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윗 썰정리: 슨딕

DC/썰 2015. 11. 21. 00:14

슨이가 로빈이고 딕이 디스코윙이었을 때 썸을 타는듯 마는듯 했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야 사귀게 된 슨딕이 보고싶다.

 


고담 뒷골목에서 활동하던 레드후드가 다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커플링이 슨딕이므로 마침 지나가던 나이트윙이 그러한 레드후드를 주워야 한다. 다친 제이슨을 케이브에 데려다 놓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잔소리할 브루스며 질색할 팀뎀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딕...

결국 자기가 알고있는 레드후드의 세이프하우스 중 하나로 데리고 와서 적당히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세이프하우스에 들어와보니 평소 슨이의 깔끔한 성격과 달리 여기저기 막 어지러져있는 거임. 무기며 탄창이 잔뜩 쌓여있고 벽에는 고담 지도와 함께 이런저런 사진이며 메모같은 게 잔뜩 붙어있음. 마치 혼자서 갱단들을 상대로 전쟁이라고 치르고 있는 것처럼.

딕은 좀 당황하면서도 일단 제이슨부터 눕혀놓고 응급처치를 한 다음에 제이슨이 수집/분석해놓은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함. 그리고 처음에 짐작한 대로 제이슨이 갱단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레드후드는 적이 많았음. 의외의 사실이라면 뒷골목 밑바닥 인생들 중에 레드후드를 동경하는 녀석들이 꽤나 있다는 것 정도? 그 중에는 말단 조직원으로서 레드후드의 정보원 일을 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음.

제이슨보다 서너살 정도 어린, 아직 어린애 티도 채 벗지 못한 꼬맹이는 정보를 물어와서 레드후드와 접선할 때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반반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곤 했었음. 물론 제이슨은 그 열렬한 시선을 시큰둥하게 넘길 뿐이었지만. 만약 그 옛날에 배트맨에게 주워지지 않았더라면, 제이슨 본인도 저런식으로 뒷골목에서 갱들 시다바리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음. , 그랬다면 적어도 조커한테 두드려맞고 폭사당할 일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제이슨은 자신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삐쩍 마른 꼬맹이에겐 별로 흥미가 없었음. 적어도 녀석이 살해당한 채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버려지기 전까지는 그랬음. 배트맨이 거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중소 갱들은 고담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숱한 영역싸움을 벌여댔음. 그 와중에 발생한 피해자라고 해봤자 어차피 범죄에 빌붙어 기생하는 뒷골목 인생이었고, 마약중독자에 알콜중독자인 피해자의 엄마는 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해할만한 인지능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음. 경찰 수사는 신속하게도 종결되었음.

 

고담에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을 뿐인데, 무언가가 제이슨을 자극했음. 새삼스러운 분노가 치밀어올랐음. 제이슨은 그 길로 즉시 마약거래의 주요 스팟으로 가서 말단 판매책들을 싹 쓸어버렸음. 그리고 마약을 분산시켜놓는 용도로 쓰이는 위장용 가정집 몇 개를 박살냄으로써 갱단을 향한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했음.

문제는 공격당한 갱단이 그 즉시 다른 갱단과 손을 잡고 레드후드를 상대하기 위한 연합을 구성했다는 것이었음. 더불에 보호비 명목으로 레드후드에게 상납금을 내고 있던 찌질이 잡범들까지 뒤통수를 쳤음. 그로부터 보름을 조금 넘긴 오늘까지, 제이슨은 숱한 히트맨들의 표적이 되어 사냥당하는 동시에 그들을 사냥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음.

딕은 찬찬히 세이프하우스의 벽과 테이블에 널린 지도와 종이와 사진들을 살펴보았음. 제이슨이 상대하고 있는 갱단들에 대해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자료들의 양은 고담에서 어지간히 굴러먹었던 나이트윙으로서도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음. 제이슨은 명백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었음. 어쩌면 배트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잠시 머리를 굴리던 딕은 오라클에게 교신을 연결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었음. 배트맨이라면 틀림없이 부나방처럼 전면전을 벌인 제이슨을 질책할 것이 뻔했음. 딕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서 끙끙 앓는 제이슨을 한번 흘끗 쳐다보고, 갱단이 고용한 청부업자들 중 제가 아는 이름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세이프하우스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음. 시곗바늘은 겨우 자정을 조금 넘겼을 뿐이고, 해가 뜨기 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음.

그날 밤, 나이트윙은 소리 없이 어둠속으로 스며들어 청부업자 몇 명을 해치웠음.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세이프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제이슨은 좀 더 상태가 안정되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음.

 


딕은 제이슨이 회복되기 전까지 자신이 최대한 위험요소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이슨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음. 기분이 이상했음. 제이슨이 살아 돌아온 이후로 딕과 제이슨의 사이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음. 우연히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비아냥거리기에 바빴고, 총구와 스틱을 서로에게 들이밀며 쌈박질을 벌이는 건 예사였음. 오늘만 해도 제이슨의 부상이 아무리 심했을지언정 의식만 붙들어매고 있었다면 딕의 도움을 거부했을 거임. 딕 역시 두번 물어보지 않고 쿨하게 제이슨을 남겨두고 떠났을 테고.

딕은 적당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제이슨의 옆자리에 누웠음. 그리고 제이슨과 제 손목을 수갑으로 연결했음. 혹시라도 자신이 잠든 사이에 제이슨이 먼저 깨어나서 떠나지 못하도록. 물론 제이슨이라면 수갑 따위야 쉽게 풀어낼 수 있겠지만 그동안 딕이 깨어나서 제이슨을 제압할 수 있을테니까. 지금의 상태로 혼자 밖에 나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였음. 딕은 일단 한숨 자고 오늘 중으로 케이브에 들러서 강력한 수면제를 좀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제이슨이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이틀간은 매사가 순조로웠음. 갱단들과 레드후드 사이의 전쟁에 나이트윙이 끼어들었다는 정보는 아직 퍼져나가지 않았고, 나이트윙은 브루스에게도 비밀로 한 채 조금씩 상황을 정리해나갈 수 있었음.

제이슨이 깨어난 후 사흘간은 수면제가 큰 역할을 했음. 딕은 제이슨을 주구장창 재웠음. 심지어는 나이트윙 수트로 갈아입고 세이프하우스를 나서기 직전에 자는 제이슨을 일부러 깨워서 수면제를 먹이고 다시 재우기도 했음. 아무렴. 순조롭게 회복되려면 자고로 잠이 최고지.

상처에서의 통증과 수면제의 영향으로 비몽사몽간에 딕이 주는대로 고스란히 약을 다 받아삼키던 제이슨이 버럭 성질을 내며 수면제를 거부한 것은 그러고도 나흘이 더 지난 다음이었음. 오랜만에 잠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깨어난 제이슨은 진심으로 화를 냈음. 길바닥에 쓰러져있던 자신을 딕이 주워와서 치료해줬다는 사실은 이미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음. 자신의 의사에 반해 맘대로 약을 먹이고 며칠동안이나 침대에 쑤셔박혀 잠이나 쳐자도록 만든 딕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음. 그 누구라도, 설령 배트맨이라 해도 자신을 휘두르고 강제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제이슨이 화를 내건 말건 딕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자약할 뿐이었음. 딕이 쟁반에 담아 내민 인스턴트 수프를 뿌리치고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제이슨은 그러나 다음 순간 곧장 딕에게 납작 찍어눌러졌음. 진정하라고. 오른쪽 정강이가 두 군데나 골절됐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뺀지르르하게 웃던 방금 전과 달리 담담했음.

제이슨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틀었고, 등 한가운데와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던 손은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나갔음. 제이슨은 짜증스럽게 제 옷을 탁탁 털어내며 돌아누웠음. 그리고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딕을 향해서 입술 한쪽을 비죽이 말아올렸음. 박쥐아빠가 애지중지하는 귀한 새가 이런데서 시간이나 허비하고 있어서 되겠냐고. 지금 나한테 걸린 현상금이 얼마인지 아냐고. 지금 이 집에 며칠째 머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너도 안전치 못할 거라고. 제이슨은 한껏 목소리를 비비 꼬며 이죽거렸지만, 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음. 다 안다고. 갱단이 연합해서 네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도 알고, 주 경계 바깥에서까지 섭외한 청부업자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고. 며칠간 여기에 드나들면서 추적하는 사람이나 미행이 없는지 철저히 경계했으니 당분간은 좀 더 머물러도 될 거라고. 며칠간 푹 쉬면서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네 몸이 정상이 아닌 건 너 본인이 더욱 잘 알 거라고.

딕은 최대한 오해가 없도록 차분하게 설득했지만, 제이슨은 삐딱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음. 나를 돕는 의도가 뭔데?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다고? 제이슨이 쏘아붙이듯 말했고, 딕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음.

글쎄, 왜일까. 딕 본인도 그게 참 궁금했음.

 

어째서 태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이슨은 당분간 현재의 거처에서 딕과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음. 마음대로 하라며 침대에 다시 벌렁 드러눕는 제이슨의 반응에 딕은 내심 안도했음. 그리고 스스로가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생경해했음. 어쩌면 자신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제이슨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솔직히 말해서 이 피난처에서의 짧은 휴식도 제이슨이 제대로 정신을 추스리는 시점에 당연히 끝날 거라 생각했었는데. 며칠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었음. 딕은 묘한 기분으로 돌아누운 제이슨을 응시했음.

그날 밤, 딕은 밤외출을 하지 않고 세이프하우스에 머물렀음. 제이슨은 지난 며칠간 수면제에 취해 비몽사몽하던 와중에도 딕이 밤마다 거리에 나갔다 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 그래서 제 침대 옆에서 빈둥거리는 딕을 향해 이죽거렸음. 오늘은 왜 안 나가냐고.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내빼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냐고. 일부러 배배 꼬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면서도 제이슨은 딕이 평소처럼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음. 혹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하든지.

하지만 제이슨의 예상과 달리 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제이슨을 쳐다봤다가 눈꼬리를 접으며 눈웃음을 쳤을 뿐이었음. 왜 그래 제이슨. 심심해?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느물거리는 딕의 말투에 제이슨의 표정이 단박에 썩어들어갔음. 짜증을 내며 홱 돌아눕던 제이슨은 갈비뼈 안쪽을 쿡 쑤시는 통증에 큽, 하고 숨을 삼켰음. 그를 거의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내몰았던 부상이 새삼스레 존재감을 과시했음.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딕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제이슨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아픈 티를 안 내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음. 시발시발 속으로 저절로 염불이 외워졌음. 딕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서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유치한 짓거리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꿋꿋이 버텼음.

자자. 잠이나 자자. 제이슨은 몇 겹이나 겹쳐놓은 베개에 머리를 꾹꾹 묻으며 애써 잠을 청했음. 지난 며칠간 딕이 얼마나 주구장창 재워놨는지,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조절해도 잠은 안오고 정신은 말똥말똥해지기만 했음. 이럴 때는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 손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근거없는 오기때문에라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음.

카우치에서 일어난 딕이 보드판이 걸려있는 벽으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음. 보드판과 테이블에는 제이슨이 불철주야 수집해놓은 각 갱단들의 근거지와 히트맨들과 청부업자들과 기타등등에 관한 자료가 빼곡하게 꽂혀있었음. 딕이 펜으로 뭔가를 찍찍 긋는 소리와 몇 개의 종이를 떼어내는 소리와 또 다른 종이를 핀으로 꽂는 소리가 들려왔음. 제이슨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음. 제이슨은 타인이 제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병적으로 질색했음. 하지만 여태 자는 척을 해놓고 이제와서 벌떡 일어나서 내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짜증을 부리면 제 모양새만 이상해질 것 같았음. 미안하다고 사과하긴 커녕 깐죽거리면서 속이나 긁어댈 딕의 반응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음 제이슨은 어금니를 박박 갈며 베개를 꾸욱 움켜잡았음. 딕이 내밀었던 스프그릇을 팽개쳤던 덕분에 저녁나절 내내 비어있던 속이 쓰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슨이 꿋꿋이 유지하고 있던 평정은, 제 옆자리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오는 딕의 기척에 와장창 깨어졌음.

제이슨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또다시 갈비뼈 안쪽으로 쿡 찌르는 통증이 느껴져서 움찔한 것은 딕이 알아채지 못했기를 소망함...) 딕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음. 뭐냐고. 침대도 좁은데 왜 기어들어오냐고. 저기 카우치에서나 자라고.

하지만 딕은 성질부리는 제이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렸을 뿐이었음. 기억 못하나본데 여기에 온 이후로 계속 네 옆에서 잤다고. 그래야 네 상태가 갑자기 변했을 때 내가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리고 순진한(척 하는) 얼굴로 웃으면서 덧붙였음. 걱정 말라고. 나 잠버릇 별로 안 심하다고. 나 때문에 네가 불편할 일은 없을 거라고.

제이슨은 기가 막혀서 저절로 쩍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고, 치밀어오르는 혈압을 꾹꾹 누르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음. 잘 자, 제이슨. 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음. 제이슨은 저도모르게 인상을 썼음.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리나 비켜주고 입발린 소리를 하든가.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딕과 자신은 참 서로 상성이 안 맞는다 싶었음.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린 것에 비해 제이슨은 금방 잠들었음. 지금까지 억지로 자는 척 하면서 뒤척거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깊게 골이 패였던 미간이 펴지고 잔뜩 찌푸렸던 표정도 풀어졌음. 호흡 역시 점점 깊고 느려졌음. 아무래도 부상이나 기타등등의 스트레스로 몸이 많이 축나긴 했던 모양이었음. 기억나지 않는 꿈속을 헤매는 얕은 수면은 아침까지 자다깨다 이어졌음.

그리고 딕은, 잠버릇이 없긴 개뿔이. 제이슨은 몇 번이나 옆에서 치대는 딕 때문에 선잠에서 깨야 했음. 바로 다시 잠들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좁은 침대를 부대끼며 같이 쓰기엔 정말 최악의 상대였음. 아마 지금까지는 수면제 때문에 깊이 잠들어서 못 느꼈던 것뿐이겠지. 제이슨은 내일부터는 필히 딕을 침대에서 쫓아내야겠다고, 만약 딕이 안 나가겠다고 버틴다면 차라리 제가 카우치에서 자야겠다고 거듭 다짐했음.

 

다음날 밤에는 딕이 나이트윙 수트를 입고 거리로 나갔음. 하루동안 맨정신의 제이슨과 함께 지내본 결과 이대로 제이슨이 말없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음. 사실 판단을 내리기엔 근거가 빈약했지만, 왠지 느낌상 그럴 것 같았음. 배트맨 휘하의 자경단원들은 모두가 뛰어난 탐정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딕은 특히 직감이 발달한 타입이었음. 그리고 이번에도 타고난 직감은 딕을 배신하지 않았음. 날이 샐 때까지 갱단에서 고용한 히트맨들을 상대하고 돌아왔을 때, 시큰둥한 말투로 왔냐고 묻는 제이슨의 인사에 딕은 속으로 조금 웃었음.

 


* * * * * * *

 


지금이야 빈말로라도 원만하다 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제이슨이 로빈이었던 시절의 슨딕 두 사람은 제법 사이가 괜찮았음. 솔직히 말하면 괜찮은 정도 이상이었음. 당시의 제이슨이 어렸던 만큼 본격적으로 밀당을 하거나 썸을 타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생길 듯한 조짐은 분명히 있었음.

물론 처음에야 딕은 딕 나름대로, 제이슨은 제이슨 나름대로 '배트맨의 파트너 로빈' 이라는 자리에 엮여서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음. 하지만 딕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집요하게 미워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그 상대가 어린애라면 더더욱) 제이슨은 건방진 꼬맹이이긴 했지만 뒷골목에서 구른 것 치고는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었음. 아니, 어쩌면 뒷골목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포식적인 세력다툼을 벌이는 상류층 자제들보다 순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름. 웨인의 피후견인으로서 소위 있는 집 자식들과 접할 기회가 꽤 있었던 딕으로서는 부유층에 속한 아이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잘 알았음.

처음 필드에서 로빈 복장을 입고 뛰어다니는 소년을 봤을 때는 충격을 받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애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음. 스스로가 로빈임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딕에게 뻐기는 제이슨의 모습은 얄밉다기보단 그냥 좀 미묘한 기분을 들게 했을 뿐이었음. 저런 꼬맹이가 브루스의 성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반, 브루스도 딕 본인이라는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제이슨에게는 좀 더 유연하게 대하겠지 싶은 마음이 반. 어쩌면 제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한 질투가 조금 섞여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고.

어쨌든 몇 번 같이 팀업도 해보고 멘토링도 해주고 필드에서 자주 부딪히다 보니 둘은 꽤 친해졌음. 딕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경단 활동에 대해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밝힐 수 없다는 것에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음. 물론 타이탄즈 팀원들을 위시한 또래 히어로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초능력자인 그들과 어울릴 때는 그 나름대로의 소외감을 느끼곤 했음. 게다가 십여년동안 전적으로 의지하며 함께했던 파트너와 반강제적으로 결별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딕에게 큰 상처가 되었음. 성인이 되었으니 독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도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겸사겸사 잘됐다 치기엔 아무리 낙관적인 성향의 딕이라 해도 데미지가 컸음.

가끔씩 홀로 바람부는 옥상 끝에 서서 어둠이 내린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막막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오곤 했음.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음. 누구라도 좋으니 너는 잘 하고 있다며 격려해주고 이끌어준다면 좀 더 확신을 갖고 내 길에 매진할 수 있을 텐데. 자고로 마음이 힘든 것은 몸이 힘든 것보다 몇 배나 고달프기 마련이었음.

차마 남에게 말 못할 나약함을 극복하게 해준건 의외로 새로운 로빈이었음. 제이슨이 딕을 이끌어줬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었음. 그 반대였음. 딕은 필드에서 제이슨을 만날 때마다 가르치고 조언해주고 이끌어주는 입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흔들리던 마음을 가다듬고 한 사람의 히어로로서 진정하게 독립할 수 있었음. 그리고 생각했음. 어쩌면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브루스도 스스로의 길에 의문을 갖고 혼란스러워 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로빈으로 들였을 적의 브루스는 마치 모든 일에 확신과 해답을 갖고 당당하게 선 성벽처럼 느껴졌지만, 차마 어렸던 딕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자신은 브루스가 배트맨으로서 완성되는 것에 알게 모르게 일조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음.

 

아무튼 딕은 제이슨과 꽤 즐겁게 어울려 다니곤 했음. 물론 제이슨은 대부분의 패트롤을 배트맨과 함께했고, 그래서 두 사람이 단 둘이 만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딕은 느즈막히 생긴 동생을 귀여워했고, 제이슨은 저를 애취급하는 딕의 태도에 무시하지 말라며 펄펄 뛰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딕의 말을 잘 따랐음. 어쨌든 뒷골목에서 아픈 어머니를 홀로 건사하며 물질적이고 심적인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이 살아왔던 제이슨이니 어느정도의 애정결핍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이 간절했지만, 너무나도 바쁘고 불안정한 삶이었기에 스스로의 결핍조차 깨닫지 못한 삶이었으니까. 자신에게 잘해주는 잘생기고 능력 좋고 다정한 형을 좋아하지 않는 게 더 힘들었을 거임.

브루스는, 그리고 딕은 제이슨의 짧은 생애에서 처음으로 롤모델이 될만한 어른이었음. 술에 꼴아있거나 약에 취해있거나 욕설을 지껄이거나 손찌검을 해대지 않는 성인 남성을, TV가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 자체가 제이슨에겐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딕에게 츤츤거리던 제이슨이었지만, 강아지같은 표정을 하고 딕을 졸졸 따르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딕이 제이슨을 리틀윙이라고 부르며 꼬맹이취급을 할 때마다, 제이슨은 사춘기 특유의 오기와 허세를 부리며 곧 너보다 훨씬 크고 강해질 거라고 큰소리를 쳐댔음. 그럴 때마다 딕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부디 내가 반할 만큼 멋진 남자로 자라달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음. 발끈해서 빽빽거리는 제이슨의 반응은 하나같이 뻔해서 놀려먹는 재미가 있기도 했고, 가끔 귀가 빨개져서는 툴툴거리는 모습이 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음.

하루는 나이트윙과 로빈이 조깅코스가 조성된 공원에서 패트롤을 돌게 되었음. 노숙인들을 상대로 한 연속적인 폭력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음. 마침 꽃가루가 날리는 계절이었고,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느리고 더운 바람이 불었음. 민들레처럼 솜털이 폭신폭신한 꽃가루가 나이트윙의 머리카락에 붙었음. 제이슨은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어 꽃가루를 떼어냈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 쪽을 돌아보는 딕과 눈이 마주쳤음.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제이슨의 귀가 반박자 늦게 확 물들었음.

, 아니, 난 그냥.... 꽃가루가 붙어서. 제이슨은 제가 왜 당황했는지도 모른 채 어물어물 변명을 주워섬겼음. 제이슨을 바라보던 있던 딕의 눈동자가 이내 슬쩍 눈꼬리를 접으며 휘어졌음.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가 나네, 리틀 윙. 담배 피웠어? 딕이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물었고, 제이슨은 허둥거리며 제 팔이며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음. 당황한 얼굴의 제이슨이 냄새 많이 나냐고 물었고, 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음.

머뭇거리던 제이슨은 '배트맨에게 말 안할거지?' 하면서 조심스럽게 딕의 눈치를 살폈음. 딕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 시간을 좀 끌다가 제이슨이 안달복달할 즈음에서야 웃으며 말 안한다고 대답했음. 딕이 브루스한테 이를까봐 심장 쫄려했던 제이슨은, 딕으로부터 몇 번이나 말 안한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원래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담배도 좀 필 수 있는 거라고 허세를 부렸음. 딕은 여자애들이 키스할 때 싫어할 거라고 대꾸했고, 제이슨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딴 계집애들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그러냐고 대답했음. 딕은 작게 웃어 넘겼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음.

사람 없는 공원에는 별다른 범죄의 조짐이 느껴지지 않았음.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자리를 옮겨볼까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제이슨이 불쑥 물었음.


"너는 어때?"

"? 뭐가?"

"담배 말이야. 너는 담배피는 여자랑 키스하면 어떤데?"


뜬금없는 질문에 딕은 뺨을 긁적거리며 도록도록 눈을 굴렸음.


