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딕

DC/단편 2016. 2. 21. 02:32

** 늦었지만 박쥐아즈씨 생일 축하8ㅅ8;;;



바다에 인접한 항구도시답게 고담의 겨울은 차갑고 습했다. 해마다 발목이 파묻힐 정도로 쌓이는 눈은 도시의 명물이었다. 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범죄율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부유함은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였다. 11월 중순부터 일찌감치 불을 밝히기 시작한 거리는 크리스마스와 신년 연휴기간 동안 축제 분위기의 정점을 달렸다.
하지만 가장 화려한 순간에도 골목 하나만 꺾어 들어가면 도시 구석구석에 스며든 짙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배트맨이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치안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교정시설을 유지하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모되었고, 아캄 정신병원과 블랙게이트는 회전문처럼 범죄자들을 거리로 돌려보냈다. 감방은 애저녁에 포화상태였다. 재소자들은 모두가 기대하는 것보다 빠른 가석방 심사를 받았다. 겨울이 되면서 덩달아 높아진 물가는 사시사철 정신나간 사고들을 일으키는 미친 범죄자들만으로도 벅찬 도시에 생계형 범죄자까지 추가시키는 원인이었다.

"그나마 올해 정도면 다행이었지."

근 3주만에 고담에 들른 나이트윙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뻐근한 목 관절을 풀었다. 신년 카운트다운에 맞춰 광장에 설치된 시한폭탄을 제거하느라 진땀을 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도 열흘밖에 안 남아 있었다. 각종 사건과 사고와 재해로 다사다난했던 이번 겨울도 그럭저럭 마무리될 모양이었다. 봄을 목전에 둔 마지막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한겨울의 매서웠던 추위에 비하면 견딜만 했다. 저녁나절 내내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는 완전히 그치고 짙은 구름도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남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흰 입김이 흩어졌다.

별안간 웬 여성의 도와달라는 비명소리가 건너편 골목에서 들려왔다. 나이트윙은 주저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옥상을 채 가로지르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먼저 망토를 펼치며 골목 안쪽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으허억, 하는 굵은 비명소리, 줄행랑을 치던 누군가가 눈 녹은 진창에 철퍽 엎어지는 소리, 그리고 가죽 주머니를 야구배트로 두들기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나이트윙이 비상계단과 가스관을 번갈아 딛으며 바닥으로 내려섰을 즈음에는 이미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피해자 여성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는 배트맨을 그대로 지나쳐 방금 도착한 나이트윙의 가슴팍에 착 달라붙었다. 나이트윙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반걸음 물러났다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그리고 제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들바들 떨고있는 여자의 등을 조심스럽게 다독여주었다.
골목 밖으로 도망치려다가 배터랭에 뒤통수를 맞고 엎어진 놈이 한 명. 담벼락에 내던져진 모습 그대로 구석에 처박힌 놈이 한 명. 힘없는 여성한테는 기세등등하게 휘둘렀을 칼을 허무하게 내던져버리고 바지에 오줌까지 지릴 기세로 싹싹 빌고 있는 놈이 한 명. 저에게는 아내가 있고,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자식들이 있고, 형제와 둘이 운영하는 작은 정비소는 경기가 안좋아지는 바람에 빚만 잔뜩 쌓여가고 있고, 주절주절....
틀에 박힌듯한 애원과 호소였지만 배트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빈집이나 털다가 걸린 것도 아니고 패거리와 함께 흉기를 들고 시민들을 위협하는 강도라면 이미 범죄 입문의 ABC단계쯤은 진작에 패스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배트맨이 억센 손으로 강도의 멱살을 잡아 반쯤 녹은 눈과 각종 오물로 질퍽한 바닥에 메다꽂았다. 딕의 품에 안긴 피해자 여성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딕은 여자가 강도들 때문에 겁먹은 것인지 배트맨 때문에 겁에 질린 것인지 아리송한 기분으로 애매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하하, 많이 놀라셨죠? 이제 괜찮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이런 시각에 이런 동네는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혼자 다니지 않는 게 좋아요. 집이 어디시죠? 이 근처인가요?"


