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물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브루딕+뎀딕 근본없는 판타지 AU가 보고싶다. 남북으로 기다랗게 생긴 대륙의 중앙에 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 적도를 살짝 빗겨간 위도상에 띠처럼 둘러진 사막이라 육로를 통해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지대여야 한다. 무역상들이 험준한 산맥과 고원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바닷길과 사막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바다가 잔잔하고 폭풍이 뜸하면서 바람 방향이 잘 맞을 때는 배를 통해 물건을 실어나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막을 통해서 움직이겠지.

 

사막을 종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 중앙에 있는 도시에 들러 물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도시의 영주는 브루스 웨인임. 그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오랜 생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함. 도시에는 크고 작은 물물거래 시장이 세군데 있음. 주민들은 도시를 들러가는 여행객들이나 무역상인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임. 여관이라든지 음식점이라든지 잡화상 등등. 사막을 뚫고 도시까지 오느라 지치고 탈진한 짐승들을 저렴한 값에 사들였다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튼튼해지면 그 다음 손님들에게 비싼 값에 되파는 일을 하기도 하고, 망가진 장비들을 수리해주는 전문 수리점도 있고. 보급품을 추가로 구매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곳도 있었음. 물론 사막을 건너는 일은 건장한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일 터이니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위한 병의원도 많을 것이다.

 

작지만 인구밀도 높고(대부분이 유동인구지만) 복작복작하게 돌아가는 이 도시는 일년 내내 풍족하게 솟아나오는 물을 기반으로 번영한 곳이었음. 샘은 도시 한가운데 존재하는 영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도시의 곳곳에 존재했는데, 이 샘을 유지시키는 것은 오로지 브루스의 힘이었음.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본인이 도시를 통치하거나 다스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영주로 받들어졌음. 매사에 무감정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하건 말건 떠받들건 말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의 집에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애첩이 있었고, 영주와 영주의 애첩이 집사와 함께 셋이서 살아가는 비밀의 저택에 어느날 한 어린아이가 유모의 손을 잡고 찾아옴. 브루스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음.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와 함께 저택을 찾아온 아이는 대여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어렸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를 자주 드나드는 노련한 무역상이나 그들의 경호를 맡은 용병들까지도 갑자기 출현한 영주의 아들에 무척이나 놀랐음. 그도 그럴것이 영주는 여자를 별로 가까이하지도 않고(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 거지만) 어쩌다가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감정없는 석상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수십년째 사막을 떠나지 않고 있는 영주가 대체 언제 여자를 만나서 애까지 만든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음. 소년이 보기드문 흑발에 선명한 푸른눈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는 도시 내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경비대에게 호되게 혼쭐이 나서 쫓겨났을 거임.

어쨌든 감히 영주의 사생활에 관여할 정도로 간 큰 인물은 없었던 터라, 사람들은 소년이 유모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음. 그리고 며칠 후, 집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해주는 소녀의 입을 통해 그 꼬맹이가 영주의 아드님으로서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그렇게 사람들은 그 애가 영주의 친자임을 알게 되었음. 애엄마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어차피 안다고 해서 그들이 참견하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작은 도시를 웅성거리게 했던 작은 소요는 그럭저럭 가라앉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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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데미안은 제 아버지랑 똑같이 무감정한 생물이었음. 차이점이라고 해봤자 브루스가 돌로 깎아 만든 석상같다면 데미안은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같다는 정도?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새파란 눈동자로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나 하는 귀염성 없는 꼬맹이었건만, 딕은 그런 데미안을 무척이나 좋아했음.

넓기만 하고 사람이라고는 셋밖에 없는 저택에서 화초나 동물들만 벗삼아 외롭게 살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음. 물론 드넓은 저택의 관리를 돕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딕이 말 좀 붙여보려고 해도 지나치게 정중하고 깍듯이 대하기만 했으니까.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다들 딕을 보면 어려워하기만 했음. 딕은 원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러고싶진 않았음. 그래서 딕은 언제부터인가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저택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더더욱 벌어지게 만들었음.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까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브루스가 딕을 위해서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은 귀여웠지만 딕은 외로웠음. 그러던 와중에 제 허리춤에도 안 오는 꼬맹이가, 그것도 브루스의 친아들이라는 애가 저택에 들어왔으니 기쁘지 않을리가 없지.