"글쎄.... 나는 별로. 상관 안하는데."


잠깐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을 때, 제이슨 본인은 티가 안 났다고 생각했겠지만 내심 안도하는게 눈에 보여서 딕은 속으로 조금 웃었음.

 


* * * * * * *



하루는 케이브에 들른 나이트윙이 배트맨과 다툰 적이 있었음. 나이트윙은 화를 내다가 침울해 하다가 결국 낙담한 채 케이브를 뛰쳐나갔고, 제이슨은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걸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음.


"할 말 있나, 로빈."


배트맨이 딱딱하게 물었고, 제이슨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음. 배트맨과 로빈은 함께 패트롤을 돌았고, 제이슨은 케이브로 복귀하기 직전에 잠시 볼일이 있다며 브루스와 헤어졌음. 브루스는 잠시 묵묵히 제이슨을 쳐다보다가 늦지 않게 돌아오라며 배트모빌의 창을 올리고 가속 페달을 밟았음.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새까만 차체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음.

제이슨은 딕과 둘이서 자주 만나던, 정확히 말하면 딕이 자주 가던(그래서 제이슨이 찾아가곤 하던) 한 고층건물의 옥상으로 향했음. 그리고 가고일상에 걸터앉은 딕을 발견했음. 멍하니 야경을 내려다보는 나이트읭의 모습은, 새삼 배트맨의 넓고 단단한 어깨에 비하면 작게 느껴졌음. 제이슨은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져서 머뭇거리다가 주춤주춤 딕의 옆으로 다가갔음. 익숙한 발소리를 듣고 슬쩍 뒤를 돌아본 딕이 살짝 미소지었음. 잘만 떠들고 깔깔거리던 평소와는 다르게 어쩐지 기운없어 보이는 미소였음.


"안녕. 리틀 윙."


제이슨은 어색하게 고개만 한번 끄덕하고 딕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음. 딕이 다시 야경으로 시선을 향했고, 제이슨은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뻘쭘한 기분에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었음.

그렇게 하염없이 딕의 옆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인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지평선부터 뿌옇게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거리에 자동차가 한두 대씩 늘어나기 시작했음. 제이슨은 흘끔 딕의 옆모습을 쳐다보았음. 마스크를 쓰고있긴 했지만,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긴 얼굴이었음. 아니 뭐, 미남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는 있었는데, 처량맞게 눈꺼풀을 내리깐 옆얼굴은 의외로 예쁘장하게 보이기도 했음.

일단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하늘의 농도 역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음. 이제 슬슬 가봐야할 시간이었음. 제이슨은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만 가봐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음. 여태 멍청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도시만 내려다보던 딕이 제이슨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음.


"고마워."


쌀쌀한 새벽공기에 살짝 잠긴 목소리였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가감없이 느껴졌음. 제이슨은 내심 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딕이 저렇게 말하면서 저런 표정으로 웃어주니까. 어쩐지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가슴 안쪽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음.

그래서 제이슨은 충동적을 딕에게 키스했음. 키스라고 해봤자 그냥 입술만 짧게 겹쳤다가 떨어졌을 뿐이었지만. 딕의 입술을 생각보다도 말랑했고, 표면이 살짝 말라있었음.

하지만 제이슨으로서는 그 감촉을 음미하거나 할 여유도 없었음. 정말로, 진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터라,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을 즈음에는 혹시 비웃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전전긍긍 했을 뿐이었음. 그리고 의외로,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딕은 가만히 제이슨을 응시하기만 했음. 약간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불쾌하거나 싫어하는 낌새도 없었고, 제이슨을 비웃는 기색도 없었음.

 

그 날, 제이슨은 제가 무슨 정신으로 케이브까지 돌아왔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음. 알프레드가 늦었다며 은근히 잔소리를 했지만 그 역시 듣는둥 마는둥 했음.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온통 시끄러웠음. 밤을 꼬박 새버려서 피곤하긴 한데, 이리 눕고 저리 돌아누워 봐도 잠은 오지 않았음. 다음번에 만났을 때 딕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았음.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딕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제이슨의 예상이 맞았음. 딕은 딱히 그날 새벽의 일을 들먹이지도 않았고, 보이지 않는 벽을 치며 거리를 두지도 않았음. 그냥 예전처럼 제이슨을 대했음... 이라고는 해도, 100퍼센트 예전과 같았느냐고 묻는다면....글쎄? 대부분은 평소와 같았지만, 아주 가끔씩. 뭔가 간질간질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불었음.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가 있긴 있었음.

어쨌든 딕은 어른이었고, 제이슨은 어렸음. 어린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금껏 빈곤하고 고단한 삶에 치여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이 문제였음. 최소한의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살다가 갑작스레 만난 상대를 동경하고 좀 더 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음. 제이슨은 좀 더 자라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배우며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음.

딕은 기다릴 수 있었음. 제이슨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고 교류하고 감정을 나눈 이후에도 자신을 원한다면 그 때는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음... 결국 그런 날은 오지 않았지만.

 


* * * * * * *



제이슨이 죽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레드후드라는 이름의 자경단, 혹은 빌런이 고담에 나타났음. 그리고 딕은 레드후드의 정체가 밝혀진 날을 기억함. 케이브로 돌아온 브루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참담했음.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브루스의 손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설핏 떨리는 것처럼 보였음.


"."


무겁고 침통한 목소리에 압도되어서, 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음.


"....제이슨이...."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브루스의 모습은 평소의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머뭇 내밀어진 손은, 차마 브루스의 어깨에 닿지 못하고 거두어졌음.

 

이르건 늦건 나이트윙이 레드후드와 부딪히게 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음. 딕에게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음.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제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었음. 나이트윙은 레드후드를 상대함에 있어서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고 가차없이 굴었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상대하는 것이 딕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었음. 제이슨이 로빈이었던 기간은 헤아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짧았음. 둘 사이에 있던 추억이라고 해봤자 고작 한 줌에 불과했음. 두 사람은 크게 부딪히고 싸운 적조차 없었음. 그냥 사이좋게만 지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음. 딕은 제이슨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었음.

내가 사랑했던 소년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 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나마의 추억까지 흙발로 짓밟는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조커는 제이슨을 죽였고, 라자러스핏은 부서진 육신을 되돌려주는 대신 제이슨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버렸음.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서 고담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거임. 자신은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괴물이 되어버렸는데. 제가 자란 이 미친 도시는, 배트맨은, 딕은, 하다못해 조커까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음. 제 자리는 저의 대체품인 꼬맹이가 버젓이 차지하고 있고. 바뀐 게 있다면 자신을 향하는 딕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 뿐이었음. 나라고 이 꼴을 보겠다고 돌아온 것이 아닌데. 애초에 죽음도 제 의사가 아니었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제이슨의 의사가 아니었음. 하물며 너에게까지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야, 살아 돌아오고 싶지도 않았음.

 


* * * * * * *

 


현재로 돌아와서, 딕은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고 고개를 돌려서 잠든 제이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들러붙어 있었음. 열은 없었는데. 부상의 통증 때문인지 악몽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음.

다친 제이슨을 돌보면서 딕은 제이슨의 잦은 악몽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이것 역시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제이슨이 원래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었는지 딕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음. 단지 제이슨이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 같으면 옆에서 제이슨을 슬쩍 건드리거나 흔들어서 깨울 뿐이었음. 제이슨은 딕의 잠버릇이 험해서 번번이 제 수면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제이슨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제이슨 본인이었음.

딕으로서는 제이슨을 괴롭히는 악몽이 도대체 어떤 것일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음. 푹 쉬어야 다친 게 빨리 나을 텐데. 그나마 잠든 순간조차도 편히 쉬지 못하는 제이슨이 새삼 안쓰러웠음.

거리에는 아직도 레드후드를 노리는 청부업자들과 갱스터들이 눈을 희번뜩거리고 있었음. 혼자서 무슨 적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고 다닌 걸까. 기분이 영 좋지 않았음. 요새는 그나마 딕과 제이슨의 관계가 좀 나아진 편이었지만 제이슨이 돌아와서 레드후드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무렵에는 딕 자신도 제이슨에게 있어서 적이나 다름없었을 거임.

문득 제이슨이 약하게 신음하며 뒤척거렸고, 딕은 물수건이라도 만들어 와서 땀이라도 닦아줘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음. 주섬주섬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제이슨이 딕의 팔목을 붙들었음.

팔을 부러뜨릴 것 같은 악력에 저도모르게 신음소리를 낸 딕은 반사적으로 제이슨을 뿌리치려 했음.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동공이 수축한 채 공포에 질린 제이슨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음.

딕은 거듭된 훈련으로 뼛속까지 새겨진 방어행동을 가까스로 멈췄음. 식은땀으로 범벅된 제이슨은 핏기 없는 얼굴로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음.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는 고통과 공포와 절망의 그림자에 압도당한 딕은 차마 말문도 열지 못하고 제이슨을 마주보기만 했음.

초점 없이 떨리는 눈동자에 서서히 이지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순간은 그러나 자기혐오와 괴로움으로 가득했음. 제이슨은 제가 딕의 팔목을 움켜잡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딕을 붙잡은 손을 떨쳐냈음. 창백한 눈가로 벌겋게 피가 몰렸음. 씨근덕거리기 시작한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너른 어깨가 들썩였음. 딕은 지금 이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제이슨이 깊이 상처받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음. 아니, 상처는 언제나 제이슨을 갉아먹고 있었음. 단지 지금껏 철저히 숨겨왔던 그것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딕 앞에 드러냈을 뿐.

딕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무작정 제이슨을 끌어안았음. 순간 뻣뻣하게 경직됐던 제이슨이 이내 딕을 밀쳐내려 했지만 딕은 필사적으로 제이슨을 부둥켜 안았음.


괜찮아, 제이슨.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딕 본인조차도 몰랐음. 그냥 당장 제이슨을 어떻게라도 지탱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음. 지금까지 딕은 과거 로빈이었던 제이슨과 살아돌아온 제이슨이 동일인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음. 하지만 악몽에 시달리는 제이슨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지금의 제이슨에게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꼬맹이가 남아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음.


딕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리던 제이슨은 딕의 입술이 눈가에 닿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음. 괜찮아 제이슨. 이제 괜찮아. 딕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음. 딕의 입술이 닿은 눈시울이 뜨거웠음.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울분을 삼켰음. 네가 뭘 알아. 너 따위가 뭘 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딕의 입술이 눈가에서 뺨으로, 그리고 제이슨의 입술로 옮겨갔음. 연한 살갗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길 두어번 반복하던 딕은 살짝 제이슨의 아랫입술을 머금었음. 벌어진 틈새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온 혀가 제이슨의 치아를 훑었음. 악몽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휘저어진 머릿속으로 축축하고 말랑한 살덩이가 닿아오는 감각만이 선명했음. 반응 없이 딕의 키스를 받아내고만 있던 제이슨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딕의 등허리를 받쳤음. 생소한 무언가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늘씬한 등허리를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리던 손바닥은 이내 딕을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겨 안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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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

트윗 썰정리: 브루딕 PWP

2015. 11. 2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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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딕으로 기억잃은 딕을 데리고 도망친 제이슨이 보고싶다. 배트맨이나 저스티스 리그가 찾지 못하도록 아예 다른 지구로 넘어가버려도 좋겠다. 대규모 재해상황이 벌어져서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각지의 히어로들이 총력을 기울이던 중 딕이 크게 다쳤는데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주워온 거였으면 좋겠다.

 

원래 두 사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으면 좋겠군. 조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가 되돌아온 제이슨은 배트맨을 위시한 뱃가 구성원들을 증오하고 있었고, 딕은 딕 나름대로 제이슨이 하도 이놈저놈 죽이고 돌아다니고 + 딕 본인은 둘째치고서라도 팀과 데미안까지 위협하고 + 사사건건 난입하고 깽판을 치니까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제이슨의 빨간 헬멧만 눈에 들어오면 으르렁거리면서 경계할 듯. 그런 딕의 태도가 제이슨을 더더욱 부채질해서 두 사람 사이가 말도 못하게 살벌했으면 좋겠다. 특히 제이슨은 딕 자체가 밉다기보단 브루스가 제일 아끼는 것이 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딕을 망가뜨림으로써 브루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은 거고, 딕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제이슨을 가차없이 대하겠지.

 

뱃가와 레드후드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점점 고조되고 있었음. 그러한 와중에 동해안의 주요도시를 휩쓰는 재난상황이 발생했고, 크게 다친 나이트윙을 레드후드가 발견했음. 의식 없이 건물 잔해 사이에 방치된 나이트윙을 내려다보며 레드후드는 소리없이 전율했음.

딕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살벌하게 날을 곤두세우며 신경을 긁어대곤 했었음. 그 재수없는 면상을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주고 팔다리를 작신작신 부러뜨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 제이슨이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할 때마다 차갑게 코웃음을 치는 딕을 볼 때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음. 그리고 지금 나이트윙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의식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음. 마스크까지 박살나서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지만 어차피 여기저기 멍들고 피칠갑이 되었으니 누군가가 발견하더라도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싶었음. 제이슨은 묘하게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낌.

제이슨이 생각하시에 배트맨 이하 고담의 자경단원들은 하나같이 역겨운 위선자들이었음. 그중에서도 배트맨이 각별히 애지중지하는 나이트윙이라면 두말 할 여지조차 없었고. 재수없고 짜증나는 나이트윙이 피떡이 된 채 널부러져있는데, 그 한심한 꼬라지를 보면서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음.

하긴, 박살내도 내 손으로 짓밟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제이슨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나이트윙에게 다가갔음.

신발 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아도 나이트윙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음. 쭈그리고 앉아서 목에다가 손가락을 대보았지만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음. 비릿한 쇠냄새가 물씬 풍겼음. 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갑을 벗고 다시 손 끝을 딕의 목에 가져다 댔음. 아주 미약하고 느린 맥박이 느껴졌음.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니 꼬라지가 참 가관이었음. 거대한 괴수가 껌처럼 씹다가 뱉어내면 이런 몰골이 되려나. 하여간 아무리 날고기는 히어로라고 해봤자 초능력이라곤 개뿔도 없이 피와 살로 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지 싶었음.

제이슨은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음. 폐허에 가깝게 초토화된 거리에는 빈집털이범들이나 갱단 끄나풀같은 놈들만 몰려다니며 상점이나 공공기물을 때려부수고 있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음. 어떻게 할까. 맥박과 호흡은 약하지만 안정되어 있는데. 네가 출혈과 저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배트맨이 제가 아끼는 골든보이를 찾아내는 것이 빠를까. 제이슨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사이에 쇼윈도가 박살난 상점을 털던 잔챙이들 몇몇이 레드후드를 알아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음.

 

결국 제이슨은 딕을 제 세이프하우스 중 하나로 데리고 왔음. 중환자를 이송하는 조심스러움은 없었지만 어차피 죽으면 제 팔자인 거고. 살 놈이면 어떻게든 살아나겠지. 제이슨은 딕을 데려와 응급처치를 하고 제 침대에 눕혔음.

시간은 무던하게 흘러갔음. 딕의 상태는 악화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음. 무엇보다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음. 제이슨은 그러한 딕의 곁에 머물렀음. 문자 그대로, 머무르는 거였음. 중환자인 딕을 마냥 방치해두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극진하게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음.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걸 보면서 상처가 아물고 있나보다, 열이 나면 열이 나나보다, 낮아졌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돌아오나보다, 그냥 그러고 말았음. 물론 그때그때 필요한 의료적 처치는 꼬박꼬박 해주고 있었지만. 막말로 당장 딕의 심장이 멎어버려도 그냥 그러려니 싶을 것 같은 기분이었음. 처음 이틀 정도는 지금쯤 딕의 실종을 알게 되었을 배트맨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려면 어때 싶었음.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갔고, 딕이 깨어났음.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반듯한 미간이 찡그려졌음. 링겔의 투약량을 조절하고 있던 제이슨은 못박힌듯 그자리에 멈춰서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촘촘한 속눈썹이 떨리는가 싶더니 창백한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열렸음. 제이슨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딕의 얼굴을 응시했음. 제이슨 본인도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딕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푸른빛이 선명했음. 초점 없이 무방비하게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에 서서히 이지가 깃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빈말로라도 딕과 사이좋다고 할 수 없는 제이슨에게조차 기묘한 충격으로 다가왔음.

나에게 독한 말을 쏘아붙일 때에도 네 눈동자는 그렇게 새파랬겠지. 그러고 보니 무기질적인 화이트렌즈를 통해서가 아닌 딕의 맨눈을 마주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음. 제이슨은 물끄러미 딕을 내려다보았음.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 깜박거리던 딕의 눈동자가 간신히 제이슨을 올려다보았음. 딕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타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에서는 바람소리만 새어나왔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딕의 입안을 적셔주기 위해 물을 가지러 갔음. 그리고 거즈에 물을 적셔 돌아왔을 때, 딕은 다시 잠들어있었음.

 

일단 의식을 되찾고 나니 회복은 순조로웠음. 딕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딕이 정신을 차린 후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음. 그 때까지 기계적으로 딕을 간호하던 제이슨은, 묽은 유동식을 조금 먹고 자리에 누운 딕이 여기는 어디며 당신은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순간 동작을 딱 멈추었음.

무심하게 쟁반을 들고 일어나던 제이슨은 저도모르게 딕을 휙 돌아보았음. 안면근육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음. 가슴 한 쪽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음. 아니, 어쩌면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 같기도 했음. 거의 뚫어져라 노려보는 제이슨의 시선에 딕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제이슨으로서는 그러한 딕의 반응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음.

제이슨이 딕을 발견해서 제 세이프하우스로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 따위는 없었음. 그저 우연히 딕을 발견했을 뿐이고, 제 선에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은 그에 맞는 처치를 했을 뿐이었음. 딕이 점점 회복되어 의식을 되찾았을 때조차도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음. 평소의 그답지 않은 느슨함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음. 이번 일을 기회삼아 무언가를 해볼 생각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신창이가 된 나이트윙은 제이슨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음. 제 팔자가 죽을 팔자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나이트윙을 치료하면서도 제이슨은 내내 시큰둥하기만 했음.

그런데, 딕에게 기억이 없다는 거임.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음. 배트맨이 혈안이 되어서 딕을 찾고있을 것이 분명했음. 지금 이 순간에도 추적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을 터였음.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이슨은 배트맨이 찾아오건 메트로폴리스의 빅블루가 찾아오건 거리낄 것이 없었음. 엉망으로 다쳐서 적에게 구조된 나이트윙과, 그런 나이트윙을 이제서야 찾아낸 배트맨의 무능력함을 실컷 비웃고 조롱해주며 참담해하는 배트맨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저열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었음. 자존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속칭 고담의 히어로들을 만날 때마다 두고두고 들먹이며 조롱해줄 건덕지가 생기는 건 덤이었고. 이래저래 제이슨으로선 아쉬울 것이 없었음.

하지만 지금은, 기억 잃은 딕을 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음.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음. 딕은 제 수중에 있었음.

 

제이슨은 나이트윙이 얼마나 완고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음. 이번 일을 빌미로 다시는 제이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조건을 내건다 해도 나이트윙이 그것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만무했음. 아무리 목숨을 빚졌다 해도 딕은 사사건건 제이슨을 방해하려 할거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들을 보호하겠답시고 제이슨에게 날을 세울 테고, 살인을 저지르려 하면 훼방을 놓고 일을 파토내려 들 것임에 틀림없었음.

그렇다고 제이슨이 부상당해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나이트윙을 감금하고 괴롭히고 폭행한다 해도, 그는 꺾이지 않을 거임. 다친 상태의 나이트윙을 망가뜨리고 짓밟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 결국 제이슨이 기껏 나이트윙을 주워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번거롭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치료나 해주고, 박쥐가 나이트윙을 찾으러 오건 나이트윙이 알아서 기어나가건 제 갈길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밖에 없었음.

하지만 나이트윙이 아닌, 기억이 없는 딕 그레이슨이라면 달랐음. 제 수중에 있어도 결코 제것이 되어주지 않을, 그래서 결국에는 그냥 풀어줘야 할 새가 아니었음. 제이슨은 전율했음. 지금이라면. 이대로 박쥐의 시야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딕의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던 제이슨은, 밖에서 들려오는 파열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음. 불안한 표정의 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음. 창밖에선 바이크를 탄 갱단원들이 폐허가 된 거리를 질주하며 소란을 피워대고 있었음 제이슨은 다시 딕에게로 고개를 돌렸음. 아직 다친게 다 낫지 않아 여기저기 멍들고 파리한 얼굴이 제이슨을 올려다보고 있었음.

"괜찮아 딕. 겁먹게 해서 미안해. 봐서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은 우리가 형제라는 것만 말해둘게 너는 많이 다쳐서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여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아.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줘."

미리 준비하거나 연습했던 것도 아닌데,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은 술술 잘만 나왔음. 딕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슨이 딕의 어깨를 놓고 일어나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제이슨의 소매를 붙들었음. 제이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을 생경한 기분으로 마주보다가, 딕의 손등에 조심스레 제 손을 겹쳤음.

"괜찮아. 금방 올게. 너를 차에 태워서 이동하려면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제 소매를 잡은 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의 이마에 입을 맞췄음. 놀란 듯 파란 눈을 크게 뜨는 딕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앗차 싶었지만, 딕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적당히 무마했음.

급하게 방을 나서는 제이슨의 발치에 플라스틱 쟁반이 채였음. 제이슨은 짧게 심호흡을 했음. 심장이 쿵쿵 울렸음. 박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추적의 단서가 될만한 흔적을 지워야 했음.

 

제이슨은 딕과 함께 다른 도시로 옮겼음. 딕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차량을 이용한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음. 새로운 가명과 현금으로 적당한 맨션을 수배해서 빌린 제이슨은 고작 몇시간 흔들리는 차를 탄것만으로 상태가 악화된 딕을 정성껏 돌보았음. 어쨌든 딕은 젊었고, 제이슨은 부상자를 돌보는 것에 의외로 괜찮은 재능을 갖고 있었음.

딕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끝장나버릴 수 있는 상황이건만, 제이슨은 개의치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음. 딕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혹시 기억이 돌아올 조짐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캐물었다가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음.

