 장고를 거듭하건 단번에 결정 내리건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내린 결정으로 데미안의 죄를 묵인하건 처벌하건 앙금으로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딕은 모든 결정과 책임을 브루스에게 맡긴 채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아담한 별궁에서 몸을 회복시키는 동안 브루스는 더할나위 없이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단 한순간도 딕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서투른 손길로나마 정성껏 간호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민감한 주제를 건들지 않기 위해 대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영역에서 펼쳐졌다. 전설과 신화, 말로만 들어보았던 미지의 세계. 브루스에겐 천일하고도 하루 동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그 유명한 여인만큼의 입담은 없었지만, 무척이나 근사한 목소리가 있었다.

딕은 브루스가 속삭이는 부드러운 저음에 이끌려 오로라가 펼쳐지는 설원과, 붉은 노을이 지는 사막과, 열대어가 춤추는 산호초 섬을 여행했다. 몸이 힘겨웠던 것과는 별개로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는 것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얇은 살얼음판 위에서 밀어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신분이 다른 상대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고아에 사냥꾼 출신인 약초 채집가였고, 상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귀한 집안에 속해있을 사람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빠져있건 간에, 한 때의 불장난으로 끝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언제나 둘이었을 뿐, 서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이름조차 본명이 아니었다. 시작이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던 만큼, 어느 한 쪽이 숲을 찾지 않게 되면 그것으로 끝날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당신과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펼쳐보는 것은 즐거웠다.

설령 그것이 백일몽에 불과할지라도.


그래서 딕은 매 순간 그를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언젠가 다가올 끝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어떠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해도 상관 없었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불신과 서운함으로 채우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브루스가 암행을 즐기는 귀족 나부랭이 따위가 아니라 마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것이 새삼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인간이 아니라면 세간의 이목이나 출신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을 테니까.

다만, 브루스는 언제까지나 지금 모습 그대로일 텐데 나 혼자서만 늙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늙어가며 죽는 날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은 없겠지만, 다행히 딕은 아직 젊었고, 나이에 비해서도 동안이었다. 딕은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 이끌리는 것 이상으로 그의 내면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반반한 껍데기 따위에 있는 게 아니었다. 딕은 자신이 브루스에게 반한 것 만큼이나 브루스 역시 자신에게 빠져있음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무한한 시간을 가진 마족이었다. 인간에게는 평생을 바쳐야할 시간도 그에게는 찰나의 유희에 불과할 터였다. 브루스에게 있어서 상대의 젊음과 외모가 연인으로서의 매력을 결정짓는데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십오 년 동안은 자신만 바라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딕은 스스로 수긍했다. 이걸로 된 거야. 그 동안 행복했으니까 됐어.

힘든 일을 겪긴 했지만, 그렇게 멋진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열락을 알게 되었고, 가슴이 터질 듯한 충만감도 느껴보았고, 사랑받은 만큼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마지막 두 달간 아픈 모습을 보였던 건 조금 속상했지만, 그래도 헤어질 때는 웃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면 될 일이었다. 나중에 언제라도 다시 기억속에서 꺼내 행복할 수 있도록. 소중했던 경험이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눈물이 흘렀다. 공터에 서있던 브루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정작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으니 조금만 더 그 얼굴을 새기는 거였는데. 자신은 뭐가 그리도 급했던가. 추억으로 되새기기엔 아직까진 헤어진 서러움이 더 컸다. 그와 함께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려 해도 못 박힌 듯 서있던 마지막 모습만 남았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쓸쓸한 침대에 내려앉았다. 펜던트를 움켜쥔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외로웠다. 못 견디도록 그가 그리웠다.




* * * * * * * * * * * * * * *




다시 여름이 되었다.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 가장 바쁜 계절이았다. 제이슨은 보름 전부터 연합 캠프에 참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주에는 혼자 휴일을 보내야 할 듯했다.

제이슨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딕이 쉬는 목요일마다 거의 매 주 들렀었다. 아무래도 딕의 체중이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항상 자신이 제이슨을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사이엔가 어른스러워진 동생에게 보살핌을 받는 기분은 꽤나 이상했다. 그것이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새벽에 가볍게 비가 내린 날이었다. 발밑의 풀이 빗방울을 머금어 축축했다. 딕은 하늘의 구름을 한 번 확인하고, 배낭에 우비를 챙겼다. 요새는 숲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채집량이 영 시원치 않았다.