 

딕은 브루스랑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색밖에 없는 꼬맹이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안아보고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젖살때문에 통통한 뺨도 잡아당겨보면서 브루스 당신이랑 똑같이 닮은 애라고 호들갑을 떨어댔음. 정작 브루스는 멀뚱한 눈으로 딕과 데미안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딕은 그날부터 데미안의 고사리같은 손을 잡고, 혹은 아예 제 팔에 안아서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음. 데미안은 낯선 딕이 저를 덥썩덥썩 끌어안고 수선스럽게 토닥거리고 뽀뽀하고 극성을 떨어대는게 싫은 듯 볼이 좀 불퉁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딕을 따라다녔음. 데미안을 데리고 왔던 귀머거리에 벙어리 유모가 데미안의 외가로 돌아가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아침이 되어 드넓은 저택의 넓디넓은 제 방 한가운데 어른 대여섯이 뒹굴어도 충분할 만한 침대에서 눈을 뜨면, 적막함과 고독함을 느끼기도 전에 아침나절부터 들이닥친 딕이 데미아아안~!! 하면서 데미안을 일으켜 후다닥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 붙들고 나와서는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음.

 

데미안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아이였고, 덕분에 딕이 귀찮고 성가실 때도 인상이나 좀 찡그리고 볼만 좀 불퉁해질 뿐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진 않았었음. 반대로 딕이 데미안을 데리고 나와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으로 데려가서 생전 처음 보는 달다구리한 디저트를 맛보여줬을 때에도 이거 좋다느니 맛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했지만.

딕은 데미안의 눈이 커지면서 열심히 스푼을 놀리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고, 데미안이 제 그릇을 다 비우자마자 딕 자신의 접시도 슬그머니 데미안의 앞쪽으로 밀어주었음. 말은 없어도 표정으로 티를 다 내니 보기만해도 귀엽고 재미있었음. 브루스도 데미안의 반만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두 부자를 아무것도 없는 한 방에 넣어놓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서로 한 마디도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것이 뻔해서 웃기면서도 슬펐음.

시간이 지날수록, 데미안은 딕이 온종일 제 옆에 있는 생활에 알게모르게 익숙해졌음. 그래서 어느날 밤 악몽을 꾸었을 때, 저도모르게 발걸음이 딕의 방으로 향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침실이건 서재건 복도건 저택의 모든 벽에는 유리를 끼우지 않은 아치형의 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쭉길쭉하게 나 있었음. 어스름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들어와 어두컴컴한 방 안을 파르스름하게 비췄음. 사위는 고요했음. 사막의 밤답게 기온이 서늘했음.

데미안의 방은 수로를 내어 조성한 후원과 가까웠음. 깊은 땅속에서 갓 솟아나온 신선한 샘의 물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음. 악몽에 시달리며 축축하게 배어나온 식은땀이 싸늘하게 식어갔음. 데미안은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왔음.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타이투스가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어린 주인을 쳐다보았음. 데미안은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로 돌바닥을 밟으며 타박타박 제 방을 나섰음. 한낮의 뜨거운 기온에 달궈졌던 대리석은 해가 저문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음.

긴 복도를 지나 방향을 꺾고 꺾어서 딕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묵묵히 데미안의 뒤를 따르던 타이투스가 딕의 방 문앞에서 데미안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음.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타이투스를 물끄러미 응시했음. 타이투스는 귀를 납작하게 접고 자세를 낮춘 채 데미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낑낑거리고 있었음. 데미안은 작은 손으로 타이투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줬음.

"방으로 돌아가."

충성스러운 개는 차마 어린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음. 마지못해 뒤로 돌아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시무룩했음. 데미안은 딕의 방 문을 열었고,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로 종종종 다가갔음.

 

얇게 자아낸 실크로 하늘거리는 차양을 걷어냈을 때, 데미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새까만 이불을 나눠 덮고있는 딕과 제 아버지의 모습이었음.

인기척에 설핏 잠에서 깬 딕은 침대 옆에서 유리알같이 파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데미안을 보고 꽤나 당황했음. 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상체를 약간 일으키며 무슨 일이냐고, 잠이 오지 않냐고 데미안에게 물었음.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 기울인 채 딕을 응시하기만 했음. 딕은 더듬더듬 제 가운을 찾아서 이불 안에서 꿈지럭거리며 꿰어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데미안을 안아올렸음.

