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딕으로 기억잃은 딕을 데리고 도망친 제이슨이 보고싶다. 배트맨이나 저스티스 리그가 찾지 못하도록 아예 다른 지구로 넘어가버려도 좋겠다. 대규모 재해상황이 벌어져서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각지의 히어로들이 총력을 기울이던 중 딕이 크게 다쳤는데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주워온 거였으면 좋겠다.

 

원래 두 사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으면 좋겠군. 조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가 되돌아온 제이슨은 배트맨을 위시한 뱃가 구성원들을 증오하고 있었고, 딕은 딕 나름대로 제이슨이 하도 이놈저놈 죽이고 돌아다니고 + 딕 본인은 둘째치고서라도 팀과 데미안까지 위협하고 + 사사건건 난입하고 깽판을 치니까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제이슨의 빨간 헬멧만 눈에 들어오면 으르렁거리면서 경계할 듯. 그런 딕의 태도가 제이슨을 더더욱 부채질해서 두 사람 사이가 말도 못하게 살벌했으면 좋겠다. 특히 제이슨은 딕 자체가 밉다기보단 브루스가 제일 아끼는 것이 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딕을 망가뜨림으로써 브루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은 거고, 딕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제이슨을 가차없이 대하겠지.

 

뱃가와 레드후드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점점 고조되고 있었음. 그러한 와중에 동해안의 주요도시를 휩쓰는 재난상황이 발생했고, 크게 다친 나이트윙을 레드후드가 발견했음. 의식 없이 건물 잔해 사이에 방치된 나이트윙을 내려다보며 레드후드는 소리없이 전율했음.

딕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살벌하게 날을 곤두세우며 신경을 긁어대곤 했었음. 그 재수없는 면상을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주고 팔다리를 작신작신 부러뜨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 제이슨이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할 때마다 차갑게 코웃음을 치는 딕을 볼 때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음. 그리고 지금 나이트윙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의식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음. 마스크까지 박살나서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지만 어차피 여기저기 멍들고 피칠갑이 되었으니 누군가가 발견하더라도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싶었음. 제이슨은 묘하게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낌.

제이슨이 생각하시에 배트맨 이하 고담의 자경단원들은 하나같이 역겨운 위선자들이었음. 그중에서도 배트맨이 각별히 애지중지하는 나이트윙이라면 두말 할 여지조차 없었고. 재수없고 짜증나는 나이트윙이 피떡이 된 채 널부러져있는데, 그 한심한 꼬라지를 보면서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음.

하긴, 박살내도 내 손으로 짓밟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제이슨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나이트윙에게 다가갔음.

신발 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아도 나이트윙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음. 쭈그리고 앉아서 목에다가 손가락을 대보았지만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음. 비릿한 쇠냄새가 물씬 풍겼음. 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갑을 벗고 다시 손 끝을 딕의 목에 가져다 댔음. 아주 미약하고 느린 맥박이 느껴졌음.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니 꼬라지가 참 가관이었음. 거대한 괴수가 껌처럼 씹다가 뱉어내면 이런 몰골이 되려나. 하여간 아무리 날고기는 히어로라고 해봤자 초능력이라곤 개뿔도 없이 피와 살로 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지 싶었음.

제이슨은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음. 폐허에 가깝게 초토화된 거리에는 빈집털이범들이나 갱단 끄나풀같은 놈들만 몰려다니며 상점이나 공공기물을 때려부수고 있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음. 어떻게 할까. 맥박과 호흡은 약하지만 안정되어 있는데. 네가 출혈과 저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배트맨이 제가 아끼는 골든보이를 찾아내는 것이 빠를까. 제이슨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사이에 쇼윈도가 박살난 상점을 털던 잔챙이들 몇몇이 레드후드를 알아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음.