겁먹은 여자를 어르고 달래는 딕을 향해 배트맨이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옆얼굴을 콕콕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딕은 얼굴에 구멍이 뚫릴 것 같은 기분에 슬금슬금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배트맨이거늘, 이래서야 다정한 스킨쉽이나 키스는커녕 살가운 인사 한 번 못 듣게 생겼다.

여자가 더듬더듬 대답한 주소는 어중간하게 서너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딕은 곤란한 표정으로 배트맨을 돌아보았고, 배트맨은 묵묵히 배트모빌을 호출했다. 고담시 전역의 지도가 입력된 차량은 채 2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지면을 달리는 차량에 달기엔 과분한 제트엔진의 굉음이 늦은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진동시키며 웅웅 울렸다.
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배트맨과 나이트윙과 시커먼 차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저래봬도 승차감은 꽤 좋거든요. 눈을 몇 번 깜박이기도 전에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딕은 상냥한 말투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운전석에 올라탄 배트맨은 말이 없었다. 여자가 보조석에 앉자 안전벨트가 자동으로 채워졌다. 딕은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시커먼 차창 안쪽을 향해 살래살래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세요 배트맨!! 너무 거칠게 몰지 마시구요!!"

* * * * *

그러나 그날 밤, 둘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딕은 오라클의 연락을 받고 화재가 발생한 인근 다세대 주택으로 급히 향해야 했고, 배트맨은 때마침 경찰 무전으로 들어온 차량 추격전 지원요청을 듣고 여자를 내려주자마자 차를 돌려 도시 북단의 외곽 순환도로를 향해야 했다. 화재 현장에 소방차보다 먼저 도착한 딕은 화마가 번지기 시작한 건물 안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최근에 수트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내열성이 강화되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화재경보를 듣고 대피한 후였다. 하지만 좁은 복도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중 어느 곳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딕은 각 층을 돌며 분주하게 닫힌 문을 확인하고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방차가 도착하면서 화재 진압이 시작되고 건물에 있거나 집을 비운 거주민들의 소재가 완전히 다 파악되었을 무렵에는 몇 번이나 불타는 건물을 드나들었던 딕 역시 녹초가 되어있었다. 화상을 입거나 호흡기를 다친 건 아니었지만 방연마스크며 수트가 그을음으로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며 배트맨에게 통신을 연결했지만 배트맨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운전중이라 바쁘다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교신기 너머로 경찰차의 사이렌과 헬리콥터 날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어디 쯤이에요? 바이크로 합류할까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그냥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15분 안에 정리하고 그쪽으로 돌아가마.]
“넵, 안전운전 하세요.”

하지만 차량 추격전이 끝난 이후로도 두사람은 쉴 새 없이 엇갈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모처럼 나이트윙이 고담에 들렀다는 것은 어떻게들 알았는지 자잘한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펑펑 터졌다. 오라클은 배트맨과 나이트윙, 레드로빈과 로빈에 이르는 네 명의 현장요원들을 바쁘게 굴려댔다. 한밤중이 지나고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딕은 뺨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어느새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이트윙, 에이스 화학공장 사무실의 보안을 해제했어. 앞으로 7분동안 유지가 가능하니까 그 안에 기자재 발주서 파일들을 복사해서 나와야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5분 안에 돌아올게."

잠깐 숨돌릴 틈도 주지 않는구만. 딕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팔다리를 쭉 당겨 밤새 혹사당하고 있는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15미터에 육박하는 게이트 타워의 꼭대기에 와이어를 쏘아올려 단숨에 공장부지 안으로 들어섰다.

