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로드 세계관 기반. 슈퍼맨이 대통령인 루터를 죽이고 독재하는 세계입니다. 캐릭터의 죽음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사항에 민감하신 분께는 열람을 권하지 않아요.



저스티스로드 세계관 기반. 슈퍼맨이 루터를 죽이고 철권통치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슈퍼맨이랑 배트맨이 슬슬 대립하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브루딕은 서로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관계인 것이 좋다. 더불어 딕은 어린시절의 우상이었던 슈퍼맨에 대한 믿음을 아직 저버리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 숲스가 조만간 철권통치를 그만둘 거라 생각하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고담이고 블뤼드헤븐이고 유명한 빌런들은 싹 정리당했지만 그 대신 여기저기서 슈퍼맨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겠지. 배트맨은 케이브에 틀어박혀서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며 슬슬 슈퍼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딕은 반대로 메트로폴리스로 찾아가서 어떻게든 숲스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로이스와 지미가 반군세력에 가담한 것을 발각당했음. 슈퍼맨은 무척이나 분노하면서도 슬퍼하며 두사람을 가뒀음. 안그래도 최근 배트맨을 위시한 저스티스로드 멤버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게 느껴져서 심란하던 차였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속상했음. 자신은 단지 분쟁 없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뿐인데.

물론 그에게는 광신적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군대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의 통치를 잘 따라주고 있었음. 문제는 그 대부분의 시민들이 단지 겁에질려서 기계적으로 명령에 따를 뿐이라는 거였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이상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것을 머리좋은 숲스가 모를리 없었음. 한편으로는 울적했고, 한편으로 외로웠음. 안그래도 자신은 외계인이고 이방인이었음. 항상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했었는데, 그러한 숲스가 이 지구에 소속된 일원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동료들과 시민들의 애정과 응원이었던 거임. 그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배척과 공포가 자리잡자 그만큼 숲스는 고독해졌음. 그리고 그러한 숲스 곁에 딕이 있었음.

 

딕은 다른 로드원들과 달리 숲스를 멀리하거나 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슈퍼맨의 철권통치를 광신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음. 딕이 숲스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음. 언제나 그랬듯이 스스럼없이 숲스에게 다가와서 신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거임.

딕은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걱정할 필요 없는 그의 안부를 묻고,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유일한 사람이었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의 선함과 사회의 자정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숲스가 더이상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기를. 저스티스로드 멤버들 및 각국의 정상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금의 이 비정상적인 독재를 끝내주길 간청하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했음. 나는 능력도 없고 보잘것 없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나라도 괜찮다면 당신 곁에서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배트맨도 당신이 마음이 돌리길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이 예전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에게 연락하면 그는 언제든 달려와줄 거라고.

하루종일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분쟁들을 처리한 로드숲이 저녁 늦게 제 요새로 돌아오면, 그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리던 딕이 따스한 손길로 그를 맞이하곤 했음. 그러면 하루종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내던 숲스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리는 거임. 샤워를 하고 나와서 딕이 꺼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딕과 함께 식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하고. 두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언제나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딕에 의해서 회유와 간청과 설득으로 끝나곤 했음. 매번 똑같은 패턴이었지만 숲스는 그게 싫지 않았음. 오히려 즐겁고 좋았음. 자신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잔혹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름의 확신을 갖고 철권통치를 시작했지만 가끔씩은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있는지 회의감이 들곤 했음. 그리고 가끔씩 정말로 인간에게 실망할 때,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끔찍한 범죄를 목격했을 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조차 놓아버리고 싶을 때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는 딕의 목소리를 듣고있노라면 아직은 인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임.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숲스는 딕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했음. 결국 독재를 그만두라는 딕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딕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숲스를 설득하려 했음.

 

한편 고담에 틀어박힌 배트맨으로서는 로드숲 곁에 머무르는 딕이 무척이나 걱정되었음. 매일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에 세월이 수상하니까-_-;;; 저항군들이 슬슬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숲스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당연히 최우선순위의 표적이었음. 배트맨은 딕을 걱정하며 어서 고담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딕은 언제나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음. 당신도 알지 않냐고. 아무리 저항군이 애를 써봤자 숲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고. 지금의 상황을 끝내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숲스를 설득해서 그가 스스로 이 독재를 끝내게끔 하는 것뿐이라고. 당신이 더이상 숲스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면 나를 믿어달라고.

그러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이길, 요즘 슈퍼맨이 티는 안 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아직까지는 그래도 스스로 인류를 보호하고자 이 모든 일을 하고있지만, 저러다가 정말로 안 좋은 선택을 하게될까봐 걱정된다고. 지금의 슈퍼맨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거였음.