 

결국 제이슨은 딕을 제 세이프하우스 중 하나로 데리고 왔음. 중환자를 이송하는 조심스러움은 없었지만 어차피 죽으면 제 팔자인 거고. 살 놈이면 어떻게든 살아나겠지. 제이슨은 딕을 데려와 응급처치를 하고 제 침대에 눕혔음.

시간은 무던하게 흘러갔음. 딕의 상태는 악화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음. 무엇보다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음. 제이슨은 그러한 딕의 곁에 머물렀음. 문자 그대로, 머무르는 거였음. 중환자인 딕을 마냥 방치해두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극진하게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음.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걸 보면서 상처가 아물고 있나보다, 열이 나면 열이 나나보다, 낮아졌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돌아오나보다, 그냥 그러고 말았음. 물론 그때그때 필요한 의료적 처치는 꼬박꼬박 해주고 있었지만. 막말로 당장 딕의 심장이 멎어버려도 그냥 그러려니 싶을 것 같은 기분이었음. 처음 이틀 정도는 지금쯤 딕의 실종을 알게 되었을 배트맨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려면 어때 싶었음.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갔고, 딕이 깨어났음.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반듯한 미간이 찡그려졌음. 링겔의 투약량을 조절하고 있던 제이슨은 못박힌듯 그자리에 멈춰서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촘촘한 속눈썹이 떨리는가 싶더니 창백한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열렸음. 제이슨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딕의 얼굴을 응시했음. 제이슨 본인도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딕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푸른빛이 선명했음. 초점 없이 무방비하게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에 서서히 이지가 깃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빈말로라도 딕과 사이좋다고 할 수 없는 제이슨에게조차 기묘한 충격으로 다가왔음.

나에게 독한 말을 쏘아붙일 때에도 네 눈동자는 그렇게 새파랬겠지. 그러고 보니 무기질적인 화이트렌즈를 통해서가 아닌 딕의 맨눈을 마주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음. 제이슨은 물끄러미 딕을 내려다보았음.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 깜박거리던 딕의 눈동자가 간신히 제이슨을 올려다보았음. 딕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타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에서는 바람소리만 새어나왔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딕의 입안을 적셔주기 위해 물을 가지러 갔음. 그리고 거즈에 물을 적셔 돌아왔을 때, 딕은 다시 잠들어있었음.

 

일단 의식을 되찾고 나니 회복은 순조로웠음. 딕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딕이 정신을 차린 후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음. 그 때까지 기계적으로 딕을 간호하던 제이슨은, 묽은 유동식을 조금 먹고 자리에 누운 딕이 여기는 어디며 당신은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순간 동작을 딱 멈추었음.

무심하게 쟁반을 들고 일어나던 제이슨은 저도모르게 딕을 휙 돌아보았음. 안면근육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음. 가슴 한 쪽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음. 아니, 어쩌면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 같기도 했음. 거의 뚫어져라 노려보는 제이슨의 시선에 딕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제이슨으로서는 그러한 딕의 반응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음.

제이슨이 딕을 발견해서 제 세이프하우스로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 따위는 없었음. 그저 우연히 딕을 발견했을 뿐이고, 제 선에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은 그에 맞는 처치를 했을 뿐이었음. 딕이 점점 회복되어 의식을 되찾았을 때조차도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음. 평소의 그답지 않은 느슨함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음. 이번 일을 기회삼아 무언가를 해볼 생각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신창이가 된 나이트윙은 제이슨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음. 제 팔자가 죽을 팔자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나이트윙을 치료하면서도 제이슨은 내내 시큰둥하기만 했음.

그런데, 딕에게 기억이 없다는 거임.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음. 배트맨이 혈안이 되어서 딕을 찾고있을 것이 분명했음. 지금 이 순간에도 추적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을 터였음.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이슨은 배트맨이 찾아오건 메트로폴리스의 빅블루가 찾아오건 거리낄 것이 없었음. 엉망으로 다쳐서 적에게 구조된 나이트윙과, 그런 나이트윙을 이제서야 찾아낸 배트맨의 무능력함을 실컷 비웃고 조롱해주며 참담해하는 배트맨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저열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었음. 자존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속칭 고담의 히어로들을 만날 때마다 두고두고 들먹이며 조롱해줄 건덕지가 생기는 건 덤이었고. 이래저래 제이슨으로선 아쉬울 것이 없었음.