* * * * *

자정을 넘어 밤이 깊어지자 도시 전역에서 쉴 새 없이 터지던 사건사고들도 점차 소강되었다. 거리가 한산해지고 도로에 차량들이 훌쩍 줄어들면서 경찰 무전들도 조금씩 잠잠해졌다. 오라클은 로빈과 레드로빈, 나이트윙과 배트맨을 차례차례 복귀시켰다. 모처럼 풀타임으로 단독미션을 수행한 데미안은 일찌감치 자러 올라갔다.

오늘은 배트맨에게 있어서 별로 운이 좋지 못한 날이었다. 배트맨은 투페이스의 부하들이 끈질기게 퍼부어댄 부착형 폭발물을 전부 처리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배트모빌로부터 비상용 바이크를 분리시키며 탈출해야 했다. 폭발물에 의해 반파된 잔해는 각 부품에 내장된 자동 파괴 시스템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자체운행이나 견인이 불가한 상황에서 차량이 타인이나 GCPD 등의 기관에 넘어갈 경우 추적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애지중지하던 차량 중 하나를 잃는 것은 단순한 금전적 손실 이상으로 뼈아픈 일이었다.

브루스가 바이크를 몰고 케이브로 돌아왔을 때, 딕은 장갑과 부츠만 벗은 상태로 기다란 간이의자에 앉아있었다. 좀처럼 빛을 볼 일이 없어서 하얀 맨발이 물장구라도 치듯이 앞뒤로 흔들렸다. 매일매일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톱 끝까지 가지런하고 깨끗했다. 일렁거리는 촛불이 나이트윙의 매끄러운 수트에 한 줌의 빛무리를 반사시켰다. 브루스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빼빼 가느다란 초 하나를 꽂은 컵케익이 딕의 옆자리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힘든 밤이었네요, 그쵸?"
"........."
"열두시 땡 하자마자 제일 먼저 생일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하필 오늘따라 이렇게 바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배시시 웃는 딕의 얼굴은 그을음이며 먼지며 이런저런 얼룩으로 꼬질꼬질 엉망이었다. 카울을 벗은 브루스로부터는 말이 없었다. 딕을 응시하는 얼굴에도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딕 역시 그런 브루스를 마주보기만 했다.
문득, 브루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맥없는 발소리가 케이브에 울렸다. 딕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브루스는 흔들리는 촛불을 끄고 의자에 놓여진 컵케익 접시를 컴퓨터 콘솔 위로 치워버린 후 제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끌리는 망토는 뛰어난 방탄, 방염 및 내마모성을 자랑하는 성능에도 소용없이 온통 헤지고 갈라져서 엉망이었다.
브루스는 딕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아니, 고개를 묻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두꺼운 팔이 딕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온몸의 체중을 기댔다. 딕은 어어 하는 순간 브루스에게 밀려 빈말로라도 쾌적하다 할 수 없는 의자에 길게 드러눕혀졌다. 신발 밑창에 밟힌 개구리처럼 으억 하는 소리가 절로 입밖으로 비어져나왔다. 졸지에 납작하게 깔려버린 딕은 꿈지럭거리며 자세를 바꿔보려 했지만 의자는 딱딱하게 배겼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브루스는 무거웠다.

"윽.... 브루스 잠깐만..... 무거워요. 등 배긴다구요."

딕이 작게 항의했지만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브루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딕이 바르작거리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무게중심을 옮기며 팔다리를 봉쇄해버렸다. 최소한 딱딱한 의자에 눌리는 왼쪽 어깨만이라도 좀 움직여보려던 딕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브루스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게된 만큼 포기는 빨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포기하니까 편했다. 딕은 온몸의 힘을 풀었다.
브루스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자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너덜너덜해진 망토가 천막처럼 두 사람 위에 덮였다. 딕은 꼼지락꼼지락 브루스의 팔에 갇힌 오른팔을 빼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저를 깔고 엎드린 브루스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브루스의 등을 슬슬 쓰다듬다가 꼬옥 끌어안았다. 맞닿은 상체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울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폐포가 부풀어올랐다가 다시 수축하며 길게 숨을 내쉬는 매 순간마다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텁텁한 재와 그을음과 화약과 먼지냄새에 서로의 체취와 땀냄새가 진하게 섞였다. 미지근하게 남아있던 아드레날린의 잔열이 서서히 가라앉고 나른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딕은 눈을 감았다.