결국 배트맨은 한숨을 쉬며 그렇다면 한 달만 더 시간을 주겠다고. 그 이상으로 길어지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들고일어나는 저항세력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한 달 후에는 반드시 고담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함. 딕은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이 요새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통신을 끊었음.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딕은 그 한달의 유예기간 동안에도 슈퍼맨을 설득할 수 없었음.

 

사실 배트맨은 저항군이 전혀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음. 국지적인 소요는 금방 진압되었고, 각 조직들은 긴밀하게 연계하지 못한 채 각개격파당하기 일쑤였음. 이런식으로는 민간인들과 시민들의 희생만 커질 것이 뻔했음. 브루스는 슈퍼맨에게 대항하는 저항군을 규합해서 전면적인 게릴라전을 벌이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음.

딕도 그러한 브루스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고있었음. 그것은 딕이 굳이 슈퍼맨의 곁에 머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음. 스스로를 인질삼아 브루스가 저항군측에 가담하는 것을 억제시키는 거임. 슈퍼맨과 배트맨 두사람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정말로 평화롭게 끝내기는 요원해질 테니까. 가족이자 연인인 브루스도, 멘토이자 우상인 숲스도, 어느 한 명이라도 다치는 건 원치 않았음. 누가 보면 순진하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딕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길 바랐음.

하지만 성과 없이 브루스와 약속한 한 달은 지나가버렸고, 이젠 고담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음. 요새들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한 슈퍼맨이 걱정되긴 했지만. 연인인 브루스 곁을 지나치게 오래 떠나있기도 했으니까. 일단 고담에 들러서 브루스와 대화를 해보고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딕은 숲스에게 고담에 며칠간 다녀오겠다고 얘기했음.

슈퍼맨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딕의 말을 묵살했음. 요즘 저항군들이 기승이라고. 요새를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딕은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음. 나는 배트맨에게 배우며 당신을 보고 자란 어엿한 히어로라고. 쉽게 납치당하거나 하진 않을테니 걱정 말라고. 어차피 브루스가 배트윙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위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정 걱정되면 당신이 나를 고담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않냐고. 케이브에 들러서 겸사겸사 브루스랑 대화도 좀 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숲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을 뿐이었음. 안 돼.

그리고 그제서야 딕의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 가셨음.

 

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유를 물었음. 숲스는 밖은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네가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음. 단정한 얼굴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인간의 것에 비해 지나치게 새파란 눈동자는 웃고있지 않았음.

딕은 처음으로, 어째서 사람들이 슈퍼맨을 두려워하는지 실감했음. 등줄기에 오싹 오한이 들었음. 긴장으로 손끝이 차가워졌음. 딕은 얼어붙은 채 숲스를 올려다보았음. 흉터 하나 없이 커다란 손이 딕의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매만졌음.

다시 말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바라지 않는단다. 안전해질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렴.

 

딕이 고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메트로폴리스에 억류당하자 배트맨은 즉시 뱃가 일원들을 모아 딕의 구출작전을 세우기 시작했음. 그리고 동시에 저항군들을 물밑으로 지원하기 시작함.

일주일에 두 번, 10분간 이루어지는 딕과의 화상통화엔 언제나 슈퍼맨이 감시하듯 함께했음. 그래서 브루스와 딕은 짧은 통화 중간중간에 암호를 섞어가며 진짜 대화를 이어가야 했음. 딕은 내가 어떻게든 슈퍼맨을 설득할테니 제발 섣부른 생각 하지 말라며 브루스를 만류했음. 물론 브루스는 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음. 애초에 한 달이고 자시고 시간을 줄 게 아니라 당장 돌아오라고 했어야 했는데. 싫다고 거부하면 직접 끌고오기라도 했어야... 아니, 처음부터 딕이 메트로폴리스에 머무르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브루스로서는 안그래도 슈퍼맨의 독재를 그냥 방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해서 딕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지자 더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음. 그리고 슈퍼맨 역시 배트맨이 어떻게 반응할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음. 두사람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함.

저스티스로드의 멤버들 및 각 도시의 히어로들이 각각의 편에 갈라섰음. 계엄령이 선포되었음. 이제는 딕이 슈퍼맨을 설득한다 해도 쉽게 상황이 끝나지 않을 거임. 그리고 아무리 배트맨이 대단한 전략가라 한들, 전지전능한 외계인 앞에서 바람앞의 등불일 것이 자명했음.

딕은 걱정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음. 브루스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딕을 겁먹게 했음. 더 안좋은 것은 브루스가 만약에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그 순간 그의 곁에 있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음.

딕은 슈퍼맨에게 울면서 애원했음. 제발 싸우지 말라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브루스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리고 그 눈물이 슈퍼맨 본인조차 스스로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질투를 자극했음.