하지만 지금은, 기억 잃은 딕을 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음.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음. 딕은 제 수중에 있었음.

 

제이슨은 나이트윙이 얼마나 완고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음. 이번 일을 빌미로 다시는 제이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조건을 내건다 해도 나이트윙이 그것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만무했음. 아무리 목숨을 빚졌다 해도 딕은 사사건건 제이슨을 방해하려 할거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들을 보호하겠답시고 제이슨에게 날을 세울 테고, 살인을 저지르려 하면 훼방을 놓고 일을 파토내려 들 것임에 틀림없었음.

그렇다고 제이슨이 부상당해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나이트윙을 감금하고 괴롭히고 폭행한다 해도, 그는 꺾이지 않을 거임. 다친 상태의 나이트윙을 망가뜨리고 짓밟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 결국 제이슨이 기껏 나이트윙을 주워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번거롭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치료나 해주고, 박쥐가 나이트윙을 찾으러 오건 나이트윙이 알아서 기어나가건 제 갈길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밖에 없었음.

하지만 나이트윙이 아닌, 기억이 없는 딕 그레이슨이라면 달랐음. 제 수중에 있어도 결코 제것이 되어주지 않을, 그래서 결국에는 그냥 풀어줘야 할 새가 아니었음. 제이슨은 전율했음. 지금이라면. 이대로 박쥐의 시야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딕의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던 제이슨은, 밖에서 들려오는 파열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음. 불안한 표정의 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음. 창밖에선 바이크를 탄 갱단원들이 폐허가 된 거리를 질주하며 소란을 피워대고 있었음 제이슨은 다시 딕에게로 고개를 돌렸음. 아직 다친게 다 낫지 않아 여기저기 멍들고 파리한 얼굴이 제이슨을 올려다보고 있었음.

"괜찮아 딕. 겁먹게 해서 미안해. 봐서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은 우리가 형제라는 것만 말해둘게 너는 많이 다쳐서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여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아.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줘."

미리 준비하거나 연습했던 것도 아닌데,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은 술술 잘만 나왔음. 딕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슨이 딕의 어깨를 놓고 일어나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제이슨의 소매를 붙들었음. 제이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을 생경한 기분으로 마주보다가, 딕의 손등에 조심스레 제 손을 겹쳤음.

"괜찮아. 금방 올게. 너를 차에 태워서 이동하려면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제 소매를 잡은 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의 이마에 입을 맞췄음. 놀란 듯 파란 눈을 크게 뜨는 딕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앗차 싶었지만, 딕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적당히 무마했음.

급하게 방을 나서는 제이슨의 발치에 플라스틱 쟁반이 채였음. 제이슨은 짧게 심호흡을 했음. 심장이 쿵쿵 울렸음. 박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추적의 단서가 될만한 흔적을 지워야 했음.

 

제이슨은 딕과 함께 다른 도시로 옮겼음. 딕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차량을 이용한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음. 새로운 가명과 현금으로 적당한 맨션을 수배해서 빌린 제이슨은 고작 몇시간 흔들리는 차를 탄것만으로 상태가 악화된 딕을 정성껏 돌보았음. 어쨌든 딕은 젊었고, 제이슨은 부상자를 돌보는 것에 의외로 괜찮은 재능을 갖고 있었음.

딕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끝장나버릴 수 있는 상황이건만, 제이슨은 개의치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음. 딕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혹시 기억이 돌아올 조짐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캐물었다가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음.