나쁜 꿈이라도 꿨어? 여태까지 안 잔거야? 딕은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후원으로 나왔음. 물을 가득 채워 찰랑거리는 수로의 수면 위로 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음. 어린애를 재우려는 것처럼 데미안을 안고 부둥부둥 어르며 후원을 걷고있는데, 불쑥 데미안이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딕은 당황해서 뭐? 하고 대답하며 걸음을 멈췄고, 딕이 정신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재차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아버지랑 섹스했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딕은 엄청, 당황하고 말았음.

얼굴이 확 달아오른 딕은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으면서 아니라고, 나랑 브루스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아니 그보다도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얘기는 들은 거냐고, 너처럼 어린 애가 할 말이 아니라고 허둥거렸음. 데미안은 덤덤하게 '엄마한테 들었는데.' 라고 대답했음. 딕을 빤히 쳐다보는 데미안의 시선이 얼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음. 식은땀까지 삐질 흘려대며 오해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던 딕은, 그렇다면 너와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관계냐고 묻는 데미안의 질문에 말문을 잃었음. 어물어물 입을 다무는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두웠음. 글쎄. 무슨 관계일까.

항상 웃는 모습만 보여주던 딕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음. 그래서 데미안은 충동적으로 말을 덧붙였음. "말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데미안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음.

데미안은 착하네. 고마워. 뭐가 착하고 뭐가 고맙다는 건지 도통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딕이 고맙다니까. , 기분은 나쁘지 않았음. 데미안은 내친 김에 어설프게 딕의 목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음. 이건 데미안이 이곳에 와서 딕에게 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스킨쉽인데,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런 걸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딕 본인이 좋아하는 행동이니까 데미안에게 자주 해주겠거니 싶었음. 그러니까 내가 딕한테 해줘도 좋아하겠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데미안은 딕이 저에게 해주던 것을 흉내내어 쬐끄만한 손으로 어설프게 딕의 등을 다독여주었음. 그리고 예상대로 딕은 이렇게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음. 어느정도냐 하면, 데미안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뜨끈한 소금물에 어깨가 젖는 기분은 별로였지만 데미안은 그냥 잠자코 있었음.

 

* * * * * *

 

옛날로 돌아가서 딕이 사막의 도시에 처음으로 들른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음. 대륙 곳곳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것을 업으로 삼던 부모님이 어린 딕을 정착해서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륙 반대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거임.

그 때만 해도 도시는 지금보다 미묘하게 작은 규모였음. 그만큼 거주민들도 좀 더 적었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음. 오래된 교역도시인 만큼 인프라는 제법 발달되어 있었고 물도 충분했지만, 지금처럼 도시 여기저기의 샘에서 물이 풍족하게 넘쳐나고 집집마다 화초며 과실수를 키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사막 기슭에 사는 소수민족의 명절 기간이었음. 무역상단에 가이드로 동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그들은 언제나 일정 이상의 인원이 도시에 머물곤 했음. 딕의 부모님은 그들의 축제에 어울려 춤과 음악을 제공했고, 마침 오랜만에 저택에서 나온 브루스도 그것을 관람했음. 덕분에 딕의 부모님은 분에 넘칠 정도로 후한 공연비를 받을 수 있었음.

그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노잣돈도 넉넉히 챙긴 후 나머지 사막을 건너기 위한 여행을 떠났음. 그리고 이틀을 채 못가서 강도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 박살난 짐수레와 살해당한 시신들 사이에서 간신히 구조된 것은 부부의 어린 아들 뿐이었음.

영주가 있는 도시 안에서는 감히 약탈이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걸음만 밖으로 나서면 무법지대였음. 다치고 탈진해서 사경을 헤매는 어린 소년을 보며 브루스는 거의 죄책감과도 같은 기분을 느꼈음. 영주의 심리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샘은 평소의 절반밖에 물을 흘려보내지 않았음. 작은 사막도시의 주민들은 처지가 불쌍하게 된 아이를 한마음으로 동정하고 걱정했음.