 

결과적으로 배트맨은 슈퍼맨의 손에 죽었음.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적이었던 고담의 저항군은 배트맨과 함께 말살당했음. 오라클과 로빈을 위시한 저항군 간부 몇명만이 뿔뿔이 흩어진 채 목숨을 건졌을 뿐이었음. 반란군을 진압하는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음.

새벽에 옷을 차려입고 요새를 나선 슈퍼맨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돌아왔음. 진한 화약냄새와 쇠비린내가 났지만 로드숲의 외견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기만 했음. 단지 흰 망토 끝자락에 작은 핏자국이 딱 한방울 튀어있었을 뿐. 창백하게 질린 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음.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덜덜 떨리는 턱 끝에 방울졌음. 슈퍼맨이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딕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주었음.

 

딕은 만 하루를 꼬박 앓았음.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음. 먹는 족족 다 토해내고 물만 간신히 몇 모금 마실 수 있었을 뿐. 이중 삼중의 검문을 거쳐 올라온 의사가 링겔을 처방했음.

의사는 그대로 요새에 머무르며 딕의 건강을 돌보게 되었음. 며칠 사이에 수척하게 살이 빠져버린 딕은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눈물로 보냈음. 멍하게 눈만 깜박이면서 울다가 기절하듯 잠들면 열시간이고 열두시간이고 죽은 듯이 잠만 잤음. 슈퍼맨은 그러한 딕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음. 고담에 거점을 두었던 최대규모의 저항군이 제압된 덕분인지 소소한 소요가 요 며칠간 뜸해서 다행이었음. 슈퍼맨은 내내 딕의 옆을 지키며 대답 없는 딕에게 말을 걸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고 손발을 주물러줬음. 딕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러고도 며칠이 더 지난 후였음.

어느 날, 딕은 퀭하게 살이 빠진 얼굴로 물끄러미 숲스를 바라보았음. 초점없이 멍한 시선이 아니었음. 깜박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분명히 슈퍼맨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음. 딕은 피곤한 듯 금세 눈을 다시 감고 잠들었지만, 숲스는 딕이 뭔가 반응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음.

그리고 다음날 깨어난 딕은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려주었음. 일으켜주세요. 앉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오랫동안 곡기를 끊었으므로 처음에는 주스나 유동식을 조금만 먹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음. 딕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슈퍼맨에게 약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고, 슈퍼맨이 딕의 손발을 주물주물 마사지 해줄 때에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기도 했음. 평소대로 딕의 손발을 주물러주던 숲스는 딕이 인형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어제까지와는 달리 부끄러워하며 손을 슬쩍 빼려고 하자, 그제야 당황하며 딕에게 사과했음. 미안하다고.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그냥 네 손이 차가워서... , 아니. 그게 아니라. 싫었다면 미안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는 숲스에게 딕은 작게 괜찮다고 대답했음. 괜찮아요. 당신 손 따뜻해서 기분 좋아요. 그냥 좀.... 부끄러워서. 요새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딕이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지난 며칠간 딕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손수 옷까지 갈아입혔던 슈퍼맨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음. 두 사람이 침대에 뻘쭘하니 마주앉은 채 어색한 정적이 흘렀음. 그리고 숲스에겐 다행히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딕이었음. 나 씻고 싶은데. 아직 좀 힘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당신이 도와줄래요?

슈퍼맨은 잠시 멍청하게 딕을 쳐다보고 있다가 후다닥 일어나서 욕실로 갔음.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딕을 부축해 욕실로 데려와서는 옷을 벗겨 욕조에 앉히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음. 처음에는 맨정신인 딕의 옷을 벗긴다는 것에 약간 주저했지만, 딕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을 숲스에게 맡겼으므로 망설임은 길지 않았음.

욕조에 들어간 딕은 금방 어지러워하면서 흐물흐물 물 속으로 미끄러졌음. 딕은 약간 민망해하면서 숲스에게 미안하지만 같이 욕조에 들어와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했고, 숲스는 욕조에 들어와 제 가슴팍에 딕을 기대게 하고, 딕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제 팔로 단단히 끌어안았음. 딕은 약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음.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슈퍼맨의 넓은 어깨 위로 흩어졌음. 슈퍼맨은 저에게 기댄 딕을 찬찬히 살폈음. 가벼웠음. 슈퍼맨에게 가볍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아무리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벼웠음. 며칠간 살이 확 빠져버린 덕분에 삐죽 드러난 턱선과 목울대가 도드라져 있었음. 안그래도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홀쭉해진 몸이 안타까웠음. 그나마 뼈대 자체가 균형잡힌 체형이라서 그렇게까지 보기 흉하진 않은 게 다행이랄까.