야곰야곰 까먹은 예금을 다시 채우려면 열심히 벌어놔야 할 텐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요즘 들어 자꾸만 꾀가 났다. 그러고보니 상회에 재등록을 하러 갔을 때 그쪽에서 감정사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었지. 어쩌면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딕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큰 가방은 나무에 걸어두고 작은 주머니만 챙긴 가벼운 차림새였다. 각 계절마다 채집할 수 있는 약초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여름에는 그 종류가 특히 많았다. 새벽나절에 잠깐 내렸던 비로 온 사방에 빗방울이 맺혀있었다. 순식간에 장갑과 신발은 물론 옷자락까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평소 다니던 곳에 비하면 숲의 가장자리에 가까운 지점이었지만, 딕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수시로 주변을 살피고 둘러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시에 마물과 맞닥뜨린 것은 딕이 부주의 해서라기 보단, 단순히 운이 없어서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가르랑거리며 풀더미에서 기어나온 마물은 굉장히 작은 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위협적이기 마련이었지만, 저 정도로 특별히 작은 것들은 예외였다. 모체로부터 떨어나온지 얼마 안 된 개체라는 의미였고, 그말인즉슨 아주 가까운 곳에 훨씬 더 크고 사나운 모체가 있다는 뜻이었다.

새끼가 어미를 부르기 전에 재빨리 단검으로 목을 내리쳤지만, 아무래도 한 박자 늦은 듯 싶었다. 인간의 가청영역을 벗어나는 초고음의 진동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단칼에 절명해버린 새끼 마물의 몸체가 바람이 빠진 것처럼 흐물흐물 쭈그러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모체가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딕은 새끼의 체액이 튄 장갑을 벗어 내팽개치며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뱀을 닮은 저 마물은 무척이나 후각이 예민했다. 아마도 금방 제 새끼의 살해자를 찾아낼 것이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은 소용이 없었다. 최대한 유리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끌어들여 싸우는 편이 나았다. 브루스에게 받은 보호의 아뮬렛은 유계의 생물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대검이 없으니 상대하기 까다롭겠지만, 한 마리 정도라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딕은 커다란 고목을 기점으로 와이어를 걸어 순식간에 트랩을 설치했다. 그리고 석궁을 겨누며 나무 위에 매복했다.

수풀을 헤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마물이 딕을 향해 솟구쳤다. 시위의 장력을 최대한 팽팽하게 조절한 석궁의 볼트가 단번에 삐죽한 대가리를 꿰뚫었다. 어차피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하고 사냥꾼을 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물은 볼트에 연결되어있던 와이어에 대가리를 꿰인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딕이 설치해둔 트랩이 마물의 몸통에 감겼다. 올무처럼 가죽을 파고들어간 고리가 각각 다른 세 방향에서 당겨지며 포획물을 꽁꽁 옭아맸다. 즉석에서 설치한 트랩 치고는 꽤나 성공적으로 작동한 편이었지만,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스러워할 새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단단히 일진이 꼬이는 날인듯 싶었다.

마물은 두 마리였다. 트랩에 감긴 녀석보다 좀 더 작은 마물이 나무 위로 달려들었다. 볼트를 발사한 석궁은 아직 재장전도 못한 채였다. 반사적으로 물러선 발이 가지를 헛디디며 휘청거렸다. 딕은 어이없게 나무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대로 낙법을 쓰기엔 오히려 높이가 낮았다. 팔이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딕은 꼴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장갑도 없는 맨손에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딕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고, 첫 번째 습격에 실패한 마물이 저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마물의 숨결까지 코앞에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아온 새카만 칼날이 마물의 목에 박혔다.

마물은 공중에서 뛰어내리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꿈틀거리는 몸은 꽥꽥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두꺼운 목줄기에 박힌 칼날은 손잡이 없는 아치형으로 유려한 곡선을 갖고 있었다.

칼날 한가운데서 깜박거리던 붉은 빛이 점점 빠르게 점멸하는가 싶더니 퍽 하고 터져나갔다. 대검으로 단번에 끊어놓지 않으면 끊임없이 재생하는 목줄기가 산산히 찢겼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버르적거리던 마물의 움직임이 이내 완전히 멎었다.


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렸다. 초조한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브루스? 인기척은 커녕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딕은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무작정 내달리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여기저기를 헤맸다. 한껏 곤두세운 귓가로는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려왔다.

어디지. 어디에서? 칼이 어느 쪽에서 날아왔었지?

아무리 잘 알고 있는 숲이라지만 방향 없이 헤치고 다니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조난은 둘째치고서라도 어디서 마물을 마주치게 될지 모르므로 숲에서는 절대로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십년동안 숲에서 살다시피 한 딕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가장 기본적인 수칙조차도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석조우물 공터로 향한 것은 절반쯤은 무의식에 이끌린 것이었다. 물에 젖은 자갈을 밟을 때마다 바지자락에 물방울이 튀었다. 딕은 익숙한 돌무더기 앞에서 멈췄다. 아무도 없는 공터는 언제나와 같이 조용했다.