흑발에 푸른눈을 가진 건강한 체격의 두 청년들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형제로 받아들여졌음. 젊은 총각이 아픈 형 돌보느라 고생한다는 것이 수다떨기 좋아하는 근처 젊은 엄마들의 중평이었음. 제이슨은 특유의 날카로운 살기를 갈무리한 채 양의 탈을 쓰고 주변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음. 딕의 회복은 순조로웠고, 두어달이 채 지나기 전에 부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음.

그동안 제이슨과 딕은 무척이나 친밀해졌음. 딕은 자신에게 제이슨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미안해했고, 제이슨은 그러한 딕에게 괜찮다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어른스럽게 대답해주었음. 외상은 거의 아물었지만 딕은 아직까지도 잦은 두통에 시달렸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거나 하면 금세 어지러움을 호소했음. 자연스레 신문이라던지 인터넷 기사같은 것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소소한 사실조차 제이슨에게는 유리한 측면이었음.

현금은 충분했지만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제이슨은 적당한 파트타임잡을 구했음. 딕을 집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좀 걱정되었지만 원체 사교성이 좋은 딕은 금세 이웃 주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옆집 아주머니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 어설프게 만든 스페인식 빠에야가 식탁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올리며 제이슨을 맞이하는 생활은 나쁘지 않았음.

 

"우리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나봐."

어느 날 저녁,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마친 후 소파에 늘어진 딕이 문득 말을 꺼냈음.

"그건 갑자기 왜?"

제이슨이 무심하게 물었고, 딕은 그냥, 하고 대답했음.

"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해."

딕은 소파 아래 러그가 깔린 바닥에 앉아있는 제이슨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어. 너는 나한테 무척이나 소중한 동생이었나봐."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음. 그렇다고 굳이 딕을 밀어낸 것도 아니었지만.

 

제이슨은 나날이 심란해졌음. 무방비하게 저에게 웃는 딕을 마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하면서도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음. 제이슨을 경계하지 않는 딕을, 제이슨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딕을, 제이슨을 유일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웃고 말하고 친근하게 부대끼는 딕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어째서 그가 그토록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음. 파란 눈동자에 친애를 가득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음.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형제라고 말해두는 게 아니었는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인 과거의 자신이 한심했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제이슨을 딕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제이슨이 일을 쉬는 어느 휴일날, 딕은 제이슨에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고 넌지시 물었음. 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이슨의 표정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엔 애매했지만, 빈말로라도 편해보이지는 않았음. 문득 제이슨이 딕의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딕은 싫은 기색도 없이 눈을 감으며 제이슨의 손바닥에 기대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음. 뺨에 닿는 제이슨의 손은 크고 거칠었음. 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이슨은 어쩐지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음.

"고민거리가 있으면 혼자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줘. 둘 뿐인 가족이잖아. 숨기려고 하지 말아줘."

딕이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제이슨은 씹어뱉듯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고 대답했음.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당황한 딕이 뭐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홱 잡아당기며 얼굴을 바싹 끌어당겼음. 딕은 반사적으로 제이슨을 뿌리치려 했지만, 제이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딕의 손목을 붙들어 제 쪽으로 당겼음.

가만히 있으라고. 잠시만 피하지 말아보라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어쩐지 절박하게 느껴져서, 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껌벅거렸음. 제이슨이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을 때도 딕은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음.

"기억나?"

제이슨이 물었고, 딕은 멍청하게 제이슨을 쳐다보고 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제이슨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키스했음.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등줄기를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주자 체리보이처럼 잔뜩 긴장한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음. 마시멜로처럼 말캉한 혀는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거나 피하지도 않았음. 제이슨은 아예 이대로 딕을 쓰러뜨려버릴까 고민하다가 눈에 띄게 긴장한 딕의 모습에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음.

"우리는 같은 집에 입양된 고아였어.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의 이런 관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왔던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제이슨이 찬찬히 설명했고, 놀라고 당황한 얼굴의 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음. 제이슨의 시선이 딕의 입술을 향했고, 딕은 그제서야 뒤늦게 얼굴을 붉혔음.

"미안해, 제이슨. 기억나지가 않아."

디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제이슨은 어른스럽게 괜찮다고 대답했음.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딕의 모습에, 제이슨은 은밀한 만족감을 느꼈음. 상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따윈 자리할 구석이 없었음.

 

그 날 이후로 제이슨은 천천히, 그러나 명백하게 형제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스킨쉽을 시작했음. 퇴근해서 돌아온 제이슨을 반갑게 맞이하는 딕을 마주 끌어안으며 늘씬한 등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분명한 성적 함의가 담겨있었음. 딕은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는듯 했지만 이내 적응해나갔음. 그리고 하루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저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미안해했음.

제이슨은 혹시라도 자신이 딕에게 하는 스킨쉽들이 불쾌하거나 싫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딕에게 당부했음. 네가 불편해하면 그 즉시 멈추겠다고. 그리고 그런 제이슨에게 딕은 싫지 않다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오히려 책망하듯 대답했음.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네가 닿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냐고. 어린애처럼 자신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었음. 딕이 종알거리면서 입김이 닿은 귓불이 근질거렸음.

목 안쪽에서 들끓는 뜨거운 덩어리를 꾸욱 삼킨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살짝 밀어니며 애써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음. 저를 올려다보는 딕의 표정은 머릿속이 꽃밭이라도 되는 양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음.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을 잡아당겨서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음. 등과 허리를 더듬어 내려간 손아귀가 엉덩이를 주무르듯 움켜쥐더나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음. 맞붙은 고간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느껴져서, 딕은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음. 거듭 입술을 겹치며 딕을 어루만지던 제이슨이 간신히 떨어져나가서는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섬주섬 변명하는 제이슨을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던 딕은, 이내 제 쪽에서 제이슨을 잡아당기며 어색하게 끌어안았음. 제이슨이 다시금 사과했고, 딕은 고개를 저었음. 좀 놀랐을 뿐이라고.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더 미안하다고. 그냥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거라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이후로는 딕에게 일체의 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접촉을 하지 않았음.

 

두 사람은, 겉으로는 예전의 형제같은 관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음. 시덥잖은 식사준비를 하면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제이슨이 파트타임 일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 즈음에 맞춰서 딕이 산책 겸 마중을 나가기도 했음. 게임기를 TV에 연결해놓고 레이싱 대결을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서로 빈정상해서는 옥신각신 쌈박질을 벌이기도 했음.

그날도 다르지 않았음. 대전 격투게임이 실제의 우격다짐으로 번져서 신나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어느 날, 물끄러미 딕을 쳐다보던 제이슨이 중얼거렸음. 안고 싶어. 발라당 드러누운 채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던 딕이 제이슨을 마주보며 해사하게 웃었음.

"그래."

쾌활하게 대답한 딕이 두 팔을 벌려 제이슨을 와락 끌어안았음. 제이슨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딕의 팔을 떼어냈음. 양 손으로 딕의 상완을 움켜잡고 밀어내며, 제이슨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짜증내듯 말했음. 제이슨을 빤히 쳐다보는 딕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음.

"....내가 생각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조용하게 대답하는 딕의 목소리는 쓸데없이 침착했음. 그래서 제이슨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음.

* * * * * * *

 

제이슨은 스스로를 자제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음. 속고 있는 딕으로서야 모르겠지만 이것이 둘의 첫경험이었으니까. 딕의 옷을 벗기는 손이 갓 열여섯을 지난 애송이마냥 초조하게 떨렸음.

딕의 안에 들어간 순간, 제이슨은 어쩌면 자신이 바랐던 것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음.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이트윙에게 그렇게나 바득바득 화를 내며 달려들었던 것은 처음부터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대립하던 시절이 까마득하게 먼 과거처럼 느껴졌음.

딕은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했던 것치고는 좀 많이 아파하는 것 같았음. 신경이 좀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멈추기엔 너무 기분이 좋았음. 제이슨은 주의깊게 딕의 반응을 살피며 괜찮냐고, 많이 힘드냐고 틈틈이 물었음. 물론 여기서 딕이 힘들다고 대답한다 해도 그 즉시 멈출 수 있을지는 본인으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딕이 너무 아파하기만 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세를 좀 바꿔볼까 하고 몸을 뒤로 무르던 제이슨은, 딕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이슨을 올려다보며 괜찮다고, 계속하라고 속삭이는 순간 본능에 굴복했음.

아픔과 쾌감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제 밑에 깔려 우는 딕의 모습은 환상적이었음. 이대로 영원히 딕의 안에 제것을 묻어두어도 좋을 것 같았음. 사랑해. 디키버드. 때려죽여도 제 입에서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낯간지러운 말이 잘도 튀어나왔음. 더더욱 신기한 사실은 그것이 진심이었다는 것이었음.

 

 

딕의 몸을 갖게 됨으로써 더더욱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음. 이 관계를 절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새삼스러운 불안감이 스물스물 번져올랐음. 제이슨은 초조해졌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도시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았음.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저 창문을 박살내며 분노한 배트맨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음.

가끔씩 불안감과 초조함이 극에 다다랐을 때, 제이슨은 딕을 거칠게 대하곤 했음. 속도 없는 딕은 그러한 제이슨을 한없이 받아주었음. 고분고분히 저에게 안긴 몸에 짜증과 울화와 신경질을 죄다 쏟아붓고 나면 가슴 한구석에 막막하던 불안감이 약간은 해소되는 느낌이었음. 그렇게 내내 시달리던 딕이 지쳐 잠든 새벽이면 제이슨은 울적하게 딕을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곤 했음. 딕은 대부분의 경우엔 완전히 잠들어서 제이슨의 사과를 듣지 못했지만, 가끔씩 잠결에나마 제이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제이슨을 마주 끌어안아주곤 했음.

다친 딕을 무작정 데리고 들어와서 함께 살게 된지 몇 달밖에 안 되는 맨션이었지만, 어느새 둘만의 추억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음.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았던 딕은 이웃들과도 꽤나 친해져 있어서, 제이슨은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음. 그랬기 때문에 어느 날,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딕한테 이사가자고 말했을 때 딕이 의외로 싫은기색 없이 그러자고 대답해서 제이슨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안도했음.

 

예전에는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까봐 딕에게 과거가 기억나는지 캐묻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던 제이슨이, 언제부터인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며 혹시 뭔가 기억나는게 있냐고 추궁하듯 묻기 시작했음. 그럴 때마다 딕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대답했음. 그러면 제이슨이 딕을 끌어안으면서 괜찮다고, 어차피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너랑 내가 이렇게 함께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예전 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거임. 딕은 그럴 때마다 네 말이 맞다고,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고 대답하곤 했음. 일말의 의심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슨은 죄책감을 애써 억눌러야 했음.

 

제이슨과 딕은 새로 옮겨간 도시에서 채 넉달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음. 그 다음부터는 딕이 오히려 먼저 나서서 우리 이사 가자고, 이 동네는 너무 덥다고 or 춥다고 or 지루하다고 or 번잡하다고, 나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 가보고 싶다고 제이슨에게 졸랐음.

제이슨은 처음 두어번 정도는 집을 옮길 때마다 파트타임 잡을 구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그만두고 차명계좌에 모아둔 돈이나 쓰면서 하루종일 딕이랑 집에서만 머물렀음. 그 즈음에는 딕도 이웃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을 그만두었음.

 

수시로 신분증을 바꾸고, 계좌를 바꾸고, 외출할 때마다 가명을 쓰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부터 영원히 숨을 수는 없었음.

 

그리고 더이상 머물 수 없을 보금자리에 배트맨이 들이닥친 날, 제이슨은 딕의 기억이 이미 진작에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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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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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물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브루딕+뎀딕 근본없는 판타지 AU가 보고싶다. 남북으로 기다랗게 생긴 대륙의 중앙에 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 적도를 살짝 빗겨간 위도상에 띠처럼 둘러진 사막이라 육로를 통해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지대여야 한다. 무역상들이 험준한 산맥과 고원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바닷길과 사막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바다가 잔잔하고 폭풍이 뜸하면서 바람 방향이 잘 맞을 때는 배를 통해 물건을 실어나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막을 통해서 움직이겠지.

 

사막을 종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 중앙에 있는 도시에 들러 물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도시의 영주는 브루스 웨인임. 그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오랜 생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함. 도시에는 크고 작은 물물거래 시장이 세군데 있음. 주민들은 도시를 들러가는 여행객들이나 무역상인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임. 여관이라든지 음식점이라든지 잡화상 등등. 사막을 뚫고 도시까지 오느라 지치고 탈진한 짐승들을 저렴한 값에 사들였다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튼튼해지면 그 다음 손님들에게 비싼 값에 되파는 일을 하기도 하고, 망가진 장비들을 수리해주는 전문 수리점도 있고. 보급품을 추가로 구매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곳도 있었음. 물론 사막을 건너는 일은 건장한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일 터이니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위한 병의원도 많을 것이다.

 

작지만 인구밀도 높고(대부분이 유동인구지만) 복작복작하게 돌아가는 이 도시는 일년 내내 풍족하게 솟아나오는 물을 기반으로 번영한 곳이었음. 샘은 도시 한가운데 존재하는 영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도시의 곳곳에 존재했는데, 이 샘을 유지시키는 것은 오로지 브루스의 힘이었음.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본인이 도시를 통치하거나 다스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영주로 받들어졌음. 매사에 무감정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하건 말건 떠받들건 말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의 집에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애첩이 있었고, 영주와 영주의 애첩이 집사와 함께 셋이서 살아가는 비밀의 저택에 어느날 한 어린아이가 유모의 손을 잡고 찾아옴. 브루스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음.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와 함께 저택을 찾아온 아이는 대여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어렸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를 자주 드나드는 노련한 무역상이나 그들의 경호를 맡은 용병들까지도 갑자기 출현한 영주의 아들에 무척이나 놀랐음. 그도 그럴것이 영주는 여자를 별로 가까이하지도 않고(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 거지만) 어쩌다가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감정없는 석상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수십년째 사막을 떠나지 않고 있는 영주가 대체 언제 여자를 만나서 애까지 만든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음. 소년이 보기드문 흑발에 선명한 푸른눈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는 도시 내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경비대에게 호되게 혼쭐이 나서 쫓겨났을 거임.

어쨌든 감히 영주의 사생활에 관여할 정도로 간 큰 인물은 없었던 터라, 사람들은 소년이 유모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음. 그리고 며칠 후, 집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해주는 소녀의 입을 통해 그 꼬맹이가 영주의 아드님으로서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그렇게 사람들은 그 애가 영주의 친자임을 알게 되었음. 애엄마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어차피 안다고 해서 그들이 참견하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작은 도시를 웅성거리게 했던 작은 소요는 그럭저럭 가라앉았음.

 

* * * * * *

 

어린 데미안은 제 아버지랑 똑같이 무감정한 생물이었음. 차이점이라고 해봤자 브루스가 돌로 깎아 만든 석상같다면 데미안은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같다는 정도?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새파란 눈동자로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나 하는 귀염성 없는 꼬맹이었건만, 딕은 그런 데미안을 무척이나 좋아했음.

넓기만 하고 사람이라고는 셋밖에 없는 저택에서 화초나 동물들만 벗삼아 외롭게 살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음. 물론 드넓은 저택의 관리를 돕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딕이 말 좀 붙여보려고 해도 지나치게 정중하고 깍듯이 대하기만 했으니까.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다들 딕을 보면 어려워하기만 했음. 딕은 원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러고싶진 않았음. 그래서 딕은 언제부터인가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저택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더더욱 벌어지게 만들었음.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까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브루스가 딕을 위해서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은 귀여웠지만 딕은 외로웠음. 그러던 와중에 제 허리춤에도 안 오는 꼬맹이가, 그것도 브루스의 친아들이라는 애가 저택에 들어왔으니 기쁘지 않을리가 없지.

 

딕은 브루스랑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색밖에 없는 꼬맹이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안아보고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젖살때문에 통통한 뺨도 잡아당겨보면서 브루스 당신이랑 똑같이 닮은 애라고 호들갑을 떨어댔음. 정작 브루스는 멀뚱한 눈으로 딕과 데미안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딕은 그날부터 데미안의 고사리같은 손을 잡고, 혹은 아예 제 팔에 안아서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음. 데미안은 낯선 딕이 저를 덥썩덥썩 끌어안고 수선스럽게 토닥거리고 뽀뽀하고 극성을 떨어대는게 싫은 듯 볼이 좀 불퉁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딕을 따라다녔음. 데미안을 데리고 왔던 귀머거리에 벙어리 유모가 데미안의 외가로 돌아가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아침이 되어 드넓은 저택의 넓디넓은 제 방 한가운데 어른 대여섯이 뒹굴어도 충분할 만한 침대에서 눈을 뜨면, 적막함과 고독함을 느끼기도 전에 아침나절부터 들이닥친 딕이 데미아아안~!! 하면서 데미안을 일으켜 후다닥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 붙들고 나와서는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음.

 

데미안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아이였고, 덕분에 딕이 귀찮고 성가실 때도 인상이나 좀 찡그리고 볼만 좀 불퉁해질 뿐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진 않았었음. 반대로 딕이 데미안을 데리고 나와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으로 데려가서 생전 처음 보는 달다구리한 디저트를 맛보여줬을 때에도 이거 좋다느니 맛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했지만.

딕은 데미안의 눈이 커지면서 열심히 스푼을 놀리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고, 데미안이 제 그릇을 다 비우자마자 딕 자신의 접시도 슬그머니 데미안의 앞쪽으로 밀어주었음. 말은 없어도 표정으로 티를 다 내니 보기만해도 귀엽고 재미있었음. 브루스도 데미안의 반만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두 부자를 아무것도 없는 한 방에 넣어놓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서로 한 마디도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것이 뻔해서 웃기면서도 슬펐음.

시간이 지날수록, 데미안은 딕이 온종일 제 옆에 있는 생활에 알게모르게 익숙해졌음. 그래서 어느날 밤 악몽을 꾸었을 때, 저도모르게 발걸음이 딕의 방으로 향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침실이건 서재건 복도건 저택의 모든 벽에는 유리를 끼우지 않은 아치형의 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쭉길쭉하게 나 있었음. 어스름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들어와 어두컴컴한 방 안을 파르스름하게 비췄음. 사위는 고요했음. 사막의 밤답게 기온이 서늘했음.

데미안의 방은 수로를 내어 조성한 후원과 가까웠음. 깊은 땅속에서 갓 솟아나온 신선한 샘의 물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음. 악몽에 시달리며 축축하게 배어나온 식은땀이 싸늘하게 식어갔음. 데미안은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왔음.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타이투스가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어린 주인을 쳐다보았음. 데미안은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로 돌바닥을 밟으며 타박타박 제 방을 나섰음. 한낮의 뜨거운 기온에 달궈졌던 대리석은 해가 저문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음.

긴 복도를 지나 방향을 꺾고 꺾어서 딕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묵묵히 데미안의 뒤를 따르던 타이투스가 딕의 방 문앞에서 데미안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음.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타이투스를 물끄러미 응시했음. 타이투스는 귀를 납작하게 접고 자세를 낮춘 채 데미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낑낑거리고 있었음. 데미안은 작은 손으로 타이투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줬음.

"방으로 돌아가."

충성스러운 개는 차마 어린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음. 마지못해 뒤로 돌아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시무룩했음. 데미안은 딕의 방 문을 열었고,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로 종종종 다가갔음.

 

얇게 자아낸 실크로 하늘거리는 차양을 걷어냈을 때, 데미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새까만 이불을 나눠 덮고있는 딕과 제 아버지의 모습이었음.

인기척에 설핏 잠에서 깬 딕은 침대 옆에서 유리알같이 파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데미안을 보고 꽤나 당황했음. 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상체를 약간 일으키며 무슨 일이냐고, 잠이 오지 않냐고 데미안에게 물었음.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 기울인 채 딕을 응시하기만 했음. 딕은 더듬더듬 제 가운을 찾아서 이불 안에서 꿈지럭거리며 꿰어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데미안을 안아올렸음.

나쁜 꿈이라도 꿨어? 여태까지 안 잔거야? 딕은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후원으로 나왔음. 물을 가득 채워 찰랑거리는 수로의 수면 위로 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음. 어린애를 재우려는 것처럼 데미안을 안고 부둥부둥 어르며 후원을 걷고있는데, 불쑥 데미안이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딕은 당황해서 뭐? 하고 대답하며 걸음을 멈췄고, 딕이 정신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재차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아버지랑 섹스했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딕은 엄청, 당황하고 말았음.

얼굴이 확 달아오른 딕은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으면서 아니라고, 나랑 브루스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아니 그보다도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얘기는 들은 거냐고, 너처럼 어린 애가 할 말이 아니라고 허둥거렸음. 데미안은 덤덤하게 '엄마한테 들었는데.' 라고 대답했음. 딕을 빤히 쳐다보는 데미안의 시선이 얼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음. 식은땀까지 삐질 흘려대며 오해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던 딕은, 그렇다면 너와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관계냐고 묻는 데미안의 질문에 말문을 잃었음. 어물어물 입을 다무는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두웠음. 글쎄. 무슨 관계일까.

항상 웃는 모습만 보여주던 딕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음. 그래서 데미안은 충동적으로 말을 덧붙였음. "말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데미안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음.

데미안은 착하네. 고마워. 뭐가 착하고 뭐가 고맙다는 건지 도통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딕이 고맙다니까. , 기분은 나쁘지 않았음. 데미안은 내친 김에 어설프게 딕의 목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음. 이건 데미안이 이곳에 와서 딕에게 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스킨쉽인데,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런 걸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딕 본인이 좋아하는 행동이니까 데미안에게 자주 해주겠거니 싶었음. 그러니까 내가 딕한테 해줘도 좋아하겠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데미안은 딕이 저에게 해주던 것을 흉내내어 쬐끄만한 손으로 어설프게 딕의 등을 다독여주었음. 그리고 예상대로 딕은 이렇게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음. 어느정도냐 하면, 데미안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뜨끈한 소금물에 어깨가 젖는 기분은 별로였지만 데미안은 그냥 잠자코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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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로 돌아가서 딕이 사막의 도시에 처음으로 들른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음. 대륙 곳곳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것을 업으로 삼던 부모님이 어린 딕을 정착해서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륙 반대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거임.