 

소년이 깨어난 후 브루스는 소년을 제 저택으로 데려왔음. 어린애를 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다행히 붙임성 좋은 아이는 무뚝뚝한 브루스에게도 살갑게 잘 웃어주었음. 집사와 둘이서 살던 집에 어린애가 생겼으니, 자연히 그만큼 일손이 필요해졌음.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의사도 정기적으로 저택에 드나들게 되었고, 성장기라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옷을 짓기 위해 재봉사도 자주 드나들게 되었음. 아이의 몸에 맞는 가구를 맞추기 위해서, 놀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신발을 짓기 위해서,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저택의 사람들이 시장과 상점으로 나오는 일도 많아졌음. 딕은 귀여운 외모에 살가운 성격을 타고난 아이였고, 사람들은 그런 딕을 무척이나 아껴주었음. 딕이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도시를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영주가 귀하게 키우는 아이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딕 자체가 귀엽기 때문이기도 했음.

브루스는 딕을 위해서 저택의 후원에 수로를 조성하고 맑은 물을 가득 채워 정원을 만들었음. 저택의 샘에서 24시간 솟아나오는 물은 수로를 채우고 정원을 휘돌아 도시 곳곳에 흘러들어가고 스며들었음. 강한 태양빛과 비옥한 토양은 충분한 물이 더해지자 온갖 화초와 과실수가 자라날 환경이 되었음. 딕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인으로 자라났음.

 

딕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과 함께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었음. 도시에 정착해서 산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지만, 딕은 언제나 넓은 세상을 보고싶어 했었음. 그래서 딕은 스무살 생일이 되던 날 브루스에게 달려가 들뜬 얼굴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고 얘기했음. 무역상을 따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걸 보고 경험하고 공부하고 싶다고, 상기된 얼굴로 허락해달라며 재잘거리는 딕을 브루스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음. 딕의 뒷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무역상단을 이끄는 상인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 이 바닥에서 감히 영주님의 아이인 그레이슨 군을 홀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인이 거드는 말에 힘입어 딕이 더더욱 브루스를 졸랐고, 결국 브루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딕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날로 바로 짐을 꾸려 그 다음날 도시를 떠났음. 그리고 2년이 좀 안되는 시간동안 대륙의 남단과 북단에 있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냈음. 마침 무역풍이 부는 계절이었고, 딕은 난생 처음으로 바다라는 것도 구경해보고 배라는 것도 타 보았음. 딕이 태어나기 전, 십대 중반의 부모님은 공연단과 함께 배를 타고 대륙의 건너편으로 건너왔었다던데. 건너들은 이야기로 막연하게 상상하기만 했던 바다와 실제의 바다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딕은 제가 보고듣는 모든것을 빠르게 흡수하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냈음.

물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 낯선 지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배앓이를 하기도 했고, 험한 산길을 지나다가 강도떼에게 습격당해서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음. 두세달이 지나며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게된 것을 제외하면 거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했지만, 다리를 치료하고 요양하느라 오랜만의 사막길에는 동행할 수가 없었음. 결국 딕은 집을 떠난지 2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제가 떠나온 도시로 돌아갈 수 있었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가슴이 뛰었음. 지금까지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하루라도 빨리 저택으로 달려가 브루스를 보고싶었음. 그동안 편지를 꾸준히 보내긴 했었지만 이 시대의 편지라는 건 짧아야 한달, 길면 두세달이나 있어야 도착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딕이 지난달에 부친 편지보다 딕 본인이 먼저 브루스를 만나게 생겼을 정도임.

딕은 제가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리바리 사 모은 선물들과, 브루스에게 전할 수많은 이야기들을 안은 채 사막길에 올랐음. 그리고 상단과 함께 짐을 줄줄이 실은 낙타들을 이끌어 도시에 도착한 순간, 제가 떠나올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섣불리 도시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멈춰섰음.

집집마다 거리마다 활짝 피어있던 화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음.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던 과실수 가지에는 누렇고 시들시들한 이파리만 볼품없이 달려있을 뿐이었음. 당황스러워하는 딕에게 노련한 무역상은 놀랄 거 없다고, 요 몇 년간 특별히 물이 풍족해서 과실수도 키우고 화초도 가꿨던 것뿐이지, 원래 이 도시가 그렇게 나무 많고 풀 많고 그런 동네가 아니라며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음. 딕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렸음. 낯설었음.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기억하는 이곳은....