돌무더기 사이로 푸른 잡초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늘진 쪽으로는 드문드문 이끼가 자라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났는지 어느새 볕이 들고 있었다. 돌무더기의 젖은 표면이 반짝거렸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거칠던 호흡이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느린 바람이 공터를 쓸고 지나갔다. 이 주변에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기묘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문득, 딕은 일종의 기시감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이 순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딕은 뒤를 돌아보았다.


4개월. 긴 시간은 아니라지만, 그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브루스는 지나칠 정도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진중한 눈매도, 굳게 다물린 입술도, 딕을 바라보는 눈빛조차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또다시 바람이 불었고, 브루스의 등 뒤에 매달린 무거운 망토자락이 흔들렸다. 초여름의 날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조차 마지막 모습 그대로라서,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단 하루도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딕은 물끄러미 브루스를 응시했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서로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딕이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닥에 늘어진 망토자락이 바람결에 잠깐 펄럭이다 다시 가라앉았다.


"너를 올려보내고, 나는......"


브루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풍이 불었다. 비에 젖은 들꽃 냄새가 풀내음에 섞여 실려왔다. 흰 나비가 팔랑팔랑 풀줄기 끝에 내려앉았다. 브루스는 한참이나 말을 고르는 듯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서로의 얼굴만 봐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는데, 그들은 마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가 하려던 말조차 잊어만 갔다.


"데미안은......"
"말하지 마세요."


브루스는 말을 멈췄고, 딕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말하지 마세요. 브루스의 턱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딕의 태도는 단호했다.


"알고 싶지 않아요."

".......그래."


브루스의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지만, 딕은 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나타난 브루스의 잘못이었다.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주제에 딕이 다치도록 내버려두지도 못한 브루스가 잘못한 일이었다. 딕이 브루스를 그리워했던 것만큼 브루스 역시 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을 딕에게 들킨 것까지 전부 브루스의 잘못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브루스의 책임으로 돌리면 될 것이었다.

딕은 좀 더 이기적이 되기로 했다. 마족들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저에게 잘해줬던 알프레드나 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마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자신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데미안이 미웠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이 저를 증오한 탈리아가 싫었다. 브루스가 마왕의 자리를 수락함으로써 멸망으로부터 지켜낸,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를 죄책감으로 옭아매는 음울한 도시가 싫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왕을 돌려주지 않을 셈이었다.



"데미안은 상관 없어요. 전부 당신이 잘못한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속죄는 당신이 하세요."
"그렇게 하마."
"마계로 내려가지 말아요.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당신은 여기를 떠날 수 없어요."
"그래."
"알아들었으면 그렇게 멀찍이 서있지 말고 당장 이리로 와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딕이 원하는 것도 대답 따위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시간은 이미 충분히 길었다. 더이상은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구두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접근한 남자가 딕의 뺨을 쓸었다. 삼나무 장작, 그리고 옅은 화약의 냄새. 그리웠던 체취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졌다. 딕은 매달리듯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딕의 등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세게 끌어당기며 품속으로 가뒀다. 빈틈없이 밀착한 두 몸이 서로의 체온으로 녹아들었다. 브루스의 어깨와 목덜미가 금세 딕의 눈물로 젖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격한 호흡 사이로 딕이 속삭였다.


"보고싶었어요."
"그래."
"정말로, 죽을 만큼 보고싶었어요."
"그래."

사랑해요. 언제나와 같은 고백은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도 간절했다.
석조 정원에 느린 바람이 불었다. 하늘이 개어 따스한 볕이 비췄다.


딕은 다시는 그를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끝났습니다!!! 결론은 어쨌든 브루딕입니다!!!! 후일담으로 숲의 가장자리 오두막에 들른 여행객이 이런 깡촌에서 예상치 못한 미남을 둘이나 만나고 어머///// 하는 이야기라던지-_-;;;; 딕과 제이슨이 자란 고아원에 데미안 웨인이라는 이름의 웬 건방진 꼬마가 들어온 이야기 등등을 쓰고싶었지만;;;;; 본편도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는 후일담은 뭔놈의 후일담일까요ㅠㅠㅠㅠㅠㅠ


생각보다 너무 늦어져서 미르님께 죄송함미다ㅠㅠ 제가 저를 너무 믿었어요-_-;;;; 결말이 좀 응? 스럽다라도 그냥 적당히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는 뉘앙스로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으흑으흑으흑ㅜㅜㅜㅜㅜㅜ





'DC > 중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루딕 판타지AU (4)  (0) 2015.01.04
브루딕 판타지AU (3)  (0) 2014.12.28
브루딕 판타지AU (2)  (0) 2014.12.25
브루딕 판타지AU (1)  (0) 2014.12.25
Posted by BurntSienna
,

브루딕 판타지AU (4)

2015. 1. 4. 08:29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