그 때만 해도 도시는 지금보다 미묘하게 작은 규모였음. 그만큼 거주민들도 좀 더 적었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음. 오래된 교역도시인 만큼 인프라는 제법 발달되어 있었고 물도 충분했지만, 지금처럼 도시 여기저기의 샘에서 물이 풍족하게 넘쳐나고 집집마다 화초며 과실수를 키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사막 기슭에 사는 소수민족의 명절 기간이었음. 무역상단에 가이드로 동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그들은 언제나 일정 이상의 인원이 도시에 머물곤 했음. 딕의 부모님은 그들의 축제에 어울려 춤과 음악을 제공했고, 마침 오랜만에 저택에서 나온 브루스도 그것을 관람했음. 덕분에 딕의 부모님은 분에 넘칠 정도로 후한 공연비를 받을 수 있었음.

그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노잣돈도 넉넉히 챙긴 후 나머지 사막을 건너기 위한 여행을 떠났음. 그리고 이틀을 채 못가서 강도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 박살난 짐수레와 살해당한 시신들 사이에서 간신히 구조된 것은 부부의 어린 아들 뿐이었음.

영주가 있는 도시 안에서는 감히 약탈이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걸음만 밖으로 나서면 무법지대였음. 다치고 탈진해서 사경을 헤매는 어린 소년을 보며 브루스는 거의 죄책감과도 같은 기분을 느꼈음. 영주의 심리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샘은 평소의 절반밖에 물을 흘려보내지 않았음. 작은 사막도시의 주민들은 처지가 불쌍하게 된 아이를 한마음으로 동정하고 걱정했음.

 

소년이 깨어난 후 브루스는 소년을 제 저택으로 데려왔음. 어린애를 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다행히 붙임성 좋은 아이는 무뚝뚝한 브루스에게도 살갑게 잘 웃어주었음. 집사와 둘이서 살던 집에 어린애가 생겼으니, 자연히 그만큼 일손이 필요해졌음.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의사도 정기적으로 저택에 드나들게 되었고, 성장기라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옷을 짓기 위해 재봉사도 자주 드나들게 되었음. 아이의 몸에 맞는 가구를 맞추기 위해서, 놀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신발을 짓기 위해서,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저택의 사람들이 시장과 상점으로 나오는 일도 많아졌음. 딕은 귀여운 외모에 살가운 성격을 타고난 아이였고, 사람들은 그런 딕을 무척이나 아껴주었음. 딕이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도시를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영주가 귀하게 키우는 아이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딕 자체가 귀엽기 때문이기도 했음.

브루스는 딕을 위해서 저택의 후원에 수로를 조성하고 맑은 물을 가득 채워 정원을 만들었음. 저택의 샘에서 24시간 솟아나오는 물은 수로를 채우고 정원을 휘돌아 도시 곳곳에 흘러들어가고 스며들었음. 강한 태양빛과 비옥한 토양은 충분한 물이 더해지자 온갖 화초와 과실수가 자라날 환경이 되었음. 딕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인으로 자라났음.

 

딕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과 함께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었음. 도시에 정착해서 산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지만, 딕은 언제나 넓은 세상을 보고싶어 했었음. 그래서 딕은 스무살 생일이 되던 날 브루스에게 달려가 들뜬 얼굴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고 얘기했음. 무역상을 따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걸 보고 경험하고 공부하고 싶다고, 상기된 얼굴로 허락해달라며 재잘거리는 딕을 브루스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음. 딕의 뒷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무역상단을 이끄는 상인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 이 바닥에서 감히 영주님의 아이인 그레이슨 군을 홀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인이 거드는 말에 힘입어 딕이 더더욱 브루스를 졸랐고, 결국 브루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딕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날로 바로 짐을 꾸려 그 다음날 도시를 떠났음. 그리고 2년이 좀 안되는 시간동안 대륙의 남단과 북단에 있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냈음. 마침 무역풍이 부는 계절이었고, 딕은 난생 처음으로 바다라는 것도 구경해보고 배라는 것도 타 보았음. 딕이 태어나기 전, 십대 중반의 부모님은 공연단과 함께 배를 타고 대륙의 건너편으로 건너왔었다던데. 건너들은 이야기로 막연하게 상상하기만 했던 바다와 실제의 바다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딕은 제가 보고듣는 모든것을 빠르게 흡수하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냈음.

물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 낯선 지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배앓이를 하기도 했고, 험한 산길을 지나다가 강도떼에게 습격당해서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음. 두세달이 지나며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게된 것을 제외하면 거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했지만, 다리를 치료하고 요양하느라 오랜만의 사막길에는 동행할 수가 없었음. 결국 딕은 집을 떠난지 2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제가 떠나온 도시로 돌아갈 수 있었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가슴이 뛰었음. 지금까지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하루라도 빨리 저택으로 달려가 브루스를 보고싶었음. 그동안 편지를 꾸준히 보내긴 했었지만 이 시대의 편지라는 건 짧아야 한달, 길면 두세달이나 있어야 도착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딕이 지난달에 부친 편지보다 딕 본인이 먼저 브루스를 만나게 생겼을 정도임.

딕은 제가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리바리 사 모은 선물들과, 브루스에게 전할 수많은 이야기들을 안은 채 사막길에 올랐음. 그리고 상단과 함께 짐을 줄줄이 실은 낙타들을 이끌어 도시에 도착한 순간, 제가 떠나올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섣불리 도시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멈춰섰음.

집집마다 거리마다 활짝 피어있던 화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음.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던 과실수 가지에는 누렇고 시들시들한 이파리만 볼품없이 달려있을 뿐이었음. 당황스러워하는 딕에게 노련한 무역상은 놀랄 거 없다고, 요 몇 년간 특별히 물이 풍족해서 과실수도 키우고 화초도 가꿨던 것뿐이지, 원래 이 도시가 그렇게 나무 많고 풀 많고 그런 동네가 아니라며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음. 딕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렸음. 낯설었음.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기억하는 이곳은....

어쩔 줄 몰라하는 딕을 알아본 몇몇이 오랜만이라며 인사해왔음. 딕은 반갑게 그들에게 다가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와락 끌어안았다가,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머뭇거리며 떨어졌음. 저를 동생처럼 조카처럼 귀여워하던 어른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이 느껴져서 당혹스러웠음.

, 디키야. 그러지 말고. 얼른 영주님께 가보지 그러니. 은근슬쩍 눈치를 주는 뉘앙스에 딕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음. 도시에 도착하면 브루스를 제일 먼저 만나려 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묘하게 내외하는 반응이 서운했음.

 

그 길로 저택으로 향한 딕을 알프레드가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맞이했음. 그에 비하면 브루스의 반응은 좀 더 미적지근했음. 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녀왔냐고,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을 뿐임. 피곤할 텐데 일단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저녁이 준비되거든 부르겠다고. 브루스는 딕이 2년 가까이 도시를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단 사나흘 정도 집을 비운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음. 그러면서도 딕의 얼굴에 못박힌듯 고정된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딕이 어렸을 때부터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었고, 웬만해서는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스물 남짓한 평생의 반 이상을 브루스와 함께 지낸 딕은 브루스의 표정을 캐치해내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익숙했지만, 그러한 딕조차도 지금의 브루스의 얼굴은 읽어낼 수가 없었음. 감정 없는 무표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음. 오히려 그 반대였음. 온갖 색깔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래서 차마 뭐라고 콕 찝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음.

딕은 말문을 잃고 머뭇거렸음. 브루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크고 노련하고 강하고 성숙한 어른이었는데. 그런 브루스가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느껴졌음. 결국 딕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제 방으로 왔음.

신선하고 깨끗한 물로 먼지를 씻어낸 딕은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음. 그리고 왠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고자 후원으로 나왔다가, 자신이 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정원의 모습에 저도모르게 멈춰섰음. 수로의 물은 잠가버렸는지 물기하나 없이 말라있었고, 어수선할 정도로 온 사방에 흐드러져있던 화려한 수목들은 싹 정리되어 있었음. 짧은 풀과 단정하게 조경된 몇 그루의 나무들. 그리고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있는, 장인의 작품이 분명한 조각들. 잘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꾸며진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딕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지나치게 달랐음.

딕은 황망한 기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정원에서 나왔음. 그 길로 알프레드를 찾아간 딕은 정작 노집사를 대면하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딕의 얼굴을 마주보며, 알프레드는 안쓰러운 표정을 했음.

정원을 보셨군요. 딕은 목이 메어서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음. 알프레드는 딕을 자리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네주며 조용한 목소리로 위로했음. 도련님은 아주 어렸을 적에 저택에 오셨으니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원래 후원에는 수로같은 것은 없었답니다. 단지 샘 하나가 있어서 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만큼의 물이 솟아나오고 있었을 뿐이지요. 도련님이 떠나실 적의 모습과 달라서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도시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없답니다.

찻잔을 두손으로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딕이 울적한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물었음. 나 때문인가요? 내가 여길 떠나서? 알프레드는 고개를 저으며 딕의 어깨를 두드렸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딕 도련님께도, 브루스 주인님께도 지나치게 가혹하신 말씀 같군요.

딕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음. 브루스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어딘가를 다치거나 병들어서도 안됐음. 스스로의 감정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브루스는 언제나 스스로를 극도로 억누르며 감정적인 평정을 유지하곤 했음.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게 달린 수많은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으니까. 도시와 정원이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의 이유를 따져 물으며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도시가 돌아갈 수 있도록 샘을 유지시켜주는 브루스에게 감히 해서는 안될 말이었음.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딕의 탓이 아닌 것은 아니었음. 딕은 아름답던 화초들과 정원수와 과실수가 사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그동안 브루스가 느낀 외로움과 슬픔과 고독이 반영된 결과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음. 제가 정신없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에 푹 빠져있는 동안, 브루스는 늘 똑같기만 한 이 저택에서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을까.

 

그날 저녁, 외지인들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두 군데가 문을 닫았음. 요리사와 종업원들이 전부 저택의 저녁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되었기 때문이었음. 딕과 동행하여 도시에 들어온 상단은 무척이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

음식은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저녁나절 내내 심란했던 딕은 별로 많이 먹지 못했음. 상석에 앉아있던 브루스의 무덤덤한 시선은 내내 딕을 향하고 있었음. 결국 딕은 이마 쉬러 가겠다고 양해를 구하며 먼저 일어섰고, 브루스는 무던한 목소리로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툭 말을 던지고 같이 일어섰음. 손님을 대접하는 집주인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음. 상단의 상인들과 길잡이들과 호위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음식과 술을 즐겼고, 브루스와 딕은 떠들썩한 연회장을 떠나 한적한 복도를 걸었음.

이렇게 둘이서 함께 저택을 거니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거늘,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음. 브루스를 만나면 그동안 쌓아놓은 이야기들을 밤새도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길고 적막한 복도를 앞만 보면서 나란히 걸으려니 참을 수 없이 어색했음. 그래서 비로소 제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브루스를 돌아보며 나는 좀 일찍 자야겠다고, 당신도 피곤하면 굳이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쉬라고 말하려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브루스의 시선에 붙들려 어물어물 말끝이 흐려졌음. 브루스는 그렇게까지 딕에게 가까이 붙어서있지는 않았음. 딱히 야릇한 긴장감이 조성된 것도 아니었음. 오히려 예전에 비하면 좀 더 멀찍이 거리를 둔 채로,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음.

이마에서 눈썹으로, 눈으로, 뺨으로, 곧게 솟은 콧날을 따라 내려와서 입술과 턱으로,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새삼스레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브루스의 시선이 찬찬히 딕의 얼굴을 살폈음. 딕 역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딕의 뺨을 쓸었음. 아주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덧그리는 손끝이 흰 뺨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떨어져나갔음. "....쉬려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루스는 자리를 뜨지 않았음. 딕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을 때까지.

알프레드가 매일 정리해놓은 방은 딕이 떠나기 전과 똑같았음. 책갈피가 중간에 꽂힌 채 홀로 책상위에 올려둔 책마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음. 딕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음. 울고 싶었음. 그날 밤, 딕은 한 숨도 자지 못했음.

 

다음날 딕은 시장으로 나왔음. 제가 좋아하는 노점과 디저트 가게에도 들르고,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음. 언제나 외지인들로 붐비는 도시는 북적북적했지만, 묘하게 예전의 활기찬 모습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음.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묘하게 여유가 없었고, 늘 반짝이던 간판들이나 새하얗던 노점상의 천막들도 묘하게 텁텁해보였음. 풍족할 때는 쉽게 느껴지지 않던 변화들이, 그 풍족함이 사라지니까 대번에 티가 났음.

딕의 또래의 청년들이나 딕보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 오래전 원래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조차 근 2년간의 변화에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음. 그 누구도 대놓고 딕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머무를 거냐고 넌지시 묻는 질문의 행간에는 말못할 간절함이 느껴졌음. 철없는 일곱살배기 꼬맹이 하나가 딕의 다리에 답삭 매달리며 오늘아침에는 샘에 물이 가득 찼었다고, 덕분에 오랜만에 밀렸던 양털을 다 빨았다고 자랑했다가 제 엄마한테 엉덩이를 팡팡 얻어맞고 찡찡 울음을 터뜨렸음. 애엄마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애가 어려서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쉬다가 가라고 딕에게 몇번이나 사과했음.

딕은 당황했음. 어째서 나한테 미안해하는 걸까. 딕은 어렸을 때부터 도시와 시장 곳곳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자랐고, 또래들과 어울려 짖궂은 장난을 치다가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은적도 많았음. 형 동생 할 것 없이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사람들은 영주님이 키우는 아이인 딕을 무척이나 귀여워하며 이것저것 먹을것을 손에 쥐어주곤 했음. 어느정도 자란 이후에는 베이비시터를 자처하며 코찔찔이들을 돌보기도 했었고. 공방이나 수리점에 드나들며 잡다한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물어보고 배우기도 했었음. 딕에게 있어서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렸을 적 캐러반에서 저를 돌봐주던 이모나 삼촌들과 마찬가지였음.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고작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떠나있었을 뿐인데. 역시 나는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걸까?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서?

하지만 딕 역시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것뿐이었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딕은 하루종일 시장주변의 가게를 돌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일찌감치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음. 그 날의 저녁식사 역시 전날 못지않게 휘황찬란했고, 딕은 입맛이 없었지만 브루스와 알프레드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으로 제 몫을 먹었음.

전날 밤에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기 때문인지, 딕은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들었음. 얕은 선잠이 금방 깊은 숙면이 되었다가, 기억나지도 않는 꿈을 몇개 연달아 꾸기도 했음.

한참을 깊은잠과 얕은 잠을 반복하던 딕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눈을 떴음.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는 브루스와 눈이 마주쳤음. 딕은 잠에 취해 멍한 기분으로 브루스를 올려다보았고, 브루스는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덮어줬음. 사막은 낮기온이 뜨거운 만큼 일교차가 심해서, 꼼꼼하게 침구를 챙기지 않았다간 감기라도 걸리기 십상이었음. 어설프지만 다정한 손길로 이불을 잘 펴서 덮어주는 브루스를 올려다보며, 딕은 잠에 취한 채 배시시 웃었음. 그리고 금세 다시 잠들었음.

다음날,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온 딕은 수로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 투명한 물을 보며 말문을 잃었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음.

 

그날 딕은 하루종일 후원에 머물렀음. 오후에는 브루스도 와서 함께 디저트와 차를 즐겼음. 같은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딕은 브루스의 집무실로 찾아갔음. 그리고 제가 근 2년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것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음. 브루스는 내내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딕의 말을 열심히 듣고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음. 그래, 그랬니, 그렇구나, 하고 대꾸하는 대답은 영 시원찮았지만, 딕은 그것만으로도 잔뜩 고무되어서 제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줄줄 쏟아냈음. 마치 스스로의 목숨을 보전하고 폭군을 일깨우기 위하여 천일하고도 하루동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어느 나라의 왕비처럼. 밤을 새고서도 끝날것 같지 않던 이야기는 제가 사막도시로 돌아온 여정을 수선스럽게 과장하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음.

"....그래서 짠, 그리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구요. , 이제 질문있으면 해봐요. 무엇이든 다 대답해 줄게요!!" 딕이 자랑스럽게 뻐기면서 말했고, 브루스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음. 딕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음.

"이제 웬만큼 돌아볼 건 다 보고 온 것 같아요. 재미있긴 했는데, 역시 몸은 힘들더라구요.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요. 이곳도 무척이나 그리웠구요. 나는 아무래도 여행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이것 봐요, 여기 다리에 흉터 보여요? 정말 아파서 죽을 뻔 했다니까요. 집에 돌아오니까 이렇게 편한데 말이에요. 그쵸? 역시, 내가 살 곳은 여기인 것 같아요."

쾌활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저절로 잠겼음.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음. 브루스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음. 왜요, 다 큰 자식이 계속 집에 눌러붙어 있으면 민폐인가요? 딕이 애써 웃으며 말했고, 브루스는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굳어있다가 반 박자 늦게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딕은 코를 훌쩍거리며 브루스를 끌어안았음.

아 정말 센스없는 아저씨. 이럴 때는 좀 안아주면 덧나나. 브루스가 꼼짝도 하질 않으니 그냥 내가 끌어안아야겠다. 딕은 두 팔로 브루스를 끌어안은 채 널찍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음.

그렇게 딕은 도시 한가운데의 넓은 저택에 살게되었음.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안도했음. 어느 사이엔가 딕은 본의아니게 도시에서 영주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음. 예전과 다른 묘한 거리감은 딕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고, 자연스레 딕은 점점 저택 안에만 머무르게 되었음. 그래도 괜찮았음. 딕이 자유롭게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는 삶을 버리고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결국 브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가끔씩은 좀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음. 브루스가 딕을 위해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도 귀여웠음. 그러니까 괜찮았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브루스는 딕을 건들지 않았음. 딕을 위해 온갖 귀한 화초를 가져다 심고, 진기한 동물들을 데려다놓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지만 그뿐이었음.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가 딕에게, 딕이 브루스에게 연애 대상으로서의 관심이 없는 건 또 아니었음. 딕도 브루스를 좋아하고 원했음. 그래서 솔직히 브루스를 이해할 수 없었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나이차이? 나이로 따지자면 브루스보다 어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브루스는 도시의 가장 나이많은 노파가 소녀였을 때도 지금 모습 그대로라고 했었음. 딕이 처음 저택에 왔을 무렵의 차이에 비하면 두사람의 겉보기 나이 차이는 확 줄어있었음. 설령 나이차이가 좀 나면 어때. 딕은 성인이었음.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다 빠진 할아버지랑 연애를 해도 본인들만 좋으면 무슨 상관이겠음.

더군다나 딕은 이미 암암리에 브루스의 애첩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음. 한창 나이의 싱싱하고 예쁘장한 청년이 최고급 옷감으로 지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하루종일 영주의 곁에 붙어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할 오해였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딕을 안지 않았음. 언젠가 하루는 시무룩해진 딕이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냐고 대놓고 물어봤을 정도였음.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묵묵히 저었지만, 딕은 브루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음. 충동적으로 딕을 향해 내밀어진 손은, 그러나 딕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거두어졌음. "....늦었구나. 이만 자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딕은 심란해졌음.

 

브루스가 정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딕으로서도 굳이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었음. 연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브루스는 제 은인이었고, 소중한 가족이었음. 그를 위해 기꺼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음.

하지만 딕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확실한 증거가 있거나 그래야만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졌음. 마치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처럼, 매일아침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음. 그의 눈빛에서, 가끔 어떠한 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는 모습에서. 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음.

단지 딕이 모르는 것이라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며 은총인 이 사막의 도시가,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이, 브루스에게는 저주와 다름없다는 사실이었음.

 

브루스는 딕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흘째 되던 날, 앞으로 당신 곁에 머무르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음. 그는 딕이 대륙 곳곳을 여행하며 부친 편지 한통 한통을 전부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고, 딕이 얼마나 바깥세상을 즐기고 있는지, 새롭게 접하는 그 모든것들을 얼마나 놀라워하고 경탄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음. 그런 아이가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기쁨임과 동시에 슬픔이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고, 아프거나 다쳐서도 안 되고, 슬퍼하거나 분노해서도 안 되는 이 저주받은 삶에 제가 아끼는 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음. 하다못해 일년에 단 한 달만이라도, 사막을 벗어나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차피 고민해봤자 불가능한 일이었음. 천연의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도시는 건조했고, 아무리 많은 물을 가득 저장해두고 떠난다 한들 금방 모래 사이로 스며들거나 증발되어버릴 것이 뻔했음. 부모님을 잃고 고향처럼 자란 도시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딕 본인도 원하지 않을 거임. 결국 브루스는 지난 몇십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자신의 연인이 되는 것은 딕에게 지나치게 가혹했음. 그래서 브루스는 딕을 안지 않았음. 딕으로서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가끔 브루스는 딕에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묻곤 했음. 딕은 그 때마다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됐다며 손사래를 쳤음. 딕은 바깥세상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고 있었음. 안 그래도 요새 자꾸 외로워지려고 하는데, 예전처럼 그렇게 훌쩍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기 싫어질까봐 스스로도 두려웠음. 홀로 고독할 브루스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실컷 즐기다 오는 것은.... 아니, 뒤늦게라도 돌아오기나 하면 다행이지. 애초에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옳았음.

딕은 차라리 브루스를 꼬시고 유혹해서 쓰러뜨리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음.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음. 목욕 시중을 들거나 마사지를 핑계로 스킨쉽을 조금씩 조금씩 늘리다 보면 넘어오지 않을까. 어차피 날도 덥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겠다, 딕의 옷차림은 날이 갈수록 얇고 대담해졌음. (그리고 그로 인해서 딕이 브루스의 애첩이라는 루머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음) 심지어 잠을 잘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이불속에 쏙 들어갈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음. 브루스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했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얼굴은 전혀 그러한 티를 내지 않았음. 낼 수 없었음. 천진하게 '왜요, 뭐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했음. 붙임성이 좋은 딕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한 차림새를 한 주제에 브루스에게 잘만 들러붙었음. 비록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없었지만. 딕이 알몸으로 브루스가 자고있는 침대에 파고들었을 때, 브루스가 딕을 쫓아내거나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나름의 성과로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하긴 했음. 나가라고 하질 않았으니 진전이라면 진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래놓고 쿨쿨 잠만 잤을 뿐이니 실패라고 할 수도 있었음.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브루스도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다만 딕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있는 것뿐이라는 확신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음.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어린 데미안이 저택에 찾아왔음.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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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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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로드 세계관 기반. 슈퍼맨이 대통령인 루터를 죽이고 독재하는 세계입니다. 캐릭터의 죽음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사항에 민감하신 분께는 열람을 권하지 않아요.