배트맨과의 싸움은 슈퍼맨으로서도 꽤나 아픈 경험이었음. 한 때 뜻을 같이했던 동료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배트맨이 평범하게 피와 살로 된 인간에 불과했기에, 그를 죽이는 것이 슈퍼맨에게는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음. 다시 말하지만, 고담의 저항군을 진압하는 데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었음...

딕의 맨몸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생각을 이어나가던 슈퍼맨은 제 품안에서 약하게 꿈틀거리는 기척에 정신을 차렸음. 몸을 살짝 튼 딕이 슈퍼맨을 올려다보고 있었음. 병색이 완연한 흰 얼굴이 처연했음.

슈퍼맨은 고개를 숙여 딕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음. 딕은 잠깐 몸을 굳히는가 싶더니 이내 고분고분하게 슈퍼맨의 품안에 안겨왔음. 따끈한 물이 찰박거리면서 욕조 밖으로 넘쳤음. 강대한 크립토니안에게 딕의 무게는 지나치게 가벼웠음.

 

그 날 이후로 딕은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갔음. 일어나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조금씩 방 안을 거닐기도 했음. 딱히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렸던 것은 아니었기에 잘 먹고 잘 쉬고 잘 움직이기 시작하니 회복하는건 금방이었음. 딕은 금방 건강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음.

항상 딕의 곁에 머무르던 슈퍼맨은 딕이 회복되고 나서도 자연스레 한 침대를 쓰게 되었음. 처음 이틀간 숲스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음. 제 팔을 베고 제 가슴팍에 손을 얹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딕의 기척에 온 신경이 곤두세워졌음. 옅은 바디샴푸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음. 그냥 욕실에 있는 것을 같이 쓰고 있을 뿐인데, 딕의 체향과 섞인 향기에선 독특한 단내가 났음.

잠꼬대를 하며 살짝 뒤척이는 소리. 제 가슴팍에 얹어진 손이 꿈이라도 꾸는지 약하게 움찔거리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느낌. 고르고 안정적인 숨소리. 산소로 가득찬 폐포가 부풀어오르고 심장이 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소리. 숲스는 눈을 감고 딕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음미했음. 이 소리를, 이 체취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음..

슈퍼맨과 딕 사이에 좀 더 성적인 접촉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밤이었음. 초저녁부터 곤히 잠들었던 딕이 깼고, 제 옆의 슈퍼맨이 깨어있다는 것을 눈치챘음. 물론 슈퍼맨에게는 매일매일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자겠답시고 옆자리에 누워놓고 깨있는 건 영 이상하니까. 딕은 잠이 오지 않냐고 숲스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고, 슈퍼맨은 대답하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음. 그리고 잠시 후에 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 하는 표정을 지었음.

미안해요. 내가 컨디션이 이모양이라 신경을 못 썼네요. 진짜로 미안.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장난기를 담은 표정은 예전과 똑같았음.

숲스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딕의 손이 꾸물꾸물 슈퍼맨의 옷 속을 파고들었음. 숲스는 당황하며 딕을 저지하려 했지만 말로만 하지 말라고 했을 뿐, 차마 부서질 것처럼 마른 손목을 제 손으로 붙들어 떼어내진 못했음. 그리고 익히 예상했듯이 하지말라는 말 한마디로 딕을 말리는 것은 무리였음.

쉬잇, 가만히 있어요. 내가 지금은 몸상태가 영 아니라서 손으로밖에 못 해주지만, 다음주 주말쯤이면 훨씬 근사한 걸 해줄 수 있을테니까요.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는 것만으로 딕은 슈퍼맨을 무장해제시켰음.

당신도 나를 원한다는 거 알아요. 지난 이틀 밤 내내 참기만 했다니 당신도 참 바보같네요. 당신의 그런 면이 싫은 건 아니지만 말예요.

슈퍼맨은 그날 밤 어떤 것이 더 좋았는지 고를 수 없었음. 딕의 환상적인 손기술이었는지, 아니면 제 귓가에 애교스럽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였는지. 어쨌든 그날 이후로 로드숲과 딕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침대를 같이 쓰게 되었음.

 

절친한 동료였던 배트맨을 잃은 것은 뼈아팠지만, 그대신 딕을 얻었음. 덕분에 슈퍼맨은 그만큼 멘탈을 안정시킬 수 있었음. 루터를 죽이고 행동노선을 바꾼 이래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겪었을 때에도 제 곁에 있어줬던 딕이었음. 물론 마지막 몇 개월 동안은 고담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숲스가 강제로 억류했던 것이지만. 어쨌든 몸과 마음으로 딕과 맺어지고 나니 더이상 고민하거나 회의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음. 슈퍼맨은 묵묵히 범죄자들을 잡아넣고 지구 곳곳의 분쟁들을 정리하고 저항군들을 진압하며 시스템이 안정되도록 최선을 다했음. 그리고 매일 저녁 딕이 기다리고 있는 요새로 돌아왔음.