흑발에 푸른눈을 가진 건강한 체격의 두 청년들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형제로 받아들여졌음. 젊은 총각이 아픈 형 돌보느라 고생한다는 것이 수다떨기 좋아하는 근처 젊은 엄마들의 중평이었음. 제이슨은 특유의 날카로운 살기를 갈무리한 채 양의 탈을 쓰고 주변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음. 딕의 회복은 순조로웠고, 두어달이 채 지나기 전에 부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음.

그동안 제이슨과 딕은 무척이나 친밀해졌음. 딕은 자신에게 제이슨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미안해했고, 제이슨은 그러한 딕에게 괜찮다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어른스럽게 대답해주었음. 외상은 거의 아물었지만 딕은 아직까지도 잦은 두통에 시달렸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거나 하면 금세 어지러움을 호소했음. 자연스레 신문이라던지 인터넷 기사같은 것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소소한 사실조차 제이슨에게는 유리한 측면이었음.

현금은 충분했지만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제이슨은 적당한 파트타임잡을 구했음. 딕을 집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좀 걱정되었지만 원체 사교성이 좋은 딕은 금세 이웃 주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옆집 아주머니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 어설프게 만든 스페인식 빠에야가 식탁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올리며 제이슨을 맞이하는 생활은 나쁘지 않았음.

 

"우리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나봐."

어느 날 저녁,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마친 후 소파에 늘어진 딕이 문득 말을 꺼냈음.

"그건 갑자기 왜?"

제이슨이 무심하게 물었고, 딕은 그냥, 하고 대답했음.

"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해."

딕은 소파 아래 러그가 깔린 바닥에 앉아있는 제이슨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어. 너는 나한테 무척이나 소중한 동생이었나봐."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음. 그렇다고 굳이 딕을 밀어낸 것도 아니었지만.

 

제이슨은 나날이 심란해졌음. 무방비하게 저에게 웃는 딕을 마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하면서도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음. 제이슨을 경계하지 않는 딕을, 제이슨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딕을, 제이슨을 유일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웃고 말하고 친근하게 부대끼는 딕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어째서 그가 그토록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음. 파란 눈동자에 친애를 가득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음.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형제라고 말해두는 게 아니었는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인 과거의 자신이 한심했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제이슨을 딕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제이슨이 일을 쉬는 어느 휴일날, 딕은 제이슨에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고 넌지시 물었음. 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이슨의 표정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엔 애매했지만, 빈말로라도 편해보이지는 않았음. 문득 제이슨이 딕의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딕은 싫은 기색도 없이 눈을 감으며 제이슨의 손바닥에 기대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음. 뺨에 닿는 제이슨의 손은 크고 거칠었음. 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이슨은 어쩐지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음.

"고민거리가 있으면 혼자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줘. 둘 뿐인 가족이잖아. 숨기려고 하지 말아줘."

딕이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제이슨은 씹어뱉듯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고 대답했음.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당황한 딕이 뭐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홱 잡아당기며 얼굴을 바싹 끌어당겼음. 딕은 반사적으로 제이슨을 뿌리치려 했지만, 제이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딕의 손목을 붙들어 제 쪽으로 당겼음.

가만히 있으라고. 잠시만 피하지 말아보라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어쩐지 절박하게 느껴져서, 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껌벅거렸음. 제이슨이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을 때도 딕은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음.

"기억나?"

제이슨이 물었고, 딕은 멍청하게 제이슨을 쳐다보고 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제이슨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키스했음.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등줄기를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주자 체리보이처럼 잔뜩 긴장한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음. 마시멜로처럼 말캉한 혀는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거나 피하지도 않았음. 제이슨은 아예 이대로 딕을 쓰러뜨려버릴까 고민하다가 눈에 띄게 긴장한 딕의 모습에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음.

"우리는 같은 집에 입양된 고아였어.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의 이런 관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왔던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제이슨이 찬찬히 설명했고, 놀라고 당황한 얼굴의 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음. 제이슨의 시선이 딕의 입술을 향했고, 딕은 그제서야 뒤늦게 얼굴을 붉혔음.