저스티스로드 세계관 기반. 슈퍼맨이 루터를 죽이고 철권통치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슈퍼맨이랑 배트맨이 슬슬 대립하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브루딕은 서로가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관계인 것이 좋다. 더불어 딕은 어린시절의 우상이었던 슈퍼맨에 대한 믿음을 아직 저버리지 않고 있었으면 좋겠다. 숲스가 조만간 철권통치를 그만둘 거라 생각하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고담이고 블뤼드헤븐이고 유명한 빌런들은 싹 정리당했지만 그 대신 여기저기서 슈퍼맨의 독재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겠지. 배트맨은 케이브에 틀어박혀서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며 슬슬 슈퍼맨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딕은 반대로 메트로폴리스로 찾아가서 어떻게든 숲스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로이스와 지미가 반군세력에 가담한 것을 발각당했음. 슈퍼맨은 무척이나 분노하면서도 슬퍼하며 두사람을 가뒀음. 안그래도 최근 배트맨을 위시한 저스티스로드 멤버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게 느껴져서 심란하던 차였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속상했음. 자신은 단지 분쟁 없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뿐인데.

물론 그에게는 광신적으로 그에게 복종하는 군대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의 통치를 잘 따라주고 있었음. 문제는 그 대부분의 시민들이 단지 겁에질려서 기계적으로 명령에 따를 뿐이라는 거였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이상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몇 없다는 것을 머리좋은 숲스가 모를리 없었음. 한편으로는 울적했고, 한편으로 외로웠음. 안그래도 자신은 외계인이고 이방인이었음. 항상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아야 했었는데, 그러한 숲스가 이 지구에 소속된 일원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동료들과 시민들의 애정과 응원이었던 거임. 그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배척과 공포가 자리잡자 그만큼 숲스는 고독해졌음. 그리고 그러한 숲스 곁에 딕이 있었음.

 

딕은 다른 로드원들과 달리 숲스를 멀리하거나 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슈퍼맨의 철권통치를 광신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음. 딕이 숲스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음. 언제나 그랬듯이 스스럼없이 숲스에게 다가와서 신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거임.

딕은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걱정할 필요 없는 그의 안부를 묻고, 식사는 잘 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유일한 사람이었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의 선함과 사회의 자정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숲스가 더이상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기를. 저스티스로드 멤버들 및 각국의 정상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금의 이 비정상적인 독재를 끝내주길 간청하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했음. 나는 능력도 없고 보잘것 없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나라도 괜찮다면 당신 곁에서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배트맨도 당신이 마음이 돌리길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이 예전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그에게 연락하면 그는 언제든 달려와줄 거라고.

하루종일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분쟁들을 처리한 로드숲이 저녁 늦게 제 요새로 돌아오면, 그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리던 딕이 따스한 손길로 그를 맞이하곤 했음. 그러면 하루종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내던 숲스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리는 거임. 샤워를 하고 나와서 딕이 꺼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딕과 함께 식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하고. 두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언제나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는 딕에 의해서 회유와 간청과 설득으로 끝나곤 했음. 매번 똑같은 패턴이었지만 숲스는 그게 싫지 않았음. 오히려 즐겁고 좋았음. 자신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잔혹해지고 싶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름의 확신을 갖고 철권통치를 시작했지만 가끔씩은 자신이 올바른 길로 가고있는지 회의감이 들곤 했음. 그리고 가끔씩 정말로 인간에게 실망할 때,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끔찍한 범죄를 목격했을 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조차 놓아버리고 싶을 때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하는 딕의 목소리를 듣고있노라면 아직은 인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임. 그렇게 흔들릴 때마다 숲스는 딕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했음. 결국 독재를 그만두라는 딕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딕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숲스를 설득하려 했음.

 

한편 고담에 틀어박힌 배트맨으로서는 로드숲 곁에 머무르는 딕이 무척이나 걱정되었음. 매일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그래도 워낙에 세월이 수상하니까-_-;;; 저항군들이 슬슬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숲스와 그 주변의 사람들은 당연히 최우선순위의 표적이었음. 배트맨은 딕을 걱정하며 어서 고담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딕은 언제나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음. 당신도 알지 않냐고. 아무리 저항군이 애를 써봤자 숲스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없다고. 지금의 상황을 끝내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숲스를 설득해서 그가 스스로 이 독재를 끝내게끔 하는 것뿐이라고. 당신이 더이상 숲스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면 나를 믿어달라고.

그러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이길, 요즘 슈퍼맨이 티는 안 내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아직까지는 그래도 스스로 인류를 보호하고자 이 모든 일을 하고있지만, 저러다가 정말로 안 좋은 선택을 하게될까봐 걱정된다고. 지금의 슈퍼맨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거였음.

결국 배트맨은 한숨을 쉬며 그렇다면 한 달만 더 시간을 주겠다고. 그 이상으로 길어지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들고일어나는 저항세력으로 인해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한 달 후에는 반드시 고담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함. 딕은 알았다고 대답하면서 이 요새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통신을 끊었음.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딕은 그 한달의 유예기간 동안에도 슈퍼맨을 설득할 수 없었음.

 

사실 배트맨은 저항군이 전혀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음. 국지적인 소요는 금방 진압되었고, 각 조직들은 긴밀하게 연계하지 못한 채 각개격파당하기 일쑤였음. 이런식으로는 민간인들과 시민들의 희생만 커질 것이 뻔했음. 브루스는 슈퍼맨에게 대항하는 저항군을 규합해서 전면적인 게릴라전을 벌이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음.

딕도 그러한 브루스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고있었음. 그것은 딕이 굳이 슈퍼맨의 곁에 머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음. 스스로를 인질삼아 브루스가 저항군측에 가담하는 것을 억제시키는 거임. 슈퍼맨과 배트맨 두사람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정말로 평화롭게 끝내기는 요원해질 테니까. 가족이자 연인인 브루스도, 멘토이자 우상인 숲스도, 어느 한 명이라도 다치는 건 원치 않았음. 누가 보면 순진하다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딕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길 바랐음.

하지만 성과 없이 브루스와 약속한 한 달은 지나가버렸고, 이젠 고담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음. 요새들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한 슈퍼맨이 걱정되긴 했지만. 연인인 브루스 곁을 지나치게 오래 떠나있기도 했으니까. 일단 고담에 들러서 브루스와 대화를 해보고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딕은 숲스에게 고담에 며칠간 다녀오겠다고 얘기했음.

슈퍼맨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딕의 말을 묵살했음. 요즘 저항군들이 기승이라고. 요새를 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딕은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음. 나는 배트맨에게 배우며 당신을 보고 자란 어엿한 히어로라고. 쉽게 납치당하거나 하진 않을테니 걱정 말라고. 어차피 브루스가 배트윙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위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정 걱정되면 당신이 나를 고담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않냐고. 케이브에 들러서 겸사겸사 브루스랑 대화도 좀 해보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하지만 숲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을 뿐이었음. 안 돼.

그리고 그제서야 딕의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 가셨음.

 

딕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유를 물었음. 숲스는 밖은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네가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음. 단정한 얼굴은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인간의 것에 비해 지나치게 새파란 눈동자는 웃고있지 않았음.

딕은 처음으로, 어째서 사람들이 슈퍼맨을 두려워하는지 실감했음. 등줄기에 오싹 오한이 들었음. 긴장으로 손끝이 차가워졌음. 딕은 얼어붙은 채 숲스를 올려다보았음. 흉터 하나 없이 커다란 손이 딕의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매만졌음.

다시 말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바라지 않는단다. 안전해질 때까지 이 곳에 머무르렴.

 

딕이 고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메트로폴리스에 억류당하자 배트맨은 즉시 뱃가 일원들을 모아 딕의 구출작전을 세우기 시작했음. 그리고 동시에 저항군들을 물밑으로 지원하기 시작함.

일주일에 두 번, 10분간 이루어지는 딕과의 화상통화엔 언제나 슈퍼맨이 감시하듯 함께했음. 그래서 브루스와 딕은 짧은 통화 중간중간에 암호를 섞어가며 진짜 대화를 이어가야 했음. 딕은 내가 어떻게든 슈퍼맨을 설득할테니 제발 섣부른 생각 하지 말라며 브루스를 만류했음. 물론 브루스는 딕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음. 애초에 한 달이고 자시고 시간을 줄 게 아니라 당장 돌아오라고 했어야 했는데. 싫다고 거부하면 직접 끌고오기라도 했어야... 아니, 처음부터 딕이 메트로폴리스에 머무르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브루스로서는 안그래도 슈퍼맨의 독재를 그냥 방관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해서 딕을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지자 더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음. 그리고 슈퍼맨 역시 배트맨이 어떻게 반응할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음. 두사람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함.

저스티스로드의 멤버들 및 각 도시의 히어로들이 각각의 편에 갈라섰음. 계엄령이 선포되었음. 이제는 딕이 슈퍼맨을 설득한다 해도 쉽게 상황이 끝나지 않을 거임. 그리고 아무리 배트맨이 대단한 전략가라 한들, 전지전능한 외계인 앞에서 바람앞의 등불일 것이 자명했음.

딕은 걱정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음. 브루스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딕을 겁먹게 했음. 더 안좋은 것은 브루스가 만약에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그 순간 그의 곁에 있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었음.

딕은 슈퍼맨에게 울면서 애원했음. 제발 싸우지 말라고.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브루스를 해치지 말아달라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리고 그 눈물이 슈퍼맨 본인조차 스스로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질투를 자극했음.

 

결과적으로 배트맨은 슈퍼맨의 손에 죽었음.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적이었던 고담의 저항군은 배트맨과 함께 말살당했음. 오라클과 로빈을 위시한 저항군 간부 몇명만이 뿔뿔이 흩어진 채 목숨을 건졌을 뿐이었음. 반란군을 진압하는데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음.

새벽에 옷을 차려입고 요새를 나선 슈퍼맨은 저녁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돌아왔음. 진한 화약냄새와 쇠비린내가 났지만 로드숲의 외견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기만 했음. 단지 흰 망토 끝자락에 작은 핏자국이 딱 한방울 튀어있었을 뿐. 창백하게 질린 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음.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덜덜 떨리는 턱 끝에 방울졌음. 슈퍼맨이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딕의 뺨을 조심스레 닦아주었음.

 

딕은 만 하루를 꼬박 앓았음.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음. 먹는 족족 다 토해내고 물만 간신히 몇 모금 마실 수 있었을 뿐. 이중 삼중의 검문을 거쳐 올라온 의사가 링겔을 처방했음.

의사는 그대로 요새에 머무르며 딕의 건강을 돌보게 되었음. 며칠 사이에 수척하게 살이 빠져버린 딕은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눈물로 보냈음. 멍하게 눈만 깜박이면서 울다가 기절하듯 잠들면 열시간이고 열두시간이고 죽은 듯이 잠만 잤음. 슈퍼맨은 그러한 딕의 곁을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음. 고담에 거점을 두었던 최대규모의 저항군이 제압된 덕분인지 소소한 소요가 요 며칠간 뜸해서 다행이었음. 슈퍼맨은 내내 딕의 옆을 지키며 대답 없는 딕에게 말을 걸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고 손발을 주물러줬음. 딕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러고도 며칠이 더 지난 후였음.

어느 날, 딕은 퀭하게 살이 빠진 얼굴로 물끄러미 숲스를 바라보았음. 초점없이 멍한 시선이 아니었음. 깜박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분명히 슈퍼맨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음. 딕은 피곤한 듯 금세 눈을 다시 감고 잠들었지만, 숲스는 딕이 뭔가 반응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음.

그리고 다음날 깨어난 딕은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려주었음. 일으켜주세요. 앉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오랫동안 곡기를 끊었으므로 처음에는 주스나 유동식을 조금만 먹을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진전이었음. 딕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슈퍼맨에게 약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고, 슈퍼맨이 딕의 손발을 주물주물 마사지 해줄 때에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기도 했음. 평소대로 딕의 손발을 주물러주던 숲스는 딕이 인형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어제까지와는 달리 부끄러워하며 손을 슬쩍 빼려고 하자, 그제야 당황하며 딕에게 사과했음. 미안하다고.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라고. 그냥 네 손이 차가워서... , 아니. 그게 아니라. 싫었다면 미안하다고.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는 숲스에게 딕은 작게 괜찮다고 대답했음. 괜찮아요. 당신 손 따뜻해서 기분 좋아요. 그냥 좀.... 부끄러워서. 요새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딕이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지난 며칠간 딕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손수 옷까지 갈아입혔던 슈퍼맨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음. 두 사람이 침대에 뻘쭘하니 마주앉은 채 어색한 정적이 흘렀음. 그리고 숲스에겐 다행히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딕이었음. 나 씻고 싶은데. 아직 좀 힘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당신이 도와줄래요?

슈퍼맨은 잠시 멍청하게 딕을 쳐다보고 있다가 후다닥 일어나서 욕실로 갔음.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딕을 부축해 욕실로 데려와서는 옷을 벗겨 욕조에 앉히는 손길은 조심스러웠음. 처음에는 맨정신인 딕의 옷을 벗긴다는 것에 약간 주저했지만, 딕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을 숲스에게 맡겼으므로 망설임은 길지 않았음.

욕조에 들어간 딕은 금방 어지러워하면서 흐물흐물 물 속으로 미끄러졌음. 딕은 약간 민망해하면서 숲스에게 미안하지만 같이 욕조에 들어와주면 안되겠냐고 부탁했고, 숲스는 욕조에 들어와 제 가슴팍에 딕을 기대게 하고, 딕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제 팔로 단단히 끌어안았음. 딕은 약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음.

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슈퍼맨의 넓은 어깨 위로 흩어졌음. 슈퍼맨은 저에게 기댄 딕을 찬찬히 살폈음. 가벼웠음. 슈퍼맨에게 가볍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아무리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벼웠음. 며칠간 살이 확 빠져버린 덕분에 삐죽 드러난 턱선과 목울대가 도드라져 있었음. 안그래도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홀쭉해진 몸이 안타까웠음. 그나마 뼈대 자체가 균형잡힌 체형이라서 그렇게까지 보기 흉하진 않은 게 다행이랄까.

배트맨과의 싸움은 슈퍼맨으로서도 꽤나 아픈 경험이었음. 한 때 뜻을 같이했던 동료를 제 손으로 죽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배트맨이 평범하게 피와 살로 된 인간에 불과했기에, 그를 죽이는 것이 슈퍼맨에게는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음. 다시 말하지만, 고담의 저항군을 진압하는 데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었음...

딕의 맨몸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생각을 이어나가던 슈퍼맨은 제 품안에서 약하게 꿈틀거리는 기척에 정신을 차렸음. 몸을 살짝 튼 딕이 슈퍼맨을 올려다보고 있었음. 병색이 완연한 흰 얼굴이 처연했음.

슈퍼맨은 고개를 숙여 딕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음. 딕은 잠깐 몸을 굳히는가 싶더니 이내 고분고분하게 슈퍼맨의 품안에 안겨왔음. 따끈한 물이 찰박거리면서 욕조 밖으로 넘쳤음. 강대한 크립토니안에게 딕의 무게는 지나치게 가벼웠음.

 

그 날 이후로 딕은 조금씩 식사량을 늘려갔음. 일어나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조금씩 방 안을 거닐기도 했음. 딱히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렸던 것은 아니었기에 잘 먹고 잘 쉬고 잘 움직이기 시작하니 회복하는건 금방이었음. 딕은 금방 건강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음.

항상 딕의 곁에 머무르던 슈퍼맨은 딕이 회복되고 나서도 자연스레 한 침대를 쓰게 되었음. 처음 이틀간 숲스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음. 제 팔을 베고 제 가슴팍에 손을 얹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딕의 기척에 온 신경이 곤두세워졌음. 옅은 바디샴푸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음. 그냥 욕실에 있는 것을 같이 쓰고 있을 뿐인데, 딕의 체향과 섞인 향기에선 독특한 단내가 났음.

잠꼬대를 하며 살짝 뒤척이는 소리. 제 가슴팍에 얹어진 손이 꿈이라도 꾸는지 약하게 움찔거리다가 다시 잠잠해지는 느낌. 고르고 안정적인 숨소리. 산소로 가득찬 폐포가 부풀어오르고 심장이 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소리. 숲스는 눈을 감고 딕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음미했음. 이 소리를, 이 체취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음..

슈퍼맨과 딕 사이에 좀 더 성적인 접촉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밤이었음. 초저녁부터 곤히 잠들었던 딕이 깼고, 제 옆의 슈퍼맨이 깨어있다는 것을 눈치챘음. 물론 슈퍼맨에게는 매일매일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자겠답시고 옆자리에 누워놓고 깨있는 건 영 이상하니까. 딕은 잠이 오지 않냐고 숲스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고, 슈퍼맨은 대답하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음. 그리고 잠시 후에 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 하는 표정을 지었음.

미안해요. 내가 컨디션이 이모양이라 신경을 못 썼네요. 진짜로 미안.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장난기를 담은 표정은 예전과 똑같았음.

숲스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딕의 손이 꾸물꾸물 슈퍼맨의 옷 속을 파고들었음. 숲스는 당황하며 딕을 저지하려 했지만 말로만 하지 말라고 했을 뿐, 차마 부서질 것처럼 마른 손목을 제 손으로 붙들어 떼어내진 못했음. 그리고 익히 예상했듯이 하지말라는 말 한마디로 딕을 말리는 것은 무리였음.

쉬잇, 가만히 있어요. 내가 지금은 몸상태가 영 아니라서 손으로밖에 못 해주지만, 다음주 주말쯤이면 훨씬 근사한 걸 해줄 수 있을테니까요.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귓가에 숨을 후 불어넣는 것만으로 딕은 슈퍼맨을 무장해제시켰음.

당신도 나를 원한다는 거 알아요. 지난 이틀 밤 내내 참기만 했다니 당신도 참 바보같네요. 당신의 그런 면이 싫은 건 아니지만 말예요.

슈퍼맨은 그날 밤 어떤 것이 더 좋았는지 고를 수 없었음. 딕의 환상적인 손기술이었는지, 아니면 제 귓가에 애교스럽게 속살거리는 목소리였는지. 어쨌든 그날 이후로 로드숲과 딕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의미에서 침대를 같이 쓰게 되었음.

 

절친한 동료였던 배트맨을 잃은 것은 뼈아팠지만, 그대신 딕을 얻었음. 덕분에 슈퍼맨은 그만큼 멘탈을 안정시킬 수 있었음. 루터를 죽이고 행동노선을 바꾼 이래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겪었을 때에도 제 곁에 있어줬던 딕이었음. 물론 마지막 몇 개월 동안은 고담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숲스가 강제로 억류했던 것이지만. 어쨌든 몸과 마음으로 딕과 맺어지고 나니 더이상 고민하거나 회의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음. 슈퍼맨은 묵묵히 범죄자들을 잡아넣고 지구 곳곳의 분쟁들을 정리하고 저항군들을 진압하며 시스템이 안정되도록 최선을 다했음. 그리고 매일 저녁 딕이 기다리고 있는 요새로 돌아왔음.

건강해진 딕은 예전처럼 밝아진 모습으로 숲스를 맞이했음. 더이상 철권통치를 그만두라고 설득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숲스가 하는 모든 일들을 지지해주었음. 그래서 오히려 슈퍼맨은 더더욱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세워 그 규칙 하에 문제들을 처리했음. 가끔 적극적인 폭력을 활용하고 시민들을 좀 더 철저하게 통제할 것을 권하는 측근들도 있었지만 슈퍼맨은 단칼에 거절했음. 쉬운 길을 택하고자 하는 유혹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음.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연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았음. 하루하루가 충만했음.

딕은 하루종일 요새 안에서 지냈음.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딕이 저렇게 집안에서만 지내는 것은 그닥 즐겁지 않을텐데도 그러했음. 가끔씩 슈퍼맨이 밖에 나가고싶지 않냐고 슬쩍 물어봐도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 했음. 그러면서 필요한 건 이 안에 다 있는데 굳이 위험한 바깥으로 나가서 당신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음.

슈퍼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음. 그러한 숲스의 기색을 살피던 딕이 덧붙였음. 내가 정 신경쓰인다면 당신과 함께하는 산책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물론 한가롭게 공원을 걷는 거 말고, 기왕이면 오랜만에 구름 위를 날고싶다고.

살살 웃으며 애교를 떠는 딕에게 못해줄 게 뭐가 있겠음. 슈퍼맨은 딕 말마따나 오랜만에 딕을 안고 한참을 비행했음. 그리고 내친 김에 동물들이 뛰노는 세렝게티 초원까지 날았음. 동물을 좋아하는 딕은 예상한대로 무척이나 즐거워했음. 숲스의 팔에 안겨 소리높여 웃는 딕의 웃음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음. 그리고 요새로 돌아온 그날 밤, 딕은 슈퍼맨에게 당신의 아이를 갖고싶다고 고백했음.

슈퍼맨은 온갖 감정으로 벅차올라 반응조차 보일 수 없었음.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기뻤음. 하지만 어떻게? 딕은 남잔데? 숱하게 몸을 섞었으니 새삼 확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굳이 엑스레이 비전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딕은 남성이었음. 그것도 매우 훌륭한. 의아해하는 숲스에게 딕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설명했음. 웨인생명공학에서 개발하던 기술이 있다고. 크립토니안인 당신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싶다고. 굳이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고싶은 것뿐이니까. 시도해보는 것만이라도 나름 의미있는 일 아니겠냐고.

웨인사의 이름을 듣는 순간 슈퍼맨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것도 잠시였음. 애초에 누굴 위해서 개발하기 시작한 기술이면 어때. 지금은 슈퍼맨 본인이 딕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음? 슈퍼맨은 뇌리에 떠오른 브루스의 얼굴을 애써 지웠음. 그리고 딕을 끌어안고 딕의 두 손을 모아 입맞췄음. 네 말이 맞다고. 설령 아이가 생기지 않더라도 네가 날 위해서 우리들의 아이를 가지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 될 거라고. 당연히 찬성이라고. 그리고 고맙다고. 숲스의 대답을 들은 딕은 뺨을 물들이며 슈퍼맨을 끌어안았음.