건강해진 딕은 예전처럼 밝아진 모습으로 숲스를 맞이했음. 더이상 철권통치를 그만두라고 설득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숲스가 하는 모든 일들을 지지해주었음. 그래서 오히려 슈퍼맨은 더더욱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세워 그 규칙 하에 문제들을 처리했음. 가끔 적극적인 폭력을 활용하고 시민들을 좀 더 철저하게 통제할 것을 권하는 측근들도 있었지만 슈퍼맨은 단칼에 거절했음. 쉬운 길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음.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연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았음. 하루하루가 충만했음.

딕은 하루종일 요새 안에서 지냈음.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딕이 저렇게 집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그닥 즐겁지 않을텐데도 그러했음. 가끔씩 슈퍼맨이 밖에 나가고싶지 않냐고 슬쩍 물어봐도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 했음. 그러면서 필요한 건 이 안에 다 있는데 굳이 위험한 바깥으로 나가서 당신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음.

슈퍼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음. 그러한 숲스의 기색을 살피던 딕이 덧붙였음. 내가 정 신경쓰인다면 당신과 함께하는 산책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물론 한가롭게 공원을 걷는 거 말고, 기왕이면 오랜만에 구름 위를 날고싶다고.

살살 웃으며 애교를 떠는 딕에게 못해줄 게 뭐가 있겠음. 슈퍼맨은 딕 말마따나 오랜만에 딕을 안고 한참을 비행했음. 그리고 내친 김에 동물들이 뛰노는 세렝게티 초원까지 날았음. 동물을 좋아하는 딕은 예상한대로 무척이나 즐거워했음. 숲스의 팔에 안겨 소리높여 웃는 딕의 웃음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음. 그리고 요새로 돌아온 그날 밤, 딕은 슈퍼맨에게 당신의 아이를 갖고싶다고 고백했음.

슈퍼맨은 온갖 감정으로 벅차올라 반응조차 보일 수 없었음.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기뻤음. 하지만 어떻게? 딕은 남잔데? 숱하게 몸을 섞었으니 새삼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굳이 엑스레이 비전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딕은 남성이었음. 그것도 매우 훌륭한. 의아해하는 숲스에게 딕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설명했음. 웨인생명공학에서 개발하던 기술이 있다고. 크립토니안인 당신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싶다고. 굳이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싶은 것뿐이니까. 시도해보는 것만이라도 나름 의미있는 일 아니겠냐고.

웨인사의 이름을 듣는 순간 슈퍼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것도 잠시였음. 애초에 누굴 위해서 개발하기 시작한 기술이면 어때. 지금은 슈퍼맨 본인이 딕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음? 슈퍼맨은 뇌리에 떠오른 브루스의 얼굴을 애써 지웠음. 그리고 딕을 끌어안고 딕의 두 손을 모아 입맞췄음. 네 말이 맞다고. 설령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도 네가 날 위해서 우리들의 아이를 가지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 될 거라고. 당연히 찬성이라고. 그리고 고맙다고. 숲스의 대답을 들은 딕은 뺨을 물들이며 슈퍼맨을 끌어안았음.

 

시술은 오래 걸렸음. 인공 장기를 몸 안에 안착시키는 작업이 일년 반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는 동안, 딕은 호르몬 불균형을 필두로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의연하게 견뎌냈음.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슈퍼맨이 더더욱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음.

최고 수준의 의료진들은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했음. 정기적인 진료와 시술을 받을 때마다 딕은 발랄한 농담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전환하려 애썼음. 잔뜩 표정을 굳히고 선 숲스를 진료실 밖으로 밀어내며 당신 때문에 사람들 잔뜩 긴장해있는 거 안 보이냐고, 어차피 엑스레이 비전으로 밖에서도 다 볼 수 있을테니까 괜히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밉지 않게 구박하기도 했음.

결국 인공 자궁이 순조롭게 안착하고 부작용 테스트까지 마친 후, 슈퍼맨과 딕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음.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음. 자연적인 모체가 아닌 인공자궁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인간과 크립토니안 사이의 이종족 결합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음. 그게 아니더라도, 자연적인 남녀간의 커플 사이에서도 불임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음.

