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한테 몽유병 비스무리한게 있었으면 좋겠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잠들었다가 두어 시간 후에 일어나서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니는 거ㅇㅇ;;; 그러다가 딕을 덮쳤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본인은 기억 못함(??)

 

기왕이면 딕이 브루스를 짝사랑하고 있던 중이었으면 좋겠다. 시작은 어느날 밤이었음. 딕이 자기 방에서 자다가 설핏 깼는데 브루스가 침대 옆에 서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거임. 불도 켜지 않은 채 웬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이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서있으니 어무리 대담한 딕이라도 기겁해서 놀랐겠지ㅇㅅㅇ;;; 화들짝 놀라서 브루스 뭐냐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놀란 가슴이 두근거려서 등줄기에 식은땀까지 흐를 정도였음. 그런데 브루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서있다가 터벅거리면서 방을 나서는거. 열린 문으로 나가는 발걸음은 어쩐지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음. 딕은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멍뎅하게 눈만 깜박이며 브루스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음. 뭐지. 꿈인가.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의 브루스는 여느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음. 딕은 잠결에 헛것이라도 봤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음. 그날 저녁 고담의 거리는 유독 소란스러웠고, 두 사람은 다소 빽빽하게 패트롤을 돌고 새벽 늦게야 잠이들었음.

 

피곤했던 딕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에 눈을 떴음. 겨울이었고, 아직 완전히 아침이 밝아지기엔 좀 더 시간이 남아있었음. 침침한 눈을 비비며 옆을 올려다보자 익숙한 실루엣이 자신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었음. 방안이 어둡고 잠결이 가시지 않았기에, 딕은 저를 향한 브루스의 시선이 미묘하게 제 얼굴을 빗겨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음.

브루스? 무슨 일이에요? 딕이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물었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브루스의 손이 귀와 뺨과 입술을 느릿하게 스쳤음. 명백하게 성적인 뉘앙스를 담은 손길에 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음.

브루스...? 팔꿈치를 짚으며 상체를 조금 일으키려 하는데 브루스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숙이더니 부드럽게 딕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키스했음. 딕은 얼떨떨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음.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직 잠에서 덜 깬건가. 입술 사이로 밀고들어와 입 안을 휘젓는 리얼한 감각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음.

입술이 잠시 떨어져나가고 가느다랗게 눈을 뜬 딕은 문자 그대로 코앞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브루스의 얼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음. 너무. 지나치게 가까웠음. 서로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까지 서로의 얼굴에 닿을 지경이었음.

뒤늦게 가슴이 쿵덕거리며 뛰기 시작했음.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딕이 뭐라고 어물어물 말문을 열기도 전에 브루스가 다시 키스해왔음. 명성이 자자한 브루스 웨인의 키스는 정말이지 황홀했음. 딕은 따지고 생각하고 할 것도 없이 브루스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매달렸음.

 

....공계니까 씬은 일단 생략-_-;;; 아무튼, 아무리 상대가 브루스라지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지나치게 무방비했다 싶었음. 저녁나절 내내 몸을 혹사시키고 난 후의 새벽이라서 그런가. 스스로의 신변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경계심마저 허물어져버린 것처럼, 딕은 저를 안는 브루스에게 맞춰 허덕이기에만 급급했음. 브루스가 다소 아프게 깨물어서 자국을 남길 때라든지, 성급하게 진입하는 바람에 통증이 느껴질 때조차도 딕은 브루스를 거부하지 않았음. 분명히 패트롤은 같이 돌았는데,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지난밤도 배트맨의 스테미너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인지. 브루스는 딕이 녹초가 될 때까지 몰아붙였음. 어쩌면 딕이 남자와의 관계는 처음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딕은 마지막에는 거의 납작 깔린 채 앓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만 했고,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인지 못한 채 기절하듯 잠들어버렸음. 그리고 느즈막한 오전에 깨어난 딕은 여기저기 결리고 뻐근한 근육통에 몇 분간 이불 속에서 끙끙거려야 했음.