어쩔 줄 몰라하는 딕을 알아본 몇몇이 오랜만이라며 인사해왔음. 딕은 반갑게 그들에게 다가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와락 끌어안았다가,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머뭇거리며 떨어졌음. 저를 동생처럼 조카처럼 귀여워하던 어른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이 느껴져서 당혹스러웠음.

, 디키야. 그러지 말고. 얼른 영주님께 가보지 그러니. 은근슬쩍 눈치를 주는 뉘앙스에 딕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음. 도시에 도착하면 브루스를 제일 먼저 만나려 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묘하게 내외하는 반응이 서운했음.

 

그 길로 저택으로 향한 딕을 알프레드가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맞이했음. 그에 비하면 브루스의 반응은 좀 더 미적지근했음. 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녀왔냐고,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을 뿐임. 피곤할 텐데 일단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저녁이 준비되거든 부르겠다고. 브루스는 딕이 2년 가까이 도시를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단 사나흘 정도 집을 비운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음. 그러면서도 딕의 얼굴에 못박힌듯 고정된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딕이 어렸을 때부터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었고, 웬만해서는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스물 남짓한 평생의 반 이상을 브루스와 함께 지낸 딕은 브루스의 표정을 캐치해내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익숙했지만, 그러한 딕조차도 지금의 브루스의 얼굴은 읽어낼 수가 없었음. 감정 없는 무표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음. 오히려 그 반대였음. 온갖 색깔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래서 차마 뭐라고 콕 찝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음.

딕은 말문을 잃고 머뭇거렸음. 브루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크고 노련하고 강하고 성숙한 어른이었는데. 그런 브루스가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느껴졌음. 결국 딕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제 방으로 왔음.

신선하고 깨끗한 물로 먼지를 씻어낸 딕은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음. 그리고 왠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고자 후원으로 나왔다가, 자신이 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정원의 모습에 저도모르게 멈춰섰음. 수로의 물은 잠가버렸는지 물기하나 없이 말라있었고, 어수선할 정도로 온 사방에 흐드러져있던 화려한 수목들은 싹 정리되어 있었음. 짧은 풀과 단정하게 조경된 몇 그루의 나무들. 그리고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있는, 장인의 작품이 분명한 조각들. 잘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꾸며진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딕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지나치게 달랐음.

딕은 황망한 기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정원에서 나왔음. 그 길로 알프레드를 찾아간 딕은 정작 노집사를 대면하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딕의 얼굴을 마주보며, 알프레드는 안쓰러운 표정을 했음.

정원을 보셨군요. 딕은 목이 메어서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음. 알프레드는 딕을 자리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네주며 조용한 목소리로 위로했음. 도련님은 아주 어렸을 적에 저택에 오셨으니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원래 후원에는 수로같은 것은 없었답니다. 단지 샘 하나가 있어서 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만큼의 물이 솟아나오고 있었을 뿐이지요. 도련님이 떠나실 적의 모습과 달라서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도시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없답니다.

찻잔을 두손으로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딕이 울적한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물었음. 나 때문인가요? 내가 여길 떠나서? 알프레드는 고개를 저으며 딕의 어깨를 두드렸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딕 도련님께도, 브루스 주인님께도 지나치게 가혹하신 말씀 같군요.

딕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음. 브루스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어딘가를 다치거나 병들어서도 안됐음. 스스로의 감정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브루스는 언제나 스스로를 극도로 억누르며 감정적인 평정을 유지하곤 했음.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게 달린 수많은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으니까. 도시와 정원이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의 이유를 따져 물으며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도시가 돌아갈 수 있도록 샘을 유지시켜주는 브루스에게 감히 해서는 안될 말이었음.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딕의 탓이 아닌 것은 아니었음. 딕은 아름답던 화초들과 정원수와 과실수가 사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그동안 브루스가 느낀 외로움과 슬픔과 고독이 반영된 결과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음. 제가 정신없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에 푹 빠져있는 동안, 브루스는 늘 똑같기만 한 이 저택에서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을까.