숲스는 굳이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내심 기대하고 들떴음은 부정할 수 없었음. 제 행성이 멸망한 이후로 크립토니안이라고는 자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음. 실망할 수 없었음. 실패를 거듭할수록 딕이 우울해했기 때문이었음. 숲스는 제 실망감은 접어두고 딕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

그러한 슈퍼맨도 딱 한 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음. 거듭된 실패로 침울해하던 딕이 어쩌면 내가 당신을 이렇게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내 욕심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당신의 아이를 낳아줄 다른 여자를 찾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음.

숲스는 두사람이 함께 지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딕에게 미친듯이 화를 냈음. 누가 그깟 아이 따위 필요하다고 했냐고. 애초에 나는 멸망한 행성의 유산일 뿐이라고. 2세따윈 기대한 적도 없다고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음. 딕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미안하다고 울기만 했고, 그것이 슈퍼맨의 화를 더더욱 부추겼음.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고. 네 입으로 말해보라고. 슈퍼맨이 추궁하듯 윽박지르자 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당신에게 아이를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대답했음. 그리고 더듬거리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슈퍼맨은 그게 아니라며 화를 냈음. 네가 미안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고. 필요도 없는, 애초에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서 나로 하여금 다른 여자에게 가도록 종용한 것이 네 잘못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이길 애초에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고. 네가 이렇게 우울해할 줄 알았으면 2세를 갖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을 거라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음.

슈퍼맨은 만류하는 딕을 뿌리치고 호르몬 앰플과 각종 유도제와 치료제를 몽땅 쓸어서 박살내고 히트비전으로 태워버렸음. 그리고 주저앉아 우는 딕을 침실로 끌고 들어가서는 처음으로 싫다고 저항하는 딕을 강제로 잡아누르며 밤새 거칠게 안았음.

 

밤새 시달린 딕은 새벽이 되어서야 숲스에게 풀려났음. 파리한 얼굴로 기절하듯 잠든 딕의 얼굴을 슈퍼맨이 조심스레 손 끝으로 쓸었음. 수척해진 모습이 속상했음.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딕을 비난하듯 몰아붙인 스스로가 한심했음.

솔직히 말하면 한 때는, 그러니까 루터가 플래시를 죽이고 자신이 루터를 죽이기 전의 어느 과거에는 슈퍼맨도 단란한 가정을 꿈꿨던 적도 있었음. 그는 로이스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해서 아기를 갖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결심을 굳혔음. 딕이 아닌 그 누구와도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음. 어차피 자신은 크립토니안이니 지구인과의 사이에 혼혈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딕이 아이를 가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그냥 그뿐인 거임. 크립토니안이라는 종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멸종된다면 그게 운명인 거겠지.

로드숲은 창백한 딕을 끌어안았음. 내내 슈퍼맨의 거구에 짓눌린 채 시달린 몸이 안쓰러웠음. 체온이 낮고 숨소리가 약했음. 어쩌면 내일은 하루종일 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슈퍼맨은 온몸으로 딕을 끌어안고 제 몸의 체온을 약간 높였음. 그리고 딕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음.

예상대로 딕은 다음날 하루종일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음. 슈퍼맨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지극정성으로 딕을 돌봤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전적으로 딕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음. 딕이 임신을 계속 시도하고 싶다면 하는거고 이제 그만하길 바라면 그만두겠다고. 나에게는 네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네가 힘들어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했음.

딕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몇 번 더 시도해보고 싶다고 대답했음. 솔직히 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나중에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다고. 그러니까 좀 더 해보겠다고. 그 대신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이 나를 위로해달라고. 슈퍼맨은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음. 다 받아줄 테니까 너도 힘들면 혼자서 참지 말고 나한테 꼭 얘기해달라고. 그러면서 슈퍼맨은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여자 얘기는 꺼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음. 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혀를 쏙 내밀면서 밉지 않게 눈을 흘겼음. 절대 안 해요. 밤새 그렇게 혼났는걸.

그리고 마침내 아기가 생겼을 때, 둘은 무척이나 기뻐했음. 얼마나 기뻐했냐면 의료진들이 보는 앞에서 둘이 얼싸안고 십여분간 말한마디 안한 채 눈물만 흘릴 정도로.

 

로드숲은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하루종일 딕의 곁에만 붙어있고 싶어했지만 딕이 말렸음. 그러지 말라고. 태어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달라고.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로드숲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음. 하필 요 몇년간 잠잠하던 레지스탕스가 요 근래에 기승을 부리고 있었음.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슈퍼맨은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했음.