소금뿌린 달팽이마냥 꿈지럭거리다가 간신히 눈을 뜨고 보니 옆자리는 비어있었음. 순간적으로 불쑥 드는 서운함은 채 인지하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음. 대신 새삼스러운 부끄러움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들뜬 기분이 딕의 머릿속을 온통 휘저었음. 딕은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눅눅한 이불에 박았음. 어떡해. 어떡해. 미쳤나봐.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도 그렇지만 브루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대?;;; 격렬했던 지난밤을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음. 딕은 손등으로 제 뺨을 식히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음.

 

머릿속에서 자꾸만 리플레이되는 어젯밤의 정사로부터 신경을 돌리기 위해 딕은 현실적인 고민에 집중하기 시작했음. 이제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젯밤의 일이 브루스와 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딕 본인은 꽤 오래 전부터 브루스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브루스는 자신을 피후견인이자 동료이자 가족으로만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브루스도 지금까지 나를 연애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평소 언론에 비춰지는 모습을 통해 가볍다는 평을 듣고 있는 브루스였지만, 딕은 브루스가 얼마나 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음. 브루스는 결코 가벼운 감정으로 자신을 안을 사람이 아니었음.

딕은 뻐근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래층으로 내려왔음. 그리고 브루스는 어제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모습과 말투로 딕을 대했음.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브루스에게 첫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전전긍긍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브루스는 태연한 모습이었음. 늦게 일어났다고 타박하는 브루스의 목소리는 무심하기만 했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알프레드가 아침인사와 함께 식사할 거냐고 물었고, 딕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가 이내 아니라고, 괜찮다고 번복했음. 어젯밤 일에 신경 쓰느라 하마터면 알피가 곁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상한 얘기를 꺼낼 뻔했다 싶었음. 신문 너머로 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브루스가 아침 정도는 제대로 챙겨먹는 게 좋을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음. 그리고 딕이 뭐라고 대답하거나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곧바로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음. 딕은 브루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머뭇거리면서 멈췄음.

뭔가 이상했음.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가슴이 쎄하게 가라앉았음. 다시 생각해보면 어젯밤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해프닝이었음. 사전에 그 어떤 대화나 합의도 없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따위도 전혀 없었음. 피로와 잠결에 판단능력이 둔해져서 휩쓸려버린 것처럼. 어쩌면 자신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음. 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동안 기사를 다 읽은 브루스가 신문을 차곡차곡 접어서 테이블에 내려놨음. 그리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다가 아직까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딕의 시선을 마주하고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음. 무슨 일이냐고, 괜찮은 거냐고 묻는 목소리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뉘앙스여서, 딕은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음. 브루스는 설마 어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걸까?

"브루스, 어젯밤에 말이에요..."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말을 꺼낸 딕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음. 브루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딕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음. 어젯밤에 뭐냐고, 패트롤 돌 때를 말하는 거냐고 되묻는 질문에 딕은 고개를 저었음. "아뇨, 말고. 새벽에요." 갑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질척거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따지듯 말문을 열었던 목소리가 뒤로 가면서 점점 기어들어갔음. 브루스는 고담에서 가장 핫한 셀러브리티였고, 그의 재산과 지위와 명성과 외모를 보고 그를 노리는 사람은 두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였음.

문득, 브루스가 배트맨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밥먹듯이 갈아치워대던 모델들이 떠올랐음. 브루스 웨인과의 하룻밤이 무슨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며 가십지에 떠벌리던 한 골빈 금발아가씨의 인터뷰에, 브루스는 일말의 경멸조차도 아깝다는 양 차가운 표정으로 일별했을 뿐이었음.

딕은 숨이 갑갑하게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음. 저를 쳐다보고 있는 브루스의 표정이, 마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라고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음. 그래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음.

딕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웅얼웅얼 대답했음. 그리고 하루종일 자괴감과 참담함으로 우울해하면서 브루스의 시선을 피해 슬금슬금 겉돌아야 했음.

 

컨디션이 영 꽝이었던 딕은 패트롤 중에도 영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자잘한 실수를 반복했음. 그리고 딕이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을 배트맨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무슨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나보다 싶어서 웬만한 실수는 눈감고 넘기려던 배트맨이 막바지엔 정신 차리라고 나지막하게 질책할 정도였으니, 딕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음.

두 사람은 거리 정찰을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냈음. 딕은 케이브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옷 갈아입고 제 방에 틀어박혔음.