"미안해, 제이슨. 기억나지가 않아."

디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제이슨은 어른스럽게 괜찮다고 대답했음.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딕의 모습에, 제이슨은 은밀한 만족감을 느꼈음. 상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따윈 자리할 구석이 없었음.

 

그 날 이후로 제이슨은 천천히, 그러나 명백하게 형제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스킨쉽을 시작했음. 퇴근해서 돌아온 제이슨을 반갑게 맞이하는 딕을 마주 끌어안으며 늘씬한 등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분명한 성적 함의가 담겨있었음. 딕은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는듯 했지만 이내 적응해나갔음. 그리고 하루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저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미안해했음.

제이슨은 혹시라도 자신이 딕에게 하는 스킨쉽들이 불쾌하거나 싫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딕에게 당부했음. 네가 불편해하면 그 즉시 멈추겠다고. 그리고 그런 제이슨에게 딕은 싫지 않다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오히려 책망하듯 대답했음.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네가 닿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냐고. 어린애처럼 자신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었음. 딕이 종알거리면서 입김이 닿은 귓불이 근질거렸음.

목 안쪽에서 들끓는 뜨거운 덩어리를 꾸욱 삼킨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살짝 밀어니며 애써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음. 저를 올려다보는 딕의 표정은 머릿속이 꽃밭이라도 되는 양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음.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을 잡아당겨서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음. 등과 허리를 더듬어 내려간 손아귀가 엉덩이를 주무르듯 움켜쥐더나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음. 맞붙은 고간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느껴져서, 딕은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음. 거듭 입술을 겹치며 딕을 어루만지던 제이슨이 간신히 떨어져나가서는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섬주섬 변명하는 제이슨을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던 딕은, 이내 제 쪽에서 제이슨을 잡아당기며 어색하게 끌어안았음. 제이슨이 다시금 사과했고, 딕은 고개를 저었음. 좀 놀랐을 뿐이라고.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더 미안하다고. 그냥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거라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이후로는 딕에게 일체의 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접촉을 하지 않았음.

 

두 사람은, 겉으로는 예전의 형제같은 관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음. 시덥잖은 식사준비를 하면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제이슨이 파트타임 일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 즈음에 맞춰서 딕이 산책 겸 마중을 나가기도 했음. 게임기를 TV에 연결해놓고 레이싱 대결을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서로 빈정상해서는 옥신각신 쌈박질을 벌이기도 했음.

그날도 다르지 않았음. 대전 격투게임이 실제의 우격다짐으로 번져서 신나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어느 날, 물끄러미 딕을 쳐다보던 제이슨이 중얼거렸음. 안고 싶어. 발라당 드러누운 채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던 딕이 제이슨을 마주보며 해사하게 웃었음.

"그래."

쾌활하게 대답한 딕이 두 팔을 벌려 제이슨을 와락 끌어안았음. 제이슨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딕의 팔을 떼어냈음. 양 손으로 딕의 상완을 움켜잡고 밀어내며, 제이슨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짜증내듯 말했음. 제이슨을 빤히 쳐다보는 딕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음.

"....내가 생각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조용하게 대답하는 딕의 목소리는 쓸데없이 침착했음. 그래서 제이슨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음.

* * * * * * *

 

제이슨은 스스로를 자제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음. 속고 있는 딕으로서야 모르겠지만 이것이 둘의 첫경험이었으니까. 딕의 옷을 벗기는 손이 갓 열여섯을 지난 애송이마냥 초조하게 떨렸음.

딕의 안에 들어간 순간, 제이슨은 어쩌면 자신이 바랐던 것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음.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이트윙에게 그렇게나 바득바득 화를 내며 달려들었던 것은 처음부터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대립하던 시절이 까마득하게 먼 과거처럼 느껴졌음.