저항군을 색출하기 위한 통제와 수색이 심해졌음. 초긴장상태의 메트로폴리스는 점점 경직되어갔음. 딕은 자주 병원에 들러 몸 상태를 체크했음. 인공자궁을 이식한 남성임신 자체가 흔치 않은 케이스인데다가 평범한 인간도 아닌 이종족간의 혼혈이었음. 슈퍼맨은 부지런히 저항군을 진압하러 다니는 틈틈이 북극에 있는 연구실에 들러 임신과 출산에 관한 크립톤의 기록을 꼼꼼히 체크했음. 임신은 무사히 초기를 지나 순조롭게 중반기로 접어들고 있었음. 그리고 그 와중에 딕이 저항군 세력에 납치당함.

슈퍼맨은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음. 특히 딕의 일에 한해서라면 더더욱 그랬고, 딕이 임신한 이후로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고가 발생한 것은 내부의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음. 단지 슈퍼맨은 몰랐던 것은 그 내부의 배신자가 다름아닌 딕 본인이라는 사실이었을 뿐.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로드숲이 브루스를 죽인 순간, 딕 역시 어느 한 부분이 망가져버린 거였으면 좋겠다. 며칠간 정줄 놓고 울기만 한 딕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머릿속이 복수로 가득차서 반쯤 미쳐버린 상황이었던 것이 옳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로드숲이 마음을 돌리고 독재를 그만둘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을 배신당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거임. 하다못해 브루스의 최후를 곁에서 지키지도 못했지. 딕에게 남은 건 섬뜩한 원한밖에 없었음.

하지만 자신이 뭘 할 수 있겠음? 인간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배트맨조차 슈퍼맨에게 끔살당했는데. 반란이 진압되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지. 그 어떤 무기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외계인에게 크립토나이트도 없는 자신이 무슨 복수를 할 수 있겠음. 복수는커녕 슈퍼맨에게 억류나 당해서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딕은 슈퍼맨이 딕에게 한 짓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결심함. 딕의 연인을 죽였으니 슈퍼맨의 연인도 죽어야 공평하지. 딕은 숲스가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에서의 관심을 갖고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음.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던 낌새는 슈퍼맨이 딕을 고담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은 순간 좀 더 확실해졌음. 하긴, 그럴만도 하지. 로이스는 슈퍼맨이 철권통치를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로부터 등을 돌렸음. 배트맨 외 몇몇 저스티스로드의 멤버들이 그러했듯이.

슈퍼맨은 그 자신의 강함과는 별개로 점점 고립되고 있었고, 마음을 나눌 상대를 간절히 필요로 했음. 그런 상황에서 변함없이 제 곁에 머무르는 딕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을 거임.

 

슈퍼맨이 정말로 딕을 사랑하게 될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음. 그것도 보통의 사랑으로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최소한 딕이 브루스를 사랑했던 것만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했음.

자신이 그 정도로 슈퍼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런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차피 딕으로서는 가진 패가 없었음. 이거라도 해 보고 아니면 죽어버리지 뭐. 기왕이면 제 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슈퍼맨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고 싶었음.

딕은 이대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은 채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떨쳐내며 몸을 추슬렀음. 아직은 아니었음. 제가 지금 죽어봤자 슈퍼맨은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것만큼의 슬픔밖에 느끼지 못할 테니까. 딕은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억누르며 억지로 유동식을 먹고 몸을 움직였음.

곡예사로서 무대에 오르던 어린시절부터 고담에서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이중생활을 영위할 때까지 거의 평생에 걸쳐 갈고닦은 연기실력이 빛을 발했음. 중요한 것은 억지로 가장하지 않는 거였음. 로빈일 때도, 나이트윙일 때도, 딕 그레이슨일 때도, 딕은 언제나 딕 자신이었음. 어설프게 꾸며서 연기해봤자 저 강대한 외계인의 눈을 속일 수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딕은 원래 슈퍼맨을 좋아했었음.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우상처럼 따랐었음. 철권통치를 시작하고 고독해하는 슈퍼맨을 감히 일개 인간 주제에 연민했었고, 그를 차마 내버려둘 수 없어서 연인인 브루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머물렀었지. 그 선택으로 인해 브루스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어쨌든 원래 애착을 갖고 있었던 상대였기에, 증오심만 살짝 감추면 그를 사랑하는 연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음. 증오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감춰질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희한할 정도로 가능했음. 어쩌면 브루스가 죽는 순간 딕의 어떤 부분도 같이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름. 마치 기계라도 조립하는 것처럼 감정이라는 것의 어떤 한 조각을 임의로 끼웠다 뺐다 하는 것이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때. 딕은 최선을 다해서 슈퍼맨을 사랑하는 연기를 했음. 어쩔 때는 정말 한껏 몰입해서 이대로 이 감정에 휩쓸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듯이 브루스가 죽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음.