일찌감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운 딕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계속 뒤척여야 했음. 잠자리에 일찍 들면 뭐하나. 평소보다도 훨씬 늦은 시각까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돌아눕다가 겨우 잠이 들락말락 하려는 순간에, 방 문이 조용히 열렸음.

카펫이 깔린 방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발소리.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는 기척과 체중에 눌린 매트리스 귀퉁이가 살짝 기울어지는 느낌. 오랜 자경단 생활로 인해 야생동물 수준으로 벼려진 경계심은, 익숙한 상대를 향해서는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 귓가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지친 딕은 그 손길에 이끌리듯 눈을 떴음. 어둑어둑하게 역광을 드리운 실루엣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음.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넘겨주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음. 멍하니 브루스를 올려다보고 있던 딕은 이내 울컥 화를 내며 브루스의 손을 밀어냈음.

당신 뭐냐고, 왜 또 왔냐고. 나가라고. 보기 싫다고.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가 원망을 가득 담고 거부의 말을 쏟아냈음. 브루스의 손을 매섭게 쳐내려던 딕의 손목이 붙들렸고, 그 손을 떼어내려던 반대편 손목마저 붙잡혔음.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음. 당신 싫다고, 진짜 싫다고, 최악이라고 쏘아붙인 것 치고는 별로 길지 않은 반항이었음. 브루스의 입술이 딕의 눈가에 닿았음. 딕의 손목을 잡아누르고 있던 손을 풀고 그 대신 조심스레 뺨을 감쌌음. 딕은 브루스를 밀어내는 대신에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음. 아까는 왜 그랬어요. 나 정말로 상처받았어요.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섞였음.

딕은 몇 번이나 키스해달라고 졸랐고, 브루스는 그 때마다 응해주었음. 무척이나 거칠었던 어젯밤과 다르게 딕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다정했음.

 

브루스가 어제보다 훨씬 부드럽게 안아주기도 했고, 아무런 경험 없이 맞이한 처음에 비하면 딕도 조금이나마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은 어제처럼 딕 혼자 일방적으로 나가떨어지진 않았음. 정사가 끝나고도 딕은 브루스에게 칭칭 팔다리를 감으며 달라붙었음. 가지 말라고. 내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놔주지 않을 거라고 찐드기처럼 달라붙은 딕은 기어이 브루스가 제 옆에 누워 팔베개까지 대주도록 만들었음. 그래봤자 곤히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여지없이 비어있는 침대에서 혼자 눈을 떠야 했지만-_-;;;

딕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눈만 깜박거리다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등으로 문질렀음. 짜증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음.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냐고.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브루스를 욕하며 찔찔 눈물을 짜낸 딕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음.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두덩이며 새빨개진 흰자위가 제 눈으로 보기에도 볼썽사나웠음.

형편없는 얼굴로 알피가 차려준 아침을 미적미적 먹고 있으려니 브루스가 내려왔음. 무덤덤한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하던 브루스는 딕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제대로 잠을 못 잤냐고 물었음. 울컥해서 그걸 몰라서 묻냐고 대꾸하려던 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꾹꾹 눌러 삼켰음. 그리고 남은 음식을 쓸어담듯 먹어치우고 식탁에서 일어났음.

 

그날 밤, 딕 제 방 문을 잠갔음. 일찌감치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들만 하면 불쑥불쑥 서러움과 화가 치밀어 올랐음. 조금 있으려니 문고리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음. 자자. 잘 거야. 문고리 소리는 금방 조용해졌고, 딕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애써 잠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지기만 했음...

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음. 미디어룸으로 가서 다큐멘터리라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음. 기왕이면 해양생물이 나오는 걸로. 고래도 좋고. 펭귄도 좋고. 열대 산호초 섬이 나오는 다큐라든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제 방을 나서던 딕은,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브루스의 모습에 움찔 놀라서 멈춰섰음.

"....브루스?"

조심스레 불러봤지만 브루스는 대답없이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음. 겨울이라 바닥도 차가운데,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음. 딕은 조심스레 브루스에게 다가갔음. 딕을 향해서 약간 고개를 돌리는 브루스의 시선은 딕의 얼굴을 향하지 않고 미묘하게 뒷쪽으로 빗겨가고 있었음.