 

시술은 오래 걸렸음. 인공 장기를 몸 안에 안착시키는 작업이 일년 반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는 동안, 딕은 호르몬 불균형을 필두로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의연하게 견뎌냈음. 오히려 옆에서 지켜보는 슈퍼맨이 더더욱 안절부절 못할 지경이었음.

최고 수준의 의료진들은 작은 실수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했음. 정기적인 진료와 시술을 받을 때마다 딕은 발랄한 농담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전환하려 애썼음. 잔뜩 표정을 굳히고 선 숲스를 진료실 밖으로 밀어내며 당신 때문에 사람들 잔뜩 긴장해있는 거 안 보이냐고, 어차피 엑스레이 비전으로 밖에서도 다 볼 수 있을테니까 괜히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나가라고 밉지 않게 구박하기도 했음.

결국 인공 자궁이 순조롭게 안착하고 부작용 테스트까지 마친 후, 슈퍼맨과 딕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음.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아이는 쉽게 생기지 않았음. 자연적인 모체가 아닌 인공자궁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인간과 크립토니안 사이의 이종족 결합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음. 그게 아니더라도, 자연적인 남녀간의 커플 사이에서도 불임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음.

숲스는 굳이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내심 기대하고 들떴음은 부정할 수 없었음. 제 행성이 멸망한 이후로 크립토니안이라고는 자신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음. 실망할 수 없었음. 실패를 거듭할수록 딕이 우울해했기 때문이었음. 숲스는 제 실망감은 접어두고 딕을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

그러한 슈퍼맨도 딱 한 번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음. 거듭된 실패로 침울해하던 딕이 어쩌면 내가 당신을 이렇게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내 욕심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당신의 아이를 낳아줄 다른 여자를 찾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음.

숲스는 두사람이 함께 지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딕에게 미친듯이 화를 냈음. 누가 그깟 아이 따위 필요하다고 했냐고. 애초에 나는 멸망한 행성의 유산일 뿐이라고. 2세따윈 기대한 적도 없다고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질렀음. 딕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미안하다고 울기만 했고, 그것이 슈퍼맨의 화를 더더욱 부추겼음.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고. 네 입으로 말해보라고. 슈퍼맨이 추궁하듯 윽박지르자 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당신에게 아이를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대답했음. 그리고 더듬거리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슈퍼맨은 그게 아니라며 화를 냈음. 네가 미안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라고. 필요도 없는, 애초에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서 나로 하여금 다른 여자에게 가도록 종용한 것이 네 잘못이라고. 그러면서 덧붙이길 애초에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고. 네가 이렇게 우울해할 줄 알았으면 2세를 갖는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을 거라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음.

슈퍼맨은 만류하는 딕을 뿌리치고 호르몬 앰플과 각종 유도제와 치료제를 몽땅 쓸어서 박살내고 히트비전으로 태워버렸음. 그리고 주저앉아 우는 딕을 침실로 끌고 들어가서는 처음으로 싫다고 저항하는 딕을 강제로 잡아누르며 밤새 거칠게 안았음.

 

밤새 시달린 딕은 새벽이 되어서야 숲스에게 풀려났음. 파리한 얼굴로 기절하듯 잠든 딕의 얼굴을 슈퍼맨이 조심스레 손 끝으로 쓸었음. 수척해진 모습이 속상했음. 화를 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딕을 비난하듯 몰아붙인 스스로가 한심했음.

솔직히 말하면 한 때는, 그러니까 루터가 플래시를 죽이고 자신이 루터를 죽이기 전의 어느 과거에는 슈퍼맨도 단란한 가정을 꿈꿨던 적도 있었음. 그는 로이스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해서 아기를 갖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결심을 굳혔음. 딕이 아닌 그 누구와도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음. 어차피 자신은 크립토니안이니 지구인과의 사이에 혼혈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딕이 아이를 가지면 좋은 거고, 아니면 그냥 그뿐인 거임. 크립토니안이라는 종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멸종된다면 그게 운명인 거겠지.

로드숲은 창백한 딕을 끌어안았음. 내내 슈퍼맨의 거구에 짓눌린 채 시달린 몸이 안쓰러웠음. 체온이 낮고 숨소리가 약했음. 어쩌면 내일은 하루종일 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슈퍼맨은 온몸으로 딕을 끌어안고 제 몸의 체온을 약간 높였음. 그리고 딕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음.

예상대로 딕은 다음날 하루종일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음. 슈퍼맨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지극정성으로 딕을 돌봤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전적으로 딕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음. 딕이 임신을 계속 시도하고 싶다면 하는거고 이제 그만하길 바라면 그만두겠다고. 나에게는 네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네가 힘들어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했음.

딕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몇 번 더 시도해보고 싶다고 대답했음. 솔직히 나도 힘들다고. 하지만 나중에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다고. 그러니까 좀 더 해보겠다고. 그 대신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이 나를 위로해달라고. 슈퍼맨은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음. 다 받아줄 테니까 너도 힘들면 혼자서 참지 말고 나한테 꼭 얘기해달라고. 그러면서 슈퍼맨은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여자 얘기는 꺼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음. 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혀를 쏙 내밀면서 밉지 않게 눈을 흘겼음. 절대 안 해요. 밤새 그렇게 혼났는걸.

그리고 마침내 아기가 생겼을 때, 둘은 무척이나 기뻐했음. 얼마나 기뻐했냐면 의료진들이 보는 앞에서 둘이 얼싸안고 십여분간 말한마디 안한 채 눈물만 흘릴 정도로.

 

로드숲은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하루종일 딕의 곁에만 붙어있고 싶어했지만 딕이 말렸음. 그러지 말라고. 태어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달라고.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로드숲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음. 하필 요 몇년간 잠잠하던 레지스탕스가 요 근래에 기승을 부리고 있었음.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슈퍼맨은 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했음.

저항군을 색출하기 위한 통제와 수색이 심해졌음. 초긴장상태의 메트로폴리스는 점점 경직되어갔음. 딕은 자주 병원에 들러 몸 상태를 체크했음. 인공자궁을 이식한 남성임신 자체가 흔치 않은 케이스인데다가 평범한 인간도 아닌 이종족간의 혼혈이었음. 슈퍼맨은 부지런히 저항군을 진압하러 다니는 틈틈이 북극에 있는 연구실에 들러 임신과 출산에 관한 크립톤의 기록을 꼼꼼히 체크했음. 임신은 무사히 초기를 지나 순조롭게 중반기로 접어들고 있었음. 그리고 그 와중에 딕이 저항군 세력에 납치당함.

슈퍼맨은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음. 특히 딕의 일에 한해서라면 더더욱 그랬고, 딕이 임신한 이후로는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고가 발생한 것은 내부의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음. 단지 슈퍼맨은 몰랐던 것은 그 내부의 배신자가 다름아닌 딕 본인이라는 사실이었을 뿐.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로드숲이 브루스를 죽인 순간, 딕 역시 어느 한 부분이 망가져버린 거였으면 좋겠다. 며칠간 정줄 놓고 울기만 한 딕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머릿속이 복수로 가득차서 반쯤 미쳐버린 상황이었던 것이 옳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로드숲이 마음을 돌리고 독재를 그만둘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을 배신당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거임. 하다못해 브루스의 최후를 곁에서 지키지도 못했지. 딕에게 남은 건 섬뜩한 원한밖에 없었음.

하지만 자신이 뭘 할 수 있겠음? 인간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배트맨조차 슈퍼맨에게 끔살당했는데. 반란이 진압되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지. 그 어떤 무기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는 외계인에게 크립토나이트도 없는 자신이 무슨 복수를 할 수 있겠음. 복수는커녕 슈퍼맨에게 억류나 당해서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 딕은 슈퍼맨이 딕에게 한 짓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결심함. 딕의 연인을 죽였으니 슈퍼맨의 연인도 죽어야 공평하지. 딕은 숲스가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에서의 관심을 갖고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음.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껴왔던 낌새는 슈퍼맨이 딕을 고담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은 순간 좀 더 확실해졌음. 하긴, 그럴만도 하지. 로이스는 슈퍼맨이 철권통치를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로부터 등을 돌렸음. 배트맨 외 몇몇 저스티스로드의 멤버들이 그러했듯이.

슈퍼맨은 그 자신의 강함과는 별개로 점점 고립되고 있었고, 마음을 나눌 상대를 간절히 필요로 했음. 그런 상황에서 변함없이 제 곁에 머무르는 딕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을 거임.

 

슈퍼맨이 정말로 딕을 사랑하게 될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음. 그것도 보통의 사랑으로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최소한 딕이 브루스를 사랑했던 것만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이어야 했음.

자신이 그 정도로 슈퍼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런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차피 딕으로서는 가진 패가 없었음. 이거라도 해 보고 아니면 죽어버리지 뭐. 기왕이면 제 죽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슈퍼맨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고 싶었음.

딕은 이대로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은 채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떨쳐내며 몸을 추슬렀음. 아직은 아니었음. 제가 지금 죽어봤자 슈퍼맨은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것만큼의 슬픔밖에 느끼지 못할 테니까. 딕은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억누르며 억지로 유동식을 먹고 몸을 움직였음.

곡예사로서 무대에 오르던 어린시절부터 고담에서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이중생활을 영위할 때까지 거의 평생에 걸쳐 갈고닦은 연기실력이 빛을 발했음. 중요한 것은 억지로 가장하지 않는 거였음. 로빈일 때도, 나이트윙일 때도, 딕 그레이슨일 때도, 딕은 언제나 딕 자신이었음. 어설프게 꾸며서 연기해봤자 저 강대한 외계인의 눈을 속일 수 없겠지.

다행스럽게도 딕은 원래 슈퍼맨을 좋아했었음.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우상처럼 따랐었음. 철권통치를 시작하고 고독해하는 슈퍼맨을 감히 일개 인간 주제에 연민했었고, 그를 차마 내버려둘 수 없어서 연인인 브루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머물렀었지. 그 선택으로 인해 브루스의 죽음조차 지키지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어쨌든 원래 애착을 갖고 있었던 상대였기에, 증오심만 살짝 감추면 그를 사랑하는 연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음. 증오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감춰질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희한할 정도로 가능했음. 어쩌면 브루스가 죽는 순간 딕의 어떤 부분도 같이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름. 마치 기계라도 조립하는 것처럼 감정이라는 것의 어떤 한 조각을 임의로 끼웠다 뺐다 하는 것이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때. 딕은 최선을 다해서 슈퍼맨을 사랑하는 연기를 했음. 어쩔 때는 정말 한껏 몰입해서 이대로 이 감정에 휩쓸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듯이 브루스가 죽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음.

 

저녁시간이 채 되기도 전이었지. 느즈막한 여름해가 기울어져 하늘이 금빛 노을로 물들고 있었음. 그리고 슈퍼맨의 새하얀 망토자락 끝에 딱 한방울 떨어져있던 누군가의 핏자국. 브루스를 죽이는 것이 슈퍼맨에게 얼마나 쉽고 하찮은 일이었을지를 생각하면 우스워서 기가막힐 지경이었음. 누군가의 것일지도 모를 그 한방울의 피. 그것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서늘하게 가라앉았음.

슈퍼맨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딕이 몇 번이나 다잡았던 각오와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쉬웠음. 슈퍼맨은 이방인이었고, 이종족이었음.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환호를 한 몸에 받던 시절조차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음. 그리고 딕은 딕 자신이 외로운 사람임과 동시에 어두침침한 케이브에서 고독감을 벗삼아 지내던 브루스와 십여년을 함께한 사람이었고, 결국에는 어둠의 기사를 밝은 세계로 끌어낸 장본인이었음. 외로운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잘 알았음.

그래서 딕은 슈퍼맨이 원하는 것을 줬음. 브루스에게 끈질기게 대시했던 지난 세월들에 비하면 슈퍼맨은 게임으로 치면 이지모드에 불과했음. 당신의 아이를 갖고싶다고 속삭이면서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음. 그렇다고 저열한 기쁨을 느꼈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의무를 다한다는 느낌으로 딕은 슈퍼맨과 2세를 계획했음. 인공자궁을 안착시키는 길고 고통스러웠던 시술도 사실은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음. 생각만큼 금방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괴롭진 않았음. 결국 거듭된 시도와 실패 끝에 비로소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을 때에도, 딱히 어떠한 감흥이 들진 않았음. 그냥 이제 슬슬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순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슈퍼맨이 고담의 저항군들을 '청소'했을 때, 바바라와 팀은 탈출할 수 있었음. 정확히 따지자면 이미 배트맨을 죽여버린 슈퍼맨이 굳이 그들까지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고 봐야함이 옳겠지만. 슈퍼맨의 오만함이 딕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음. 딕은 바바라와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음. 딕 본인에 대한 납치의뢰를 하기 위해서였음. 바바라는 딕의 계획을 듣고 네가 미쳤냐며 강하게 거부했지만, 딕은 자신을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는 말로 바바라를 설득했음.

요 몇년간 점점 강화된 철통같은 보안은 딕을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지키기 위한 것이지 딕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슈퍼맨은 딕을 허무하게 빼앗겼음. 뒤늦게야 납치사실을 통보받고 눈이 뒤집혀서 딕을 찾아 나섰지만, 저항군은 번거로운 인질극을 벌일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음. 그래서 슈퍼맨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레지스탕스가 남겨두고 간 딕의 시신 뿐이었음...

 

이번에야말로 슈퍼맨은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음. 폭주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다가 스스로 자해까지 시도한 슈퍼맨은 결국 스스로가 만든 폐허의 한가운데서 탈력해 쓰러졌음. 덕분에 일정 반경 밖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반군세력은 제풀에 나가떨어진 슈퍼맨을 손쉽게 포획할 수 있었음.

슈퍼맨은 저항하지 않았음. 붉은 태양광을 켜둔 지하감옥에 갇힐 때에도 저항은커녕 죽여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음. 언젠가 들었던 딕의 숨소리와 심장소리와 어느날부터 거기에 더해지기 시작했던 아기의 작디작은 심장소리가 하루종일 그의 귓가에 울려댔음.

 

슈퍼맨은 끝까지 딕의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딕의 모습은 유일하고도 완벽했던 연인으로서의 모습뿐이었음. 그것이 그에게 일말의 위안이었을지 더욱 아득한 절망이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슈퍼은 밤낮없이 붉은 태양광이 켜져있는 감옥 안에서 날짜도 시간도 모른 채 하루종일 꿈만 꿨음. 딕이 살아있고 아기도 무사히 태어나서 정성껏 키우다가 둘째도 임신하고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어쩐지 아이의 얼굴이 흐릿한 거임. 그 좋은 시력으로도 도저히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떻게든 아이의 얼굴을 살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면 딕이 이미 죽었다는 현실이 무섭게 들이닥쳤음. 허무한 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좁은 감옥안에 갇힌 스스로의 처지를 새삼 깨닫는 거임.

몇날 며칠을 멍한 얼굴로 죽은듯이 얌전히 지내던 슈퍼맨은 가끔씩 화들짝 놀랐다가 미친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발광했음. 그래봤자 이미 초인으로서의 능력도 상실하고 몸도 약해졌으니 금방 지쳐 나가떨어질 뿐이었지만. 탈진해서 딱딱한 침대에 늘어진 슈퍼맨은 무력하게 눈을 감았음. 그리고 또다시 행복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할 꿈을 꾸기 시작했음. 영원히 반복될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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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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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한테 몽유병 비스무리한게 있었으면 좋겠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잠들었다가 두어 시간 후에 일어나서 유령처럼 저택을 돌아다니는 거ㅇㅇ;;; 그러다가 딕을 덮쳤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본인은 기억 못함(??)

 

기왕이면 딕이 브루스를 짝사랑하고 있던 중이었으면 좋겠다. 시작은 어느날 밤이었음. 딕이 자기 방에서 자다가 설핏 깼는데 브루스가 침대 옆에 서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거임. 불도 켜지 않은 채 웬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이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서있으니 어무리 대담한 딕이라도 기겁해서 놀랐겠지ㅇㅅㅇ;;; 화들짝 놀라서 브루스 뭐냐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놀란 가슴이 두근거려서 등줄기에 식은땀까지 흐를 정도였음. 그런데 브루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서있다가 터벅거리면서 방을 나서는거. 열린 문으로 나가는 발걸음은 어쩐지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음. 딕은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멍뎅하게 눈만 깜박이며 브루스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음. 뭐지. 꿈인가.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의 브루스는 여느때와 똑같은 모습이었음. 딕은 잠결에 헛것이라도 봤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음. 그날 저녁 고담의 거리는 유독 소란스러웠고, 두 사람은 다소 빽빽하게 패트롤을 돌고 새벽 늦게야 잠이들었음.

 

피곤했던 딕은 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에 눈을 떴음. 겨울이었고, 아직 완전히 아침이 밝아지기엔 좀 더 시간이 남아있었음. 침침한 눈을 비비며 옆을 올려다보자 익숙한 실루엣이 자신을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었음. 방안이 어둡고 잠결이 가시지 않았기에, 딕은 저를 향한 브루스의 시선이 미묘하게 제 얼굴을 빗겨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음.

브루스? 무슨 일이에요? 딕이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물었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브루스의 손이 귀와 뺨과 입술을 느릿하게 스쳤음. 명백하게 성적인 뉘앙스를 담은 손길에 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음.

브루스...? 팔꿈치를 짚으며 상체를 조금 일으키려 하는데 브루스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숙이더니 부드럽게 딕의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키스했음. 딕은 얼떨떨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음. 뭐지.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직 잠에서 덜 깬건가. 입술 사이로 밀고들어와 입 안을 휘젓는 리얼한 감각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음.

입술이 잠시 떨어져나가고 가느다랗게 눈을 뜬 딕은 문자 그대로 코앞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브루스의 얼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음. 너무. 지나치게 가까웠음. 서로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까지 서로의 얼굴에 닿을 지경이었음.

뒤늦게 가슴이 쿵덕거리며 뛰기 시작했음.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지. 딕이 뭐라고 어물어물 말문을 열기도 전에 브루스가 다시 키스해왔음. 명성이 자자한 브루스 웨인의 키스는 정말이지 황홀했음. 딕은 따지고 생각하고 할 것도 없이 브루스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매달렸음.

 

....공계니까 씬은 일단 생략-_-;;; 아무튼, 아무리 상대가 브루스라지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지나치게 무방비했다 싶었음. 저녁나절 내내 몸을 혹사시키고 난 후의 새벽이라서 그런가. 스스로의 신변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경계심마저 허물어져버린 것처럼, 딕은 저를 안는 브루스에게 맞춰 허덕이기에만 급급했음. 브루스가 다소 아프게 깨물어서 자국을 남길 때라든지, 성급하게 진입하는 바람에 통증이 느껴질 때조차도 딕은 브루스를 거부하지 않았음. 분명히 패트롤은 같이 돌았는데, 유난히 소란스러웠던 지난밤도 배트맨의 스테미너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인지. 브루스는 딕이 녹초가 될 때까지 몰아붙였음. 어쩌면 딕이 남자와의 관계는 처음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딕은 마지막에는 거의 납작 깔린 채 앓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만 했고, 제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인지 못한 채 기절하듯 잠들어버렸음. 그리고 느즈막한 오전에 깨어난 딕은 여기저기 결리고 뻐근한 근육통에 몇 분간 이불 속에서 끙끙거려야 했음.

소금뿌린 달팽이마냥 꿈지럭거리다가 간신히 눈을 뜨고 보니 옆자리는 비어있었음. 순간적으로 불쑥 드는 서운함은 채 인지하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음. 대신 새삼스러운 부끄러움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들뜬 기분이 딕의 머릿속을 온통 휘저었음. 딕은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눅눅한 이불에 박았음. 어떡해. 어떡해. 미쳤나봐.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도 그렇지만 브루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대?;;; 격렬했던 지난밤을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음. 딕은 손등으로 제 뺨을 식히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음.

 

머릿속에서 자꾸만 리플레이되는 어젯밤의 정사로부터 신경을 돌리기 위해 딕은 현실적인 고민에 집중하기 시작했음. 이제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젯밤의 일이 브루스와 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딕 본인은 꽤 오래 전부터 브루스를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브루스는 자신을 피후견인이자 동료이자 가족으로만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브루스도 지금까지 나를 연애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평소 언론에 비춰지는 모습을 통해 가볍다는 평을 듣고 있는 브루스였지만, 딕은 브루스가 얼마나 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음. 브루스는 결코 가벼운 감정으로 자신을 안을 사람이 아니었음.

딕은 뻐근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아래층으로 내려왔음. 그리고 브루스는 어제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모습과 말투로 딕을 대했음. 마치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브루스에게 첫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전전긍긍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브루스는 태연한 모습이었음. 늦게 일어났다고 타박하는 브루스의 목소리는 무심하기만 했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알프레드가 아침인사와 함께 식사할 거냐고 물었고, 딕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가 이내 아니라고, 괜찮다고 번복했음. 어젯밤 일에 신경 쓰느라 하마터면 알피가 곁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상한 얘기를 꺼낼 뻔했다 싶었음. 신문 너머로 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브루스가 아침 정도는 제대로 챙겨먹는 게 좋을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음. 그리고 딕이 뭐라고 대답하거나 말을 붙일 새도 없이 곧바로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음. 딕은 브루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머뭇거리면서 멈췄음.

뭔가 이상했음.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가슴이 쎄하게 가라앉았음. 다시 생각해보면 어젯밤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해프닝이었음. 사전에 그 어떤 대화나 합의도 없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따위도 전혀 없었음. 피로와 잠결에 판단능력이 둔해져서 휩쓸려버린 것처럼. 어쩌면 자신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음. 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동안 기사를 다 읽은 브루스가 신문을 차곡차곡 접어서 테이블에 내려놨음. 그리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다가 아직까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딕의 시선을 마주하고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음. 무슨 일이냐고, 괜찮은 거냐고 묻는 목소리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뉘앙스여서, 딕은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음. 브루스는 설마 어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은 걸까?

"브루스, 어젯밤에 말이에요..."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말을 꺼낸 딕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음. 브루스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딕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음. 어젯밤에 뭐냐고, 패트롤 돌 때를 말하는 거냐고 되묻는 질문에 딕은 고개를 저었음. "아뇨, 말고. 새벽에요." 갑자기 자신이 엄청나게

질척거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따지듯 말문을 열었던 목소리가 뒤로 가면서 점점 기어들어갔음. 브루스는 고담에서 가장 핫한 셀러브리티였고, 그의 재산과 지위와 명성과 외모를 보고 그를 노리는 사람은 두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였음.