 

그날 저녁, 외지인들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두 군데가 문을 닫았음. 요리사와 종업원들이 전부 저택의 저녁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되었기 때문이었음. 딕과 동행하여 도시에 들어온 상단은 무척이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

음식은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저녁나절 내내 심란했던 딕은 별로 많이 먹지 못했음. 상석에 앉아있던 브루스의 무덤덤한 시선은 내내 딕을 향하고 있었음. 결국 딕은 이마 쉬러 가겠다고 양해를 구하며 먼저 일어섰고, 브루스는 무던한 목소리로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툭 말을 던지고 같이 일어섰음. 손님을 대접하는 집주인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음. 상단의 상인들과 길잡이들과 호위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음식과 술을 즐겼고, 브루스와 딕은 떠들썩한 연회장을 떠나 한적한 복도를 걸었음.

이렇게 둘이서 함께 저택을 거니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거늘,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음. 브루스를 만나면 그동안 쌓아놓은 이야기들을 밤새도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길고 적막한 복도를 앞만 보면서 나란히 걸으려니 참을 수 없이 어색했음. 그래서 비로소 제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브루스를 돌아보며 나는 좀 일찍 자야겠다고, 당신도 피곤하면 굳이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쉬라고 말하려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브루스의 시선에 붙들려 어물어물 말끝이 흐려졌음. 브루스는 그렇게까지 딕에게 가까이 붙어서있지는 않았음. 딱히 야릇한 긴장감이 조성된 것도 아니었음. 오히려 예전에 비하면 좀 더 멀찍이 거리를 둔 채로,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음.

이마에서 눈썹으로, 눈으로, 뺨으로, 곧게 솟은 콧날을 따라 내려와서 입술과 턱으로,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새삼스레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브루스의 시선이 찬찬히 딕의 얼굴을 살폈음. 딕 역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딕의 뺨을 쓸었음. 아주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덧그리는 손끝이 흰 뺨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떨어져나갔음. "....쉬려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루스는 자리를 뜨지 않았음. 딕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을 때까지.

알프레드가 매일 정리해놓은 방은 딕이 떠나기 전과 똑같았음. 책갈피가 중간에 꽂힌 채 홀로 책상위에 올려둔 책마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음. 딕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음. 울고 싶었음. 그날 밤, 딕은 한 숨도 자지 못했음.

 

다음날 딕은 시장으로 나왔음. 제가 좋아하는 노점과 디저트 가게에도 들르고,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음. 언제나 외지인들로 붐비는 도시는 북적북적했지만, 묘하게 예전의 활기찬 모습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음.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묘하게 여유가 없었고, 늘 반짝이던 간판들이나 새하얗던 노점상의 천막들도 묘하게 텁텁해보였음. 풍족할 때는 쉽게 느껴지지 않던 변화들이, 그 풍족함이 사라지니까 대번에 티가 났음.

딕의 또래의 청년들이나 딕보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 오래전 원래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조차 근 2년간의 변화에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음. 그 누구도 대놓고 딕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머무를 거냐고 넌지시 묻는 질문의 행간에는 말못할 간절함이 느껴졌음. 철없는 일곱살배기 꼬맹이 하나가 딕의 다리에 답삭 매달리며 오늘아침에는 샘에 물이 가득 찼었다고, 덕분에 오랜만에 밀렸던 양털을 다 빨았다고 자랑했다가 제 엄마한테 엉덩이를 팡팡 얻어맞고 찡찡 울음을 터뜨렸음. 애엄마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애가 어려서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쉬다가 가라고 딕에게 몇번이나 사과했음.

딕은 당황했음. 어째서 나한테 미안해하는 걸까. 딕은 어렸을 때부터 도시와 시장 곳곳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자랐고, 또래들과 어울려 짖궂은 장난을 치다가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은적도 많았음. 형 동생 할 것 없이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사람들은 영주님이 키우는 아이인 딕을 무척이나 귀여워하며 이것저것 먹을것을 손에 쥐어주곤 했음. 어느정도 자란 이후에는 베이비시터를 자처하며 코찔찔이들을 돌보기도 했었고. 공방이나 수리점에 드나들며 잡다한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물어보고 배우기도 했었음. 딕에게 있어서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렸을 적 캐러반에서 저를 돌봐주던 이모나 삼촌들과 마찬가지였음.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고작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떠나있었을 뿐인데. 역시 나는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걸까?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서?

하지만 딕 역시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것뿐이었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딕은 하루종일 시장주변의 가게를 돌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일찌감치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음. 그 날의 저녁식사 역시 전날 못지않게 휘황찬란했고, 딕은 입맛이 없었지만 브루스와 알프레드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으로 제 몫을 먹었음.