"브루스. 왜 그래요? 안 자요?"

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면서 브루스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음. 바로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짜증과 화는 간 데 없이 브루스가 걱정스럽기만 했음. 브루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 딕은 빠르게 브루스의 상태를 깨달았음. 몽유병이구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젯밤과 그저께 밤의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었는지도 알게 되었음. 브루스가 저를 감정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두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따지고 실망하고 화낼 일이 아니었음. 애초에 브루스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까. 브루스가 제 마음을 갖고 놀았다고, 자신이 브루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놀아났다고만 생각했던 딕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음.

기왕에 벌어진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브루스를 방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딕은 브루스의 팔을 슬슬 잡아당겼음. 괜히 이대로 방치해 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딕은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면서 브루스의 손을 잡아 끌었음.

그런데 이 양반이 두어 걸음 걷는가 싶더니 제자리에 서서는 꼼짝도 안하는 거임. 말 안 듣는 숫나귀도 아니고,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웬만큼 세게 잡아당겨서는 옴짝달싹 하지도 않았음. 딕은 초조하게 복도 너머를 돌아보았음. 브루스가 사용하는 마스터 스위트룸은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반대편 끄트머리였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한 대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들춰메고 가는게 낫지 않을까.

딕은 무심코 떠올린 생각을 애써 고개를 저어 떨쳐내고 브루스의 팔에 팔짱을 꼈음. 브루스, 들어가서 자요. 요새 스트레스가 심한 거예요? 왜 자는 시간까지 제대로 못 쉬고 이러고 있어요. 알피가 걱정할 거예요... 어차피 알아들을 리도 없는 말이었지만 딕은 안타까운 마음에 거듭 말을 걸었음. 난방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복도는 싸늘했고, 딕은 이제 진심으로 브루스가 걱정되기 시작했음. 방 밖으로 돌아다닐 거면 슬리퍼라도 신을 것이지, 이게 뭐야. 괜히 속상한 기분이 들었음.

"안 되겠다. 내 방이 가까우니까 내 방으로 갈래요?"

딕은 브루스의 팔짱을 끼고 반대편으로 돌았고, 여태 망부석처럼 꼼짝도 않던 브루스는 웬일인지 딕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뒤로 돌았음. 순간 지난 이틀간의 정사가 떠올라서 잠깐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브루스를 이렇게 밑도끝도없이 복도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딕은 브루스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왔고, 제 침대에 눕혔음. 그나마도 그냥은 안 누우려고 해서 제가 먼저 침대로 올라가서 브루스를 잡아당겨야 했지만-_-;;;

브루스가 제 옆에 나란히 눕자 딕은 잠시 긴장했지만 오늘 밤의 브루스는 별로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음. 모로 누워서 딕의 허리를 끌어안고 딕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은 채 금방 잠들었을 뿐이었음. 딕은 조심스럽게 브루스를 끌어안은 채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음.

그리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어났을 때, 브루스는 이미 딕의 침대를 나가고 없었음.

 

그날부터 사흘간 브루스는 딕의 방에 들러서 두어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음. 물론 다음날에는 그러한 제 행동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딕은 제 침대에서 자다가 낯익은 기척이 느껴지면 당연한 듯 옆자리를 내주었음.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 딕이 브루스를 위해 이불을 들춰주며 꾸물꾸물 옆으로 옮겨 누웠다가 자연스럽게 제 품으로 파고드는 브루스를 다독이며 끌어안았는데, 제 등을 어루만지는 브루스의 손길이 어쩐지 농밀한 거임. 자려고 눈을 감았던 딕은 당황해서 다시 눈을 떴음. 제 목에 뺨을 부비던 브루스가 쇄골과 목과 턱에 키스하는 것이 느껴졌음. 딕이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사이에 잠옷 상의가 벗겨졌음. 잠기운에 취한 몸이 익히 경험했던 애무에 서서히 반응하며 깨어나고 있었음. , 이러면 안 되는데. 딕은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브루스를 밀어내려 했음. 지금의 브루스는 말하자면 심신미약 상태나 다름없으니까.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상대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그런데, 그렇기는 한데, 며칠 전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브루스를 잡아끌 때도 느꼈지만 브루스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참 힘이 셌음. 아니 뭐, 솔직히 말해서 힘이 세긴 해도 딕이 작정하고 저항하면 어찌어찌 밀어낼 수야 있겠지만, 빌어먹을 놈의 키스가 너무 끝내줬음. 단숨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감각에 딕은 몸서리쳤음. 브루스는 입술을 겹친 채 능수능란한 손으로 딕의 성감대를 자극했음. 다소 거칠다 싶을 정도로 꾹꾹 눌리고 비벼지는 중심부조차 아릿한 쾌감을 느낄 뿐이었음.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리면 꿈틀거릴수록 빈틈없이 밀착한 채 내리누르는 브루스의 단단한 몸에 비벼지면서 오히려 흥분감만 고조되었음. 딕은 아연해서 눈을 질끈 감았음. 이대로 나 잡아 잡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한데. 달달 떨리기 시작한 몸은 이미 노골노골하게 풀린 채 브루스의 애무에 달큰한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음.