문득, 브루스가 배트맨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밥먹듯이 갈아치워대던 모델들이 떠올랐음. 브루스 웨인과의 하룻밤이 무슨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하며 가십지에 떠벌리던 한 골빈 금발아가씨의 인터뷰에, 브루스는 일말의 경멸조차도 아깝다는 양 차가운 표정으로 일별했을 뿐이었음.

딕은 숨이 갑갑하게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음. 저를 쳐다보고 있는 브루스의 표정이, 마치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라고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음. 그래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음.

딕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웅얼웅얼 대답했음. 그리고 하루종일 자괴감과 참담함으로 우울해하면서 브루스의 시선을 피해 슬금슬금 겉돌아야 했음.

 

컨디션이 영 꽝이었던 딕은 패트롤 중에도 영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자잘한 실수를 반복했음. 그리고 딕이 그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을 배트맨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무슨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나보다 싶어서 웬만한 실수는 눈감고 넘기려던 배트맨이 막바지엔 정신 차리라고 나지막하게 질책할 정도였으니, 딕으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음.

두 사람은 거리 정찰을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냈음. 딕은 케이브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옷 갈아입고 제 방에 틀어박혔음.

일찌감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운 딕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계속 뒤척여야 했음. 잠자리에 일찍 들면 뭐하나. 평소보다도 훨씬 늦은 시각까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돌아눕다가 겨우 잠이 들락말락 하려는 순간에, 방 문이 조용히 열렸음.

카펫이 깔린 방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발소리.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는 기척과 체중에 눌린 매트리스 귀퉁이가 살짝 기울어지는 느낌. 오랜 자경단 생활로 인해 야생동물 수준으로 벼려진 경계심은, 익숙한 상대를 향해서는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 귓가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았음. 잠들지 못하는 밤에 지친 딕은 그 손길에 이끌리듯 눈을 떴음. 어둑어둑하게 역광을 드리운 실루엣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음.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넘겨주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음. 멍하니 브루스를 올려다보고 있던 딕은 이내 울컥 화를 내며 브루스의 손을 밀어냈음.

당신 뭐냐고, 왜 또 왔냐고. 나가라고. 보기 싫다고.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가 원망을 가득 담고 거부의 말을 쏟아냈음. 브루스의 손을 매섭게 쳐내려던 딕의 손목이 붙들렸고, 그 손을 떼어내려던 반대편 손목마저 붙잡혔음. 짧은 실랑이가 이어졌음. 당신 싫다고, 진짜 싫다고, 최악이라고 쏘아붙인 것 치고는 별로 길지 않은 반항이었음. 브루스의 입술이 딕의 눈가에 닿았음. 딕의 손목을 잡아누르고 있던 손을 풀고 그 대신 조심스레 뺨을 감쌌음. 딕은 브루스를 밀어내는 대신에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음. 아까는 왜 그랬어요. 나 정말로 상처받았어요.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훌쩍거리는 울음소리가 섞였음.

딕은 몇 번이나 키스해달라고 졸랐고, 브루스는 그 때마다 응해주었음. 무척이나 거칠었던 어젯밤과 다르게 딕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다정했음.

 

브루스가 어제보다 훨씬 부드럽게 안아주기도 했고, 아무런 경험 없이 맞이한 처음에 비하면 딕도 조금이나마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은 어제처럼 딕 혼자 일방적으로 나가떨어지진 않았음. 정사가 끝나고도 딕은 브루스에게 칭칭 팔다리를 감으며 달라붙었음. 가지 말라고. 내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놔주지 않을 거라고 찐드기처럼 달라붙은 딕은 기어이 브루스가 제 옆에 누워 팔베개까지 대주도록 만들었음. 그래봤자 곤히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여지없이 비어있는 침대에서 혼자 눈을 떠야 했지만-_-;;;

딕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눈만 깜박거리다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등으로 문질렀음. 짜증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음.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냐고.

베개에 얼굴을 쳐박고 브루스를 욕하며 찔찔 눈물을 짜낸 딕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음.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두덩이며 새빨개진 흰자위가 제 눈으로 보기에도 볼썽사나웠음.

형편없는 얼굴로 알피가 차려준 아침을 미적미적 먹고 있으려니 브루스가 내려왔음. 무덤덤한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하던 브루스는 딕의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제대로 잠을 못 잤냐고 물었음. 울컥해서 그걸 몰라서 묻냐고 대꾸하려던 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꾹꾹 눌러 삼켰음. 그리고 남은 음식을 쓸어담듯 먹어치우고 식탁에서 일어났음.

 

그날 밤, 딕 제 방 문을 잠갔음. 일찌감치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들만 하면 불쑥불쑥 서러움과 화가 치밀어 올랐음. 조금 있으려니 문고리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음. 자자. 잘 거야. 문고리 소리는 금방 조용해졌고, 딕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했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애써 잠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지기만 했음...

딕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음. 미디어룸으로 가서 다큐멘터리라도 보는 게 나을 것 같았음. 기왕이면 해양생물이 나오는 걸로. 고래도 좋고. 펭귄도 좋고. 열대 산호초 섬이 나오는 다큐라든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제 방을 나서던 딕은, 복도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있는 브루스의 모습에 움찔 놀라서 멈춰섰음.

"....브루스?"

조심스레 불러봤지만 브루스는 대답없이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음. 겨울이라 바닥도 차가운데,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음. 딕은 조심스레 브루스에게 다가갔음. 딕을 향해서 약간 고개를 돌리는 브루스의 시선은 딕의 얼굴을 향하지 않고 미묘하게 뒷쪽으로 빗겨가고 있었음.

"브루스. 왜 그래요? 안 자요?"

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면서 브루스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음. 바로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짜증과 화는 간 데 없이 브루스가 걱정스럽기만 했음. 브루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 딕은 빠르게 브루스의 상태를 깨달았음. 몽유병이구나.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젯밤과 그저께 밤의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었는지도 알게 되었음. 브루스가 저를 감정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두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따지고 실망하고 화낼 일이 아니었음. 애초에 브루스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까. 브루스가 제 마음을 갖고 놀았다고, 자신이 브루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놀아났다고만 생각했던 딕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음.

기왕에 벌어진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브루스를 방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딕은 브루스의 팔을 슬슬 잡아당겼음. 괜히 이대로 방치해 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딕은 침착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면서 브루스의 손을 잡아 끌었음.

그런데 이 양반이 두어 걸음 걷는가 싶더니 제자리에 서서는 꼼짝도 안하는 거임. 말 안 듣는 숫나귀도 아니고,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웬만큼 세게 잡아당겨서는 옴짝달싹 하지도 않았음. 딕은 초조하게 복도 너머를 돌아보았음. 브루스가 사용하는 마스터 스위트룸은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반대편 끄트머리였음.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한 대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들춰메고 가는게 낫지 않을까.

딕은 무심코 떠올린 생각을 애써 고개를 저어 떨쳐내고 브루스의 팔에 팔짱을 꼈음. 브루스, 들어가서 자요. 요새 스트레스가 심한 거예요? 왜 자는 시간까지 제대로 못 쉬고 이러고 있어요. 알피가 걱정할 거예요... 어차피 알아들을 리도 없는 말이었지만 딕은 안타까운 마음에 거듭 말을 걸었음. 난방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복도는 싸늘했고, 딕은 이제 진심으로 브루스가 걱정되기 시작했음. 방 밖으로 돌아다닐 거면 슬리퍼라도 신을 것이지, 이게 뭐야. 괜히 속상한 기분이 들었음.

"안 되겠다. 내 방이 가까우니까 내 방으로 갈래요?"

딕은 브루스의 팔짱을 끼고 반대편으로 돌았고, 여태 망부석처럼 꼼짝도 않던 브루스는 웬일인지 딕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뒤로 돌았음. 순간 지난 이틀간의 정사가 떠올라서 잠깐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브루스를 이렇게 밑도끝도없이 복도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딕은 브루스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왔고, 제 침대에 눕혔음. 그나마도 그냥은 안 누우려고 해서 제가 먼저 침대로 올라가서 브루스를 잡아당겨야 했지만-_-;;;

브루스가 제 옆에 나란히 눕자 딕은 잠시 긴장했지만 오늘 밤의 브루스는 별로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음. 모로 누워서 딕의 허리를 끌어안고 딕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은 채 금방 잠들었을 뿐이었음. 딕은 조심스럽게 브루스를 끌어안은 채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음.

그리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어났을 때, 브루스는 이미 딕의 침대를 나가고 없었음.

 

그날부터 사흘간 브루스는 딕의 방에 들러서 두어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음. 물론 다음날에는 그러한 제 행동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딕은 제 침대에서 자다가 낯익은 기척이 느껴지면 당연한 듯 옆자리를 내주었음.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 딕이 브루스를 위해 이불을 들춰주며 꾸물꾸물 옆으로 옮겨 누웠다가 자연스럽게 제 품으로 파고드는 브루스를 다독이며 끌어안았는데, 제 등을 어루만지는 브루스의 손길이 어쩐지 농밀한 거임. 자려고 눈을 감았던 딕은 당황해서 다시 눈을 떴음. 제 목에 뺨을 부비던 브루스가 쇄골과 목과 턱에 키스하는 것이 느껴졌음. 딕이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사이에 잠옷 상의가 벗겨졌음. 잠기운에 취한 몸이 익히 경험했던 애무에 서서히 반응하며 깨어나고 있었음. , 이러면 안 되는데. 딕은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브루스를 밀어내려 했음. 지금의 브루스는 말하자면 심신미약 상태나 다름없으니까.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는 상대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그런데, 그렇기는 한데, 며칠 전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브루스를 잡아끌 때도 느꼈지만 브루스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참 힘이 셌음. 아니 뭐, 솔직히 말해서 힘이 세긴 해도 딕이 작정하고 저항하면 어찌어찌 밀어낼 수야 있겠지만, 빌어먹을 놈의 키스가 너무 끝내줬음. 단숨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감각에 딕은 몸서리쳤음. 브루스는 입술을 겹친 채 능수능란한 손으로 딕의 성감대를 자극했음. 다소 거칠다 싶을 정도로 꾹꾹 눌리고 비벼지는 중심부조차 아릿한 쾌감을 느낄 뿐이었음.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리면 꿈틀거릴수록 빈틈없이 밀착한 채 내리누르는 브루스의 단단한 몸에 비벼지면서 오히려 흥분감만 고조되었음. 딕은 아연해서 눈을 질끈 감았음. 이대로 나 잡아 잡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한데. 달달 떨리기 시작한 몸은 이미 노골노골하게 풀린 채 브루스의 애무에 달큰한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음.

나 이렇게 자제력이 약한 타입이었던가. 딕은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음. 솔직히 말해서 브루스가 만약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멈추기라도 한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음.

결국 딕은 근 나흘만에 브루스에게 허리가 녹을 만큼 안겼음. 그리고 다음날 아무 것도 모르는 브루스와 마주칠 때마다 혼자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혀야 했음.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도대체 제정신도 아닌 사람 데리고 뭐하는 짓이야ㅜㅜㅜㅜ;;;; 하면서 땅파는 딕이 보고싶다. 가끔 브루스가 심하게 해대면 다음날 하루종일 허리가 뻐근할 때도 있겠지. 에고에고 영감처럼 앓는 소리 내면서 허리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브루스가 진지하게 괜찮냐고 어디 다치기라도 했냐고 걱정해주는 바람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서 대답도 못하고 어버버 어버버버 했으면 좋겠다.

한편 브루스는 언제부터인가 피곤할 때면 깊게 잠들지 못하고 기억나지도 않는 꿈속을 헤매곤 했음,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고 띄엄띄엄하던 하던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는데, 그 분위기가.... 십대시절에 야릇한 꿈을 꾸던 느낌이랑 비슷해서 괜히 떨떠름해지는 거임.

원래 예민한 구석이 있는 브루스는 피로가 심할 때면 제대로 잠을 못 자곤 했음. 그렇게 수면부족에 시달리다 보면 피로가 제대로 풀리지 않고, 그러면 그 다음날에는 더욱 신경이 곤두서고.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는 더더더더 심해지고. 결국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곤 했음.

하지만 요새는 약간 달랐음. 일단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나면 잠깐 뒤척이다가 금방 잠들기는 하는데.... 그렇게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제대로 피로가 풀리지 않고 묘하게 피곤한 느낌이었음. 그러면서도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거나 예민해지긴커녕 묘하게 신경줄이 느슨해지고 나른해지는 기분이라ㅋㅋㅋㅋ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거 참 희한했음.

 

그러던 어느날 밤, 피로에 지쳐 잠든 브루스는 예의 그 꿈을 꿨음. 뿌옇게 안개가 낀 저택을 거닐다가 장면이 휙 하고 바뀌었는데, 제 아래에서 달콤한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음. 누군가의 육감적인 몸을 열정적으로 탐하고 있던 브루스는 자신이 움직이는 족족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대를 더더욱 울려주고자 의욕이 충만했음. 안돼요 브루스, , 안되는.... 띄엄띄엄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차라리 더 해달라고 조르는 것만 못했음. 일부러 세게 박아주자 숨도 제대로 못 쉬며 허리를 들썩이던 상대가 애처롭게 매달려왔음.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입술은 축축하고 말캉했음. 브루스는 배부른 육식동물처럼 만족스럽게 웃었음. 따뜻한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음. 유연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조임이 황홀했음.


그리고 아침에 깨어난 브루스는 제 방의 뽀송뽀송한 침구에 파묻힌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음. 꿈에서 깨면 언제나 흐릿하게 기억나지 않던 상대방의 얼굴이 갑자기 플래시백 되는 것처럼 팟, 하고 떠올랐기 때문이었음. 브루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제 입을 가렸음.

꿈속에서 저에게 안겨 쾌감으로 울던 사람은 다름아닌 딕이었음.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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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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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 썰정리: 1인 1딕

DC/썰 2015. 11. 15. 15:05

DC는 뱃가에 11딕을 지급해줘야 한다. 네명의 딕이 각각 브루스 제이슨 팀 데미안의 파트너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격은 각 지구버전의 딕이어도 좋고, 넷이 전부 오리지널 딕이어도 좋다. 오리지널 딕이라면 각 파트너에 맞게 성격이나 성향이 조금씩 달랐으면 좋겠다.

 

베이스가 오리지널 딕이니까 기본적으로 제 가족들에 대한 애착이 있지만, 각자의 파트너에게 좀 더 맞춰주는 성격이었으면 좋겠다. 브루스의 딕은 거의 오리지널에 가깝긴 한데 나이트윙으로 독립한 적 없는, 브루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장난으로라도 있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옆에서 머무는 성격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가 생각하기에 아닌건 아니라고 제 할말 다 하고 필요하다면 멱살잡고 싸우기도 하는데 그래도 집을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음...

그리고 브루스가 위험한 상황에서 딕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명령할 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척 한다는) 것 정도? 브루스가 자기를 걱정한다는 걸 잘 알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몸을 사리는(척 하는) ㅇㅅㅇ;;;

제이슨의 파트너인 딕은 대등한 동료이자 연인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낄낄거리면서 같이 잘 지내다가도 사소한 일로 수틀리면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동하면 붙어먹기도 하는 관계. 슨이가 제 편인 딕을 죽이려고 들 일이야 없을테니 무기 없이 맨손으로 주먹다짐하고 툭탁거릴 때야 당연히 딕이 우세겠지. 사실 총이며 칼이며 스틱이며 각자 풀무장하고 싸워도 딕이 이길거 같긴 하지만-_-;;;

아무튼 제이슨을 바닥에 납작 깔아뭉개 제압하고 형님한테 개기지 말라며 시시덕거리는 딕을 제이슨이 침대에서 울려주는 것으로 복수하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엄청 집요하게 몰아붙여서 기어이 딕이 발발 기며 애원하게 만들고, 새벽에 지쳐 잠든 딕을 내려다보며 은밀하게 만족감을 느끼는 제이슨찡...

아무튼 제이슨을 위한 딕인 만큼 제이슨이 가차없이 살인을 저질러도 그것때문에 제이슨이랑 싸우거나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는데, 대신 제가 더 상처받은 표정으로 제이슨을 물끄러미 쳐다봤으면 좋겠다. 제이슨이 사람 몇 죽이고 나면 며칠간 우울하게 기분이 가라앉아서는 얼굴도 제대로 마주보려고 하지 않고. 이게 제이슨이 혐오스럽고 싫어서가 아니라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문제로 비난하거나 싸우기 싫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 딕의 반응이 오히려 제이슨의 속을 긁겠지.

결과적으로 딕과 함께 팀업할 때는 살인 빈도가 줄어드는 제이슨이 보고싶다. 그 대신 폭력의 강도는 증가하겠지만ㅋㅋㅋㅋ 물론 눈치빠른 딕은 그걸 곧바로 알아주어야 한다. 모처럼 대규모 갱단을 상대하면서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넘어간 날에는 딕이 평소보다도 더욱 호들갑스럽게 제이슨한테 들러붙으며 애교를 떨어줬으면 좋겠다. 물론 제이슨은 맘같아선 쓰레기같은 새끼들 대가리에 총알 한방씩 박아주고 싶은걸 억지로 꾹꾹 눌러 참은거라 심기가 불편함... 그리고 그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딕을 침대에서 괴롭히는 걸로 풀어줘야 한다. 처음에는 우리 제이가 세상에서 제일 근사하고 멋지다며 뽀뽀 쪽쪽 날리고 마냥 받아주기만 하던 딕도 나중에는 힘들다고 그만해달라고 울었으면 좋겠다.

팀의 파트너인 딕은 거의 오리지널이랑 흡사한 타입이었으면 좋겠다. 좋은 형이자 멘토이고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에 팀의 의견에도 귀를 잘 기울여줌. 가끔 무모한 상황에 뛰어들긴 하지만 팀이 따라가고 커버할 수 있는 범위이고.

나이트윙과 레드로빈일 때에는 팀이 딕을 서포트하는 형태라면 딕 그레이슨과 팀 드레이크로서는 딕이 팀을 서포트하는 형태였으면 좋겠다. 이러저러한 업무로 바쁜 팀을 위해 샌드위치를 사오고, 답답한 사무실 말고 요 앞 공원에 나가서 같이 먹자고 살살 꼬셔내서는 바람도 쐬게 해줬으면 좋겠다. 밤에 자경단으로서 활동할 때도 자기 바이크랑 페어로 팀 바이크도 맞춰주고 개조해주고 가젯도 손봐줬으면 좋겠네. 같이 패트롤 돌다가 아이스크림이나 핫도그 하나씩 사서는 가고일상에 걸터앉아서 둘이 나눠먹고. 이런저런 시덥잖은 대화도 좀 나누다가 별 것 아닌 일로 낄낄거리면서 웃음도 터뜨리고, 그러다가 뽀뽀도 쪽 하고 나머지 패트롤 돌고 그랬으면 좋겠다.

데미안의 딕은 부모 겸 형제 겸 친구 겸 멘토 겸 동료 겸 연인일 것이다. 네 명의 딕들 중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하하 웃으면서 거뜬히 감당해내는 디키쨩... 항상 데미안의 가까운곳에 있어야 하겠지.

데미안도 자신만의 딕에게 흠뻑 빠졌으면 좋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직 어린애니까ㅇㅇ;;; 개인적인 동인설정이지만 데미안은 알굴가에서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정작 특정 물건이나 사람에게 애착을 갖는 것은 금지된 채 살아온 거였으면 좋겠다. 자신이 갖고있던 물건이건, 좋아하는 옷이건, 어린시절 돌봐주던 유모라든지 시중을 들던 하인들까지도 데미안이 애착을 갖는 순간 사라지고 교체되는 일이 빈번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어떤 것에도 정을 주지 않으려 했었는데 뱃가에 와서 살게 되면서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었던 중이었으면 좋겠다. 탈리아 밑에 있을 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말 한마디면 가질 수 있었는데, 뱃가에선 아무리 떼쓰고 요구해도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배우게 되고, 그 대신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되어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되는 게 좋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딕이 생겼으니 푹 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게다가 이 딕은 완벽하게 데미안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딕이어야 한다ㅋㅋㅋㅋ 소소하게는 제 접시의 콩을 알피 몰래 대신 먹어주는 그레이슨. 보기싫은 땡땡이나 줄무늬 셔츠는 죄다 버리고 데미안이 사준 옷만 입는 그레이슨부터 해서,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서 졸린 눈을 부스스 비비며 아랫층으로 내려온 데미안을 보고 '데미안 너 요새 키 큰거 아냐?'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그레이슨이라든지ㅋㅋㅋ 호들갑스럽게 데미안 손을 이끌고 키 재는 기둥으로 데려가서는 얼마나 자랐는지 체크해보고 '우와 데미안 지난번에 쟀을 때보다 2.5센티나 자랐어!! 브루스도 열 살 때에는 n피트 nm인치밖에 안 됐다고 했었는데!!' 하고 수선을 떠는 그레이슨... 물론 여기서 데미안은 '뭐 그정도 가지고 호들갑이야.' 라고 쿨하게 대답해야 함ㅋㅋㅋ

그 외에도 데미안을 훈련시켜주는 그레이슨이라든지, 필드에서 데미안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그레이슨이라든지, 데미안이 그 임무를 수행하다가 크게 다치고 며칠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제 침상 옆을 지키며 꾸벅꾸벅 졸고있던 그레이슨이라든지, 데미안의 손을 잡으며 네 덕분에 무사히 인질들을 구출했다고, 네가 정말로 자랑스럽고 얼른 부상을 털고 일어나서 나랑 같이 패트롤을 돌았으면 좋겠다고 조근조근 속삭이는 그레이슨이라든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에게 현장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대신 도움을 청하는 그레이슨이라든지, 기타등등... 하루하루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딕에게 점점 푹 빠져버리는 데미안이 보고싶다.