전날 밤에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기 때문인지, 딕은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들었음. 얕은 선잠이 금방 깊은 숙면이 되었다가, 기억나지도 않는 꿈을 몇개 연달아 꾸기도 했음.

한참을 깊은잠과 얕은 잠을 반복하던 딕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눈을 떴음.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는 브루스와 눈이 마주쳤음. 딕은 잠에 취해 멍한 기분으로 브루스를 올려다보았고, 브루스는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덮어줬음. 사막은 낮기온이 뜨거운 만큼 일교차가 심해서, 꼼꼼하게 침구를 챙기지 않았다간 감기라도 걸리기 십상이었음. 어설프지만 다정한 손길로 이불을 잘 펴서 덮어주는 브루스를 올려다보며, 딕은 잠에 취한 채 배시시 웃었음. 그리고 금세 다시 잠들었음.

다음날,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온 딕은 수로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 투명한 물을 보며 말문을 잃었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음.

 

그날 딕은 하루종일 후원에 머물렀음. 오후에는 브루스도 와서 함께 디저트와 차를 즐겼음. 같은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딕은 브루스의 집무실로 찾아갔음. 그리고 제가 근 2년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것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음. 브루스는 내내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딕의 말을 열심히 듣고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음. 그래, 그랬니, 그렇구나, 하고 대꾸하는 대답은 영 시원찮았지만, 딕은 그것만으로도 잔뜩 고무되어서 제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줄줄 쏟아냈음. 마치 스스로의 목숨을 보전하고 폭군을 일깨우기 위하여 천일하고도 하루동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어느 나라의 왕비처럼. 밤을 새고서도 끝날것 같지 않던 이야기는 제가 사막도시로 돌아온 여정을 수선스럽게 과장하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음.

"....그래서 짠, 그리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구요. , 이제 질문있으면 해봐요. 무엇이든 다 대답해 줄게요!!" 딕이 자랑스럽게 뻐기면서 말했고, 브루스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음. 딕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음.

"이제 웬만큼 돌아볼 건 다 보고 온 것 같아요. 재미있긴 했는데, 역시 몸은 힘들더라구요.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요. 이곳도 무척이나 그리웠구요. 나는 아무래도 여행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이것 봐요, 여기 다리에 흉터 보여요? 정말 아파서 죽을 뻔 했다니까요. 집에 돌아오니까 이렇게 편한데 말이에요. 그쵸? 역시, 내가 살 곳은 여기인 것 같아요."

쾌활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저절로 잠겼음.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음. 브루스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음. 왜요, 다 큰 자식이 계속 집에 눌러붙어 있으면 민폐인가요? 딕이 애써 웃으며 말했고, 브루스는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굳어있다가 반 박자 늦게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딕은 코를 훌쩍거리며 브루스를 끌어안았음.

아 정말 센스없는 아저씨. 이럴 때는 좀 안아주면 덧나나. 브루스가 꼼짝도 하질 않으니 그냥 내가 끌어안아야겠다. 딕은 두 팔로 브루스를 끌어안은 채 널찍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음.

그렇게 딕은 도시 한가운데의 넓은 저택에 살게되었음.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안도했음. 어느 사이엔가 딕은 본의아니게 도시에서 영주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음. 예전과 다른 묘한 거리감은 딕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고, 자연스레 딕은 점점 저택 안에만 머무르게 되었음. 그래도 괜찮았음. 딕이 자유롭게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는 삶을 버리고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결국 브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가끔씩은 좀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음. 브루스가 딕을 위해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도 귀여웠음. 그러니까 괜찮았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브루스는 딕을 건들지 않았음. 딕을 위해 온갖 귀한 화초를 가져다 심고, 진기한 동물들을 데려다놓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지만 그뿐이었음.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가 딕에게, 딕이 브루스에게 연애 대상으로서의 관심이 없는 건 또 아니었음. 딕도 브루스를 좋아하고 원했음. 그래서 솔직히 브루스를 이해할 수 없었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나이차이? 나이로 따지자면 브루스보다 어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브루스는 도시의 가장 나이많은 노파가 소녀였을 때도 지금 모습 그대로라고 했었음. 딕이 처음 저택에 왔을 무렵의 차이에 비하면 두사람의 겉보기 나이 차이는 확 줄어있었음. 설령 나이차이가 좀 나면 어때. 딕은 성인이었음.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다 빠진 할아버지랑 연애를 해도 본인들만 좋으면 무슨 상관이겠음.