나 이렇게 자제력이 약한 타입이었던가. 딕은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음. 솔직히 말해서 브루스가 만약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멈추기라도 한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음.

결국 딕은 근 나흘만에 브루스에게 허리가 녹을 만큼 안겼음. 그리고 다음날 아무 것도 모르는 브루스와 마주칠 때마다 혼자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혀야 했음.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도대체 제정신도 아닌 사람 데리고 뭐하는 짓이야ㅜㅜㅜㅜ;;;; 하면서 땅파는 딕이 보고싶다. 가끔 브루스가 심하게 해대면 다음날 하루종일 허리가 뻐근할 때도 있겠지. 에고에고 영감처럼 앓는 소리 내면서 허리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브루스가 진지하게 괜찮냐고 어디 다치기라도 했냐고 걱정해주는 바람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서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 어버버버 했으면 좋겠다.

한편 브루스는 언제부터인가 피곤할 때면 깊게 잠들지 못하고 기억나지도 않는 꿈속을 헤매곤 했음,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고 띄엄띄엄하던 하던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는데, 그 분위기가.... 십대시절에 야릇한 꿈을 꾸던 느낌이랑 비슷해서 괜히 떨떠름해지는 거임.

원래 예민한 구석이 있는 브루스는 피로가 심할 때면 제대로 잠을 못 자곤 했음. 그렇게 수면부족에 시달리다 보면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그러면 그 다음날에는 더욱 신경이 곤두서고.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는 더더더더 심해지고. 결국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곤 했음.

하지만 요새는 약간 달랐음. 일단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나면 잠깐 뒤척이다가 금방 잠들기는 하는데.... 그렇게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제대로 피로가 풀리지 않고 묘하게 피곤한 느낌이었음. 그러면서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거나 예민해지긴커녕 묘하게 신경줄이 느슨해지고 나른해지는 기분이라ㅋㅋㅋㅋ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 참 희한했음.

 

그러던 어느날 밤, 피로에 지쳐 잠든 브루스는 예의 그 꿈을 꿨음. 뿌옇게 안개가 낀 저택을 거닐다가 장면이 휙 하고 바뀌었는데, 제 아래에서 달콤한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음. 누군가의 육감적인 몸을 열정적으로 탐하고 있던 브루스는 자신이 움직이는 족족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대를 더더욱 울려주고자 의욕이 충만했음. 안돼요 브루스, , 안되는.... 띄엄띄엄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차라리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만 못했음. 일부러 세게 박아주자 숨도 제대로 못 쉬며 허리를 들썩이던 상대가 애처롭게 매달려왔음.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입술은 축축하고 말캉했음. 브루스는 배부른 육식동물처럼 만족스럽게 웃었음. 따뜻한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음. 유연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조임이 황홀했음.


그리고 아침에 깨어난 브루스는 제 방의 뽀송뽀송한 침구에 파묻힌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음. 꿈에서 깨면 언제나 흐릿하게 기억나지 않던 상대방의 얼굴이 갑자기 플래시백 되는 것처럼 팟, 하고 떠올랐기 때문이었음. 브루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제 입을 가렸음.

꿈속에서 저에게 안겨 쾌감으로 울던 사람은 다름아닌 딕이었음.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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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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