 

제이슨이랑 데미안은 자신만의 딕에게 푹 빠져서 다른 딕한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데, 브루스나 팀은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브루스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필요할 때마다 딕들을 호출해서 이런저런 일을 맡길 것 같다. 브루스의 호출을 받은 딕들은 베이스가 오리지널 딕인 만큼 자신의 상황이 가능한 한(불가능하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브루스의 호출에 응할 것이다. 그리고 브루스가 맡기는 임무를 흔쾌히 수락하겠지.

브루스도 언제나 당연한 듯이 딕들의 도움을 받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가끔씩 브루스의 연락을 받은 딕들이 곤란해하는 기색이라서 브루스가 의아해했으면 좋겠다. 혹시 여의치 않다면 다른이한테 연락하겠다고 브루스가 무뚝뚝하게 말하면 아니라고, 괜찮다고, 곧 가겠다고 대답하므로 브루스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었음. 뭔가 사정이 있겠거니-_- 본인 입으로 괜찮다니까 뭐-_-;;;

그러다가 하루는 빡친 데미안이 브루스한테 그레이슨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를 통해서 얘기하시라고 돌직구로 말해서 브루스가 그제야 아.... 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요새 제이슨이나 팀도 영 표정이 안 좋았는데 그거 때문이었나 싶고, 본인은 정말 생각도 안하고 있었던 터라 당황스러운 거.

존경하는 아버지한테 대들 정도로 빡친 데미안 옆에서 항상 데미안 편이던 딕이 어쩔 줄 몰라하며 '아버지께 그런식으로 말하면 어떡해 데미안;;;' 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바람에 데미안이 더더욱 짜증났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날 이후로 브루스도 무분별하게 딕들을 호출하는건 자제하겠지.

 

브루스가 무의식적으로 이 딕도 데려다가 일시키고 저 딕도 데려다가 일시키고 그런 거였다면, 팀은 좀 더 자각을 갖고 다른 딕들을 눈여겨보는 거였으면 좋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딕은 딕들 넷 중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는데, 다른 뱃패밀리들이 각자의 딕을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드는 거였으면 좋겠다.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텐데. 나라면 절대로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지 않을텐데. 나라면 좀 더 딕을 행복하게 해줄텐데. 이런 생각이 점점 강해지는거...

특히 제이슨이나 데미안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으면 좋겠다. 제이슨은 레드후드로 활동하면서 적도 많이 만들어놨고, 워낙에 몸 사리지 않고 과격하게 싸우는 스타일이라 그러한 제이슨과 팀업하는 딕 역시 네명의 딕들 중 가장 잦은 교전횟수를 자랑하겠지. 자연스레 소소한 부상도 달고 살 거고. 가끔씩 제이슨이 사람을 죽였을 때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 할거고. 밤에는 제이슨을 침대에서 받아내느라 그나마 남은 기력까지 쪽쪽 빨리고 있을듯ㅋㅋㅋ 막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와서는 늙은이처럼 허리나 통통 두드리고 있고ㅋㅋㅋㅋㅋ 정작 딕은 제이슨과의 관계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고 있지만, 팀이 옆에서 보기에는 딕을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서 못마땅한 거.

제이슨이 혼자 밖에서 구르고 다니는 건 알 바 아닌데 거기에 애꿎은 딕까지 말려들어 고생하는게 못마땅한 팀. 저럴 바에야 그냥 웨인저로 들어오는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함.

그러다가 저택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데미안이 제 딕을 하루종일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끌고다니는 꼬라지가 보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딕과 함께하려 들면서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잘난척 발싸까지 해대는 데미안을 보고있노라면 반듯하던 팀의 얼굴이 저절로 구겨짐. 격투훈련이랍시고 오후 내내 데미안이 체육관에서 비글짓하는 걸 받아주고, 후련한 표정으로 지쳐 잠든 데미안을 보듬어 안아다가 저택의 방으로 옮겨서 재워주는 딕과 마주쳤을 때, 딕은 데미안이 깨지 않도록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며 팀을 향해 미소지었지만, 팀은 딕이 피로한 기색을 감추고 있는 걸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음. 저 이기적인 꼬맹이야 당연히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어린애나 상대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리면 딕 본인의 훈련은 어쩌라고? 싶은 생각도 들고.

브루스의 딕은 겉으로는 무척이나 안정되고 여유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꽤나 브루스랑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자주 싸움. 브루스가 독선적으로 굴 때마다 그걸 받아주고 설득하는 것도 딕의 몫이고. 다른 뱃패밀리들이랑 사이가 어긋날 때 가운데서 중재하는 것도 딕의 몫임. 그리고 제 몸 돌보지 않고 무리하는 브루스를 케어하고 강제로라도 브레이크를 거는 것도 딕의 역할이었음.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은데, 더 큰 문제는 브루스가 딕의 연심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음.

브루스는 딕이 제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이렇게 가족처럼 파트너처럼 함께하는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음. 그러므로 쓸데없는 연애감정을 끌어들여서 이 완벽한 관계를 망치는 것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음. 그래서 딕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했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딕이 다른 사람과 연인관계가 되는 것이 묘하게 불편한 거임. 물론 딕의 마음을 외면한 것은 자신이니까 딕이 누구랑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함. 머리로는 알고 있음.

하지만 가슴으로는 미묘하게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음. 브루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딕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엮이면 브루스가 싫어한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음. 그래서 스스로 타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브루스가 대놓고 드러내진 않아도 내심 안도한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음. 브루스는 딕이 딱 지금 이 상태의 어정쩡한 거리에서 머물기를 원했고, 딕은 그러한 브루스를 위해 제 욕심을 고통스럽게 억눌렀음. 그리고 심적으로 고생하는 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팀은 그 누구보다도 딕을 안쓰러워 했음. 브루스가 비겁하게 느껴졌음. 나라면 절대로 저러지 않을 텐데. 딕이 저렇게나 자신을 사랑해준다면 당연히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두 배로 돌려줄 텐데. 이래저래 안타까움과 불만이 쌓여갔음.


아무튼 제 딕과 꽁냥꽁냥하게 연애질하면서 은밀하게 반란을 꿈꾸는 팀이 보고싶다ㅋㅋㅋㅋ 딕들도 그러한 팀의 성향을 알고있는게 좋다. 그래도 팀이라면 딕이 진심으로 싫어할 짓은 하지 않을테니까 다들 믿고 지켜보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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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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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랑 딕이 데미안 데리고 시골 농장에 갔으면 좋겠다. 과수원도 있고 텃밭도 좀 있고 말도 몇마리 키우고 염소도 몇마리 있고 개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닭이랑 오리도 키우는 시골농장이었으면 좋겠다. 밭에서 나온 부산물들 먹여 키우는 소도 두어마리 있어서 매년 봄에 태어난 송아지들이 사람들 졸졸 따라댕겼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도망가는데 뒤돌아서 걸으면 또 따라와야 함. 그러다가 엄마소가 부르면 제 어미한테 쭐쭐쭐 가서 젖먹고.

건초 쌓아놓은 헛간에 괭이들도 새끼낳아서 키우고 매일아침 닭장이랑 오리장에서 신선한 알을 꺼내서 먹는 그런 시골농장이었으면 좋겠다. 근처에 호숫가도 있어서 가끔 낚시도 하고. 날씨 좋을때는 말 한마리씩 꺼내와서 외승도 한번씩 댕겨오고.

어차피 휴가차 잠시 들러서 쉬다 오는 곳이지만 딕은 착하고 동물도 좋아하니까 싹싹하게 농장일도 잘 거들어주고 그럴 것이다. 브루스는 천상 도련님이긴 하지만 딕이 살살 꼬시면서 이거저거 같이하자고 조르면 같이 잘 도와줌. 브루스가 허름한 작업복에 고무장화만 신고 있어도 딕은 우리아저씨 멋있다고 호들갑을 떨어대겠지.

 

딕이 부모님 돌아가시고 웨인저에 와서 로빈이 되고 얼마 안 됐을 때 자잘하게 부상도 당하고 성장통도 오기 시작하고 멘탈도 불안정해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브루스가 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딕이 서커스에서 자라서 동물 좋아했던 거 생각하고 농장에 처음 데리고 왔었던 거면 좋겠다. 물론 브루스는 딕을 데려다주고 한 이틀정도만 같이 있다가 먼저 고담으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2주 후에 딕을 데리러 다시 왔을 때에는 그 며칠간 눈에 띄게 안색도 밝아지고 꿩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브루스랑 딕이랑 종종 농장에 찾아왔으면 좋겠다. 딕이 어느정도 자란 이후에는 혼자서도 가끔 들르고.

요 몇년간은 바빠서 좀처럼 오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데미안까지 데리고 셋이서 같이 온 거였으면 좋겠다. 물론 데미안은 농장이라니 그딴 데를 왜 가냐고 짜증내고 내내 심드렁했는데, 정작 도착하고 나니 염소들 돌아댕기고 병아리들 뺙뺙거리면서 어미닭 따라다니고 오리새끼들도 연못에 동동 떠있고 웬 잡종개가 헥헥거리면서 꼬리 흔들어대는거 보고 조용해졌으면 좋겠다. 저쪽 멀리에선 송아지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막 이쪽을 흘끔거리는 것도 보이고ㅋㅋㅋㅋ

딕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울타리 넓게 쳐놓고 말들도 몇마리 키우고 있다고 속삭였을 때, 겉으로는 그게 뭐, 그래서 뭘 어쩌라고,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당장이라도 보러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게 눈에 빤히 보였으면 좋겠다.

 

집안에 들어갔더니 웬 장모종 뚱냥이가 냥냥거리면서 데미안 다리에 대뜸 이리저리 비벼댔으면 좋겠다. 헛간에서 살면서 쥐도 잡고 밥도 얻어먹는 날렵한 괭이들과 달리 하루종일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는 게을러빠진 괭이여야 한다. 데미안이 인상 팍 찡그리면서 괭이새끼가 바지에 털묻힌다고 툴툴거리면서 고양이를 번쩍 들어 안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뭘 얼마나 먹이길래 이렇게 무겁냐고 짜증냈으면 좋겠다. 고양이는 데미안이 짜증내건 말건 데미안의 팔에 안긴 것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이 골골거릴 것이다. 집에서 적당히 나무 재단해서 뚝딱뚝딱 못박아 만든 식탁에서 전형적인 가정식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는데, 뚱냥이가 계속 데미안 다리에 치덕치덕 비비면서 소시지 나눠달라고 졸라댔으면 좋겠다. 데미안은 사람음식 고양이한테 짜서 안된다고, 저리가라고 하면서도 고양이가 자꾸 조르니까 어쩔 수 없이 소스그릇에 물 조금 따라서는 잘게 자른 소세지 조각을 헹궈서 줘야한다. 뚱냥이는 간만에 호구 하나 잡았다고 신났는데, 데미안은 그나마 나니까 요만큼씩만 주는 거지, 그레이슨이었으면 제 접시를 몽땅 괭이새끼한테 털렸을 거라며 혼자서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타이투스는 감히 주인이 밥먹을 때 주인 음식을 탐하는 짓은 절대 안 하는데 농장에서 막 키우는 고양이새끼라 훈련도 안 되어있다면서 투덜거렸으면 좋겠다... 고양이건 닭이건 토끼건 키우는 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훈련시킬 수 있다고 믿는 꼬꼬마 데미안 어린이-_-;;;

그리고 그날 밤 잘 때 괭이가 데미안 침대 발치에 올라와서 자야함. 봄에서 여름이 되어가는 계절이라 낮에는 덥지만 아무래도 시골이다 보니 새벽에는 쌀쌀한데, 뚱냥이가 이불을 죄다 끌어다가 깔고덮고 하는 바람에 데미안이 자면서 좀 오슬오슬 추웠으면 좋겠다. 담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막 여기저기 결리고 목도 좀 잠겨있고... 그래놓고도 자고있는 뚱냥이 깰까봐 조심조심 침대 가장자리로 돌아서 내려오는 데미안ㅋㅋㅋㅋ 그리고 그레이슨과 함께하는 농장투어가 시작되어야 함.

 

브루딕뎀 세 사람이 호숫가에 낚시하러 갔는데 딕 혼자 열심히 낚아올리고 브루스랑 데미안은 멀뚱멀뚱 파리만 날렸으면 좋겠다. 데미안은 당연히 제가 제일 큰 고기를 제일 많이 잡을거라는- 혹은 제 아버지가 제일 많이 잡고 자기는 근소한 차이로 아버지보다 조금 적게 잡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잔잔한 호수에 띄운 나무보트 위에서 부자가 쌍으로 무능해야 옳다. 차라리 칼이나 작살 하나 쥐어주면서 물고기를 잡아오라 했으면 지금보다 더 많이 잡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_-;;;; 옆에서 연신 낚아올리는 딕이 처음에는 깔깔 웃으며 두사람 뭐냐고 놀리다가 나중에는 제가 더 무안해질 정도였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슬슬 돌아가자 싶을 때 데미안이 손바닥만한 고기 한마리를 잡아서 딕이 호들갑스럽게 칭찬해졌으면 좋겠다. 내심 시무룩해져있던 데미안은 또 그거갖고 우쭐해져야 함.

집으로 돌아와서 좀 쉴까 싶은데 딕이 체리 따러 가지 않을래? 닭 모이 주러 가지 않을래? 하고 자꾸만 불러서 가만히 방구석에 앉아있을 새가 없어야한다. 닭 모이 주면서 병아리들 뺙뺙거리는 모습을 넋놓고 쳐다보고 있던 데미안이 무심코 헛간에 사는 고양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근심스러운 얼굴을 했으면 좋겠다. 딱딱한 펠렛모이를 부스러뜨려주고 있던 딕이 제 등을 툭툭 두드리는 데미안의 손가락에 왜그래? 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데미안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저 고양이들이 병아리들 해치면 어쩌냐고 물어봤으면 좋겠다. 딕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면서 괜찮다고, 어차피 밥도 따로 주는 애들이라 쥐나 두더지나 벌레같은 것만 잡는다고. 굳이 병아리를 잡으려 하지도 않고 병아리들도 어미닭이랑 붙어있으니까 괜찮다고. 밤에 닭장에만 잘 집어넣고 문만 잘 잠그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줘서 데미안이 안도했으면 좋겠다.

농장에서 키우는 개는 아무리 얼굴을 뜯어봐도 도대체 족보를 알 수 없는 잡종개였으면 좋겠다. 다만 리트리버랑 비글이 섞였는지 사람을 엄청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이어야 한다. 낯선 사람만 봐도 무조건 좋다고 꼬리를 흔들어대고 발라당 배를 보여주는 탓에 집지키는 능력이 한없이 0에 가깝게 수렴하는 녀석이었으면 좋겠다. 머리는 꽤 좋은편이라서 가끔 오는 딕이나 브루스도 잘 기억하고, 데미안이 브루스와 딕의 가족이라는 것도 알아서 스스럼없이 데미안한테 다가와서 꼬리치고 손도 핥고 그랬으면 좋겠다. 데미안이 흥, 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개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요모조모 타이투스랑 비교해보고, 모든 면에서 타이투스가 훨씬 잘나고 훌륭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내심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알고보니 얘는 암컷에다가 새끼까지 밴 만삭이라서, 새끼 밴 동물들을 접해본 적이 없던 데미안이 반박자 늦게 둥실둥실한 배나 퉁퉁 불은 젖을 발견하고 좀 어색해했으면 좋겠다. 이집은 고양이도 뚱냥이더니 개도 뚱뚱하네, 하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살찐 게 아니라 새끼를 배서 그랬던거.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소파에 앉아있는데 아니나다를까 뚱냥이가 냉큼 데미안의 무릎 위로 올라와야 한다. 데미안은 혹시 얘도 암컷인가, 새끼라도 뱃나 싶어서 두근두근 살펴봤는데, 새끼는 고사하고 중성화수술된 숫넘이라 짜게 식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뚱냥이는 그날 밤에도 데미안의 발치에 찰싹 달라붙어서 잤음. 새벽녘에는 이불을 죄다 빼앗겨서 데미안 혼자 오들오들 떨어야했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콧물이 쪼르륵 흐를정도로-_-;;

 

농장에 두 마리 있는 송아지들은 아직 어려서 풀어놓는데, 호기심이 많아서 사람만 보면 쭐래쭐래 따라왔으면 좋겠다. 15미터 떨어져서-_-;;;; 가뜩이나 데미안은 몸집이 작으니까 송아지들도 경계심을 덜 느끼는지 데미안이 밖에만 나오면 송아지들이 따라붙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막상 데미안이 가까이 가려고 하면 슬금슬금 뒤돌아서 도망갔으면 좋겠다. 15미터쯤 떨어질 정도로만-_-;;; 아직 엄마소 젖먹는 애들이라 먹이로 꼬시는 것도 못함.

말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브루스의 소유인데, 매 달 농장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위탁으로 키우는 거였으면 좋겠다. 대회용으로 훈련시키진 않았지만 워낙에 혈통부터가 좋은 말들이고, 돈을 팍팍 들이는 만큼 깨끗하게 관리된 널찍한 마사에서 좋은 먹이를 먹여 키우는 터라 반질반질 윤이나는 건강한 녀석들이었으면 좋겠다. 평소에는 울타리 안에 풀어놓고 키우다가 브루스랑 딕이 농장에 들를 때면 데리고 나와서 외승을 즐기곤 하겠지. 데미안은 웬만한 동물들을 다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말들은 특히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손수 사과도 쪼개주고 당근도 잘라주고 버릇될까봐 많이 주진 못하지만 각설탕도 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특히 종마로 쓸법한 숫말 한마리에 꽂혔는데, 이녀석은 자존심이 세서 브루스만 태우는 놈이라 꼬맹이인 데미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데미안이 내심 자존심 상했으면 좋겠다.

 

농장에서 며칠째 지내던 어느날 밤, 곤히 잠들었던 데미안이 왠지 집안이 수선스러워서 깼으면 좋겠다. 무슨일이지 하고 눈 비비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마침 딕이 겉옷 하나 걸치면서 집을 나서고 있는 것이다. 뭐냐고, 어디가냐고 데미안이 졸린 목소리로 묻는데 딕이 깼냐고, 미안하다고. 농장에서 키우는 개가 지금 새끼를 낳으려고 해서 가보려고 한다고. 너는 다시 올라가서 자라고 대답했으면 좋겠다. 데미안은 잠이 번쩍 깨겠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걔가 지금 새끼를 낳는 거냐고, 근데 막 사람이 가서 봐도 되냐고, 불안해져서 새끼 물어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제가 더 안절부절 못했으면 좋겠다. 그럼 딕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키운 녀석이고 이번이 초산인데 노산이라 오히려 사람이 옆에 있어줘야 안심할 거라고 대답하겠지. 그러면서 뭐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달복달하는 데미안한테 슬쩍 웃으면서 '너도 같이 갈래?' 하고 물어보니까 데미안이 잠깐만 기다리라며 겉옷 하나 챙겨갖고 후다닥 내려왔으면 좋겠다.

딕이랑 데미안이 찾아갔을 즈음엔 창고 한구석에 칸막이 세우고 볏짚 넉넉히 깔아 만든 보금자리에서 개가 낑낑거리면서 두 마리째의 새끼를 낳고있던 중이었으면 좋겠다. 야생성이 떨어지는 녀석이라 탯줄도 사람이 소독한 가위로 잘라주고 젖은 강아지도 사람이 수건으로 박박 닦아서는 어미한테 젖 물려주고 있었으면 좋겠네. 둘째가 나오자마자 브루스가 탯줄 실로 묶고 가위로 끊고 수건에 싸서 데미안한테 양수 닦아주라고 건네줬으면 좋겠다.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생전 처음으로 보는 데미안은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해서 가슴이 콩닥콩닥 하다가 얼결에 강아지 받아들고 신기해하면서 조심조심 닦아줬으면 좋겠다. 눈도 닫혔고 귀는 머리통 옆에 부스러기처럼 쬐만하게 붙어서는 입벌리고 삐약거리고 우는데 이빨이 하나도 없어서 이게 내가 아는 개라는 생물이 맞긴 맞는 건가 싶고 얼떨떨하겠지.

어미개는 계속 아프다고 깨갱거리는 소리 내고 울면서 새끼 낳고있고. 마지막 여섯마리째를 낳았을 때엔 거의 지쳐서 뻗어버리겠지. 그런데 유독 몸집이 작은 막내 강아지가 숨을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데미안이 가슴이 철렁해서 조마조마 쳐다보는데 딕이 주저없이 강아지 코와 입에 들어찬 양수를 빨아내고 가슴 조물조물 마사지해주면서 제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으면 좋겠다. 코랑 발바닥이 파리해서 축 늘어져있던 강아지가 어느 순간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다가 빽빽거리고 우는 모습을 숨소리까지 죽이고 지켜보는 데미안... 막내 강아지가 좀 작긴 하지만 여섯 마리의 새끼들이 전부 건강할 것이다. 꼬물거리는 강아지들이 각자 어미젖에 달라붙어서 열심히 젖을 빨아대는거 완전 귀여울 듯. 브루스가 어미개 머리 토닥토닥 쓰다듬어주고 가위며 실이며 태반이며 싹 정리해서 딕이랑 데미안이랑 같이 창고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딕이 데미안한테 웃으면서 수고했다고 하는데 데미안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으응,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으면 좋겠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 어둑어둑한데, 씻고 옷갈아입고 제 침대로 돌아와 누웠는데도 괜히 가슴이 뛰어서 잠이 안 오겠지. 결국 다시 자는 걸 포기한 데미안이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제 몸 밑에 깔아놓고 자고있는 뚱냥이나 끌어안았으면 좋겠다.


며칠간의 휴가를 즐기고 고담으로 돌아가는 날, 차 뒷좌석과 트렁크에는 농장 주인아저씨가 바리바리 싸준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각종 채소며 과일이며 집에서 직접 말린 허브며 기타등등. 염소젖도 몇 병 있고, 볏집으로 엮어서 쌀겨를 가득 채운 바구니에 오늘아침에 낳은 계란이며 오리알도 몇 개씩 싸주고. 올 때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뚱하게 투덜거리던 데미안이 가는 길에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창 밖만 내다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딕이 그런 데미안을 슬쩍 돌아보고 "재밌었지? 가을에도 또 올까?" 하고 묻자, 데미안이 잠시 조용하다가 ", 네가 오고싶다면 같이 와줄 수도 있고." 하고 츤츤거리면서 대답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다음에 올 때는 타이투스도 같이 데려오면 어떨까 고민하는 데미안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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