더군다나 딕은 이미 암암리에 브루스의 애첩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음. 한창 나이의 싱싱하고 예쁘장한 청년이 최고급 옷감으로 지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하루종일 영주의 곁에 붙어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할 오해였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딕을 안지 않았음. 언젠가 하루는 시무룩해진 딕이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냐고 대놓고 물어봤을 정도였음.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묵묵히 저었지만, 딕은 브루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음. 충동적으로 딕을 향해 내밀어진 손은, 그러나 딕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거두어졌음. "....늦었구나. 이만 자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딕은 심란해졌음.

 

브루스가 정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딕으로서도 굳이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었음. 연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브루스는 제 은인이었고, 소중한 가족이었음. 그를 위해 기꺼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음.

하지만 딕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확실한 증거가 있거나 그래야만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졌음. 마치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처럼, 매일아침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음. 그의 눈빛에서, 가끔 어떠한 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는 모습에서. 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음.

단지 딕이 모르는 것이라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며 은총인 이 사막의 도시가,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이, 브루스에게는 저주와 다름없다는 사실이었음.

 

브루스는 딕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흘째 되던 날, 앞으로 당신 곁에 머무르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음. 그는 딕이 대륙 곳곳을 여행하며 부친 편지 한통 한통을 전부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고, 딕이 얼마나 바깥세상을 즐기고 있는지, 새롭게 접하는 그 모든것들을 얼마나 놀라워하고 경탄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음. 그런 아이가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기쁨임과 동시에 슬픔이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고, 아프거나 다쳐서도 안 되고, 슬퍼하거나 분노해서도 안 되는 이 저주받은 삶에 제가 아끼는 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음. 하다못해 일년에 단 한 달만이라도, 사막을 벗어나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차피 고민해봤자 불가능한 일이었음. 천연의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도시는 건조했고, 아무리 많은 물을 가득 저장해두고 떠난다 한들 금방 모래 사이로 스며들거나 증발되어버릴 것이 뻔했음. 부모님을 잃고 고향처럼 자란 도시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딕 본인도 원하지 않을 거임. 결국 브루스는 지난 몇십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자신의 연인이 되는 것은 딕에게 지나치게 가혹했음. 그래서 브루스는 딕을 안지 않았음. 딕으로서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가끔 브루스는 딕에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묻곤 했음. 딕은 그 때마다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됐다며 손사래를 쳤음. 딕은 바깥세상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고 있었음. 안 그래도 요새 자꾸 외로워지려고 하는데, 예전처럼 그렇게 훌쩍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기 싫어질까봐 스스로도 두려웠음. 홀로 고독할 브루스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실컷 즐기다 오는 것은.... 아니, 뒤늦게라도 돌아오기나 하면 다행이지. 애초에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옳았음.

딕은 차라리 브루스를 꼬시고 유혹해서 쓰러뜨리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음.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음. 목욕 시중을 들거나 마사지를 핑계로 스킨쉽을 조금씩 조금씩 늘리다 보면 넘어오지 않을까. 어차피 날도 덥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겠다, 딕의 옷차림은 날이 갈수록 얇고 대담해졌음. (그리고 그로 인해서 딕이 브루스의 애첩이라는 루머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음) 심지어 잠을 잘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이불속에 쏙 들어갈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음. 브루스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했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얼굴은 전혀 그러한 티를 내지 않았음. 낼 수 없었음. 천진하게 '왜요, 뭐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했음. 붙임성이 좋은 딕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한 차림새를 한 주제에 브루스에게 잘만 들러붙었음. 비록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없었지만. 딕이 알몸으로 브루스가 자고있는 침대에 파고들었을 때, 브루스가 딕을 쫓아내거나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나름의 성과로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하긴 했음. 나가라고 하질 않았으니 진전이라면 진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래놓고 쿨쿨 잠만 잤을 뿐이니 실패라고 할 수도 있었음.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브루스도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다만 딕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있는 것뿐이라는 확신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음.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어린 데미안이 저택에 찾아왔음.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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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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