 

저녁시간이 채 되기도 전이었지. 느즈막한 여름해가 기울어져 하늘이 금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음. 그리고 슈퍼맨의 새하얀 망토자락 끝에 딱 한방울 떨어져있던 누군가의 핏자국. 브루스를 죽이는 것이 슈퍼맨에게 얼마나 쉽고 하찮은 일이었을지를 생각하면 우스워서 기가막힐 지경이었음. 누군가의 것일지도 모를 그 한방울의 피. 그것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서늘하게 가라앉았음.

슈퍼맨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딕이 몇 번이나 다잡았던 각오와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쉬웠음. 슈퍼맨은 이방인이었고, 이종족이었음.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환호를 한 몸에 받던 시절조차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음. 그리고 딕은 딕 자신이 외로운 사람임과 동시에 어두침침한 케이브에서 고독감을 벗삼아 지내던 브루스와 십여년을 함께한 사람이었고, 결국에는 어둠의 기사를 밝은 세계로 끌어낸 장본인이었음. 외로운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알았음.

그래서 딕은 슈퍼맨이 원하는 것을 줬음. 브루스에게 끈질기게 대시했던 지난 세월들에 비하면 슈퍼맨은 게임으로 치면 이지모드에 불과했음. 당신의 아이를 갖고싶다고 속삭이면서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음. 그렇다고 저열한 기쁨을 느꼈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의무를 다한다는 느낌으로 딕은 슈퍼맨과 2세를 계획했음. 인공자궁을 안착시키는 길고 고통스러웠던 시술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음. 생각만큼 금방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괴롭진 않았음. 결국 거듭된 시도와 실패 끝에 비로소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을 때에도, 딱히 어떠한 감흥이 들진 않았음. 그냥 이제 슬슬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순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슈퍼맨이 고담의 저항군들을 '청소'했을 때, 바바라와 팀은 탈출할 수 있었음. 정확히 따지자면 이미 배트맨을 죽여버린 슈퍼맨이 굳이 그들까지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고 봐야함이 옳겠지만. 슈퍼맨의 오만함이 딕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음. 딕은 바바라와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음. 딕 본인에 대한 납치의뢰를 하기 위해서였음. 바바라는 딕의 계획을 듣고 네가 미쳤냐며 강하게 거부했지만, 딕은 자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는 말로 바바라를 설득했음.

요 몇년간 점점 강화된 철통같은 보안은 딕을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지키기 위한 것이지 딕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슈퍼맨은 딕을 허무하게 빼앗겼음. 뒤늦게야 납치사실을 통보받고 눈이 뒤집혀서 딕을 찾아 나섰지만, 저항군은 번거로운 인질극을 벌일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음. 그래서 슈퍼맨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레지스탕스가 남겨두고 간 딕의 시신 뿐이었음...

 

이번에야말로 슈퍼맨은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음. 폭주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다가 스스로 자해까지 시도한 슈퍼맨은 결국 스스로가 만든 폐허의 한가운데서 탈력해 쓰러졌음. 덕분에 일정 반경 밖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반군세력은 제풀에 나가떨어진 슈퍼맨을 손쉽게 포획할 수 있었음.

슈퍼맨은 저항하지 않았음. 붉은 태양광을 켜둔 지하감옥에 갇힐 때에도 저항은커녕 죽여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음. 언젠가 들었던 딕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와 어느날부터 거기에 더해지기 시작했던 아기의 작디작은 심장소리가 하루종일 그의 귓가에 울려댔음.

 

슈퍼맨은 끝까지 딕의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딕의 모습은 유일하고도 완벽했던 연인으로서의 모습뿐이었음. 그것이 그에게 일말의 위안이었을지 더욱 아득한 절망이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슈퍼은 밤낮없이 붉은 태양광이 켜져있는 감옥 안에서 날짜도 시간도 모른 채 하루종일 꿈만 꿨음. 딕이 살아있고 아기도 무사히 태어나서 정성껏 키우다가 둘째도 임신하고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어쩐지 아이의 얼굴이 흐릿한 거임. 그 좋은 시력으로도 도저히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떻게든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면 딕이 이미 죽었다는 현실이 무섭게 들이닥쳤음. 허무한 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좁은 감옥안에 갇힌 스스로의 처지를 새삼 깨닫는 거임.

몇날 며칠을 멍한 얼굴로 죽은듯이 얌전히 지내던 슈퍼맨은 가끔씩 화들짝 놀랐다가 미친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발광했음. 그래봤자 이미 초인으로서의 능력도 상실하고 몸도 약해졌으니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뿐이었지만. 탈진해서 딱딱한 침대에 늘어진 슈퍼맨은 무력하게 눈을 감았음. 그리고 또다시 행복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할 꿈을 꾸기 시작했음. 영원히 반복될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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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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