딕은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했던 것치고는 좀 많이 아파하는 것 같았음. 신경이 좀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멈추기엔 너무 기분이 좋았음. 제이슨은 주의깊게 딕의 반응을 살피며 괜찮냐고, 많이 힘드냐고 틈틈이 물었음. 물론 여기서 딕이 힘들다고 대답한다 해도 그 즉시 멈출 수 있을지는 본인으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딕이 너무 아파하기만 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세를 좀 바꿔볼까 하고 몸을 뒤로 무르던 제이슨은, 딕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이슨을 올려다보며 괜찮다고, 계속하라고 속삭이는 순간 본능에 굴복했음.

아픔과 쾌감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제 밑에 깔려 우는 딕의 모습은 환상적이었음. 이대로 영원히 딕의 안에 제것을 묻어두어도 좋을 것 같았음. 사랑해. 디키버드. 때려죽여도 제 입에서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낯간지러운 말이 잘도 튀어나왔음. 더더욱 신기한 사실은 그것이 진심이었다는 것이었음.

 

 

딕의 몸을 갖게 됨으로써 더더욱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음. 이 관계를 절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새삼스러운 불안감이 스물스물 번져올랐음. 제이슨은 초조해졌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도시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았음.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저 창문을 박살내며 분노한 배트맨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음.

가끔씩 불안감과 초조함이 극에 다다랐을 때, 제이슨은 딕을 거칠게 대하곤 했음. 속도 없는 딕은 그러한 제이슨을 한없이 받아주었음. 고분고분히 저에게 안긴 몸에 짜증과 울화와 신경질을 죄다 쏟아붓고 나면 가슴 한구석에 막막하던 불안감이 약간은 해소되는 느낌이었음. 그렇게 내내 시달리던 딕이 지쳐 잠든 새벽이면 제이슨은 울적하게 딕을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곤 했음. 딕은 대부분의 경우엔 완전히 잠들어서 제이슨의 사과를 듣지 못했지만, 가끔씩 잠결에나마 제이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제이슨을 마주 끌어안아주곤 했음.

다친 딕을 무작정 데리고 들어와서 함께 살게 된지 몇 달밖에 안 되는 맨션이었지만, 어느새 둘만의 추억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음.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았던 딕은 이웃들과도 꽤나 친해져 있어서, 제이슨은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음. 그랬기 때문에 어느 날,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딕한테 이사가자고 말했을 때 딕이 의외로 싫은기색 없이 그러자고 대답해서 제이슨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안도했음.

 

예전에는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까봐 딕에게 과거가 기억나는지 캐묻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던 제이슨이, 언제부터인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며 혹시 뭔가 기억나는게 있냐고 추궁하듯 묻기 시작했음. 그럴 때마다 딕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대답했음. 그러면 제이슨이 딕을 끌어안으면서 괜찮다고, 어차피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너랑 내가 이렇게 함께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예전 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거임. 딕은 그럴 때마다 네 말이 맞다고,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고 대답하곤 했음. 일말의 의심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슨은 죄책감을 애써 억눌러야 했음.

 

제이슨과 딕은 새로 옮겨간 도시에서 채 넉달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음. 그 다음부터는 딕이 오히려 먼저 나서서 우리 이사 가자고, 이 동네는 너무 덥다고 or 춥다고 or 지루하다고 or 번잡하다고, 나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 가보고 싶다고 제이슨에게 졸랐음.

제이슨은 처음 두어번 정도는 집을 옮길 때마다 파트타임 잡을 구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그만두고 차명계좌에 모아둔 돈이나 쓰면서 하루종일 딕이랑 집에서만 머물렀음. 그 즈음에는 딕도 이웃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을 그만두었음.

 

수시로 신분증을 바꾸고, 계좌를 바꾸고, 외출할 때마다 가명을 쓰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부터 영원히 숨을 수는 없었음.

 

그리고 더이상 머물 수 없을 보금자리에 배트맨이 들이닥친 날, 제이슨은 딕의 기억이 이미 진작에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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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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