모처럼 오붓하게 함께 패트롤도 돌고 같이 웨인저로 돌아와 뜨거운 밤을 보내며 피날레를 장식하려던 야망은 허무하게 빗나갔지만, 가끔은 이렇게 서로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 + + + + +



브루딕 앤솔에 투고하려다가 탈락한 원고...

일부만 잘라서 살짝 다듬어 올림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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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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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 썰정리: 슨딕

DC/썰 2015. 11. 21. 00:14

슨이가 로빈이고 딕이 디스코윙이었을 때 썸을 타는듯 마는듯 했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야 사귀게 된 슨딕이 보고싶다.

 


고담 뒷골목에서 활동하던 레드후드가 다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커플링이 슨딕이므로 마침 지나가던 나이트윙이 그러한 레드후드를 주워야 한다. 다친 제이슨을 케이브에 데려다 놓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잔소리할 브루스며 질색할 팀뎀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딕...

결국 자기가 알고있는 레드후드의 세이프하우스 중 하나로 데리고 와서 적당히 치료해주려고 했는데, 세이프하우스에 들어와보니 평소 슨이의 깔끔한 성격과 달리 여기저기 막 어지러져있는 거임. 무기며 탄창이 잔뜩 쌓여있고 벽에는 고담 지도와 함께 이런저런 사진이며 메모같은 게 잔뜩 붙어있음. 마치 혼자서 갱단들을 상대로 전쟁이라고 치르고 있는 것처럼.

딕은 좀 당황하면서도 일단 제이슨부터 눕혀놓고 응급처치를 한 다음에 제이슨이 수집/분석해놓은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함. 그리고 처음에 짐작한 대로 제이슨이 갱단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레드후드는 적이 많았음. 의외의 사실이라면 뒷골목 밑바닥 인생들 중에 레드후드를 동경하는 녀석들이 꽤나 있다는 것 정도? 그 중에는 말단 조직원으로서 레드후드의 정보원 일을 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음.

제이슨보다 서너살 정도 어린, 아직 어린애 티도 채 벗지 못한 꼬맹이는 정보를 물어와서 레드후드와 접선할 때마다 두려움과 경외심이 반반 섞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곤 했었음. 물론 제이슨은 그 열렬한 시선을 시큰둥하게 넘길 뿐이었지만. 만약 그 옛날에 배트맨에게 주워지지 않았더라면, 제이슨 본인도 저런식으로 뒷골목에서 갱들 시다바리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음. , 그랬다면 적어도 조커한테 두드려맞고 폭사당할 일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제이슨은 자신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삐쩍 마른 꼬맹이에겐 별로 흥미가 없었음. 적어도 녀석이 살해당한 채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버려지기 전까지는 그랬음. 배트맨이 거물들을 상대하는 동안 중소 갱들은 고담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숱한 영역싸움을 벌여댔음. 그 와중에 발생한 피해자라고 해봤자 어차피 범죄에 빌붙어 기생하는 뒷골목 인생이었고, 마약중독자에 알콜중독자인 피해자의 엄마는 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이해할만한 인지능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음. 경찰 수사는 신속하게도 종결되었음.

 

고담에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사건이었을 뿐인데, 무언가가 제이슨을 자극했음. 새삼스러운 분노가 치밀어올랐음. 제이슨은 그 길로 즉시 마약거래의 주요 스팟으로 가서 말단 판매책들을 싹 쓸어버렸음. 그리고 마약을 분산시켜놓는 용도로 쓰이는 위장용 가정집 몇 개를 박살냄으로써 갱단을 향한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했음.

문제는 공격당한 갱단이 그 즉시 다른 갱단과 손을 잡고 레드후드를 상대하기 위한 연합을 구성했다는 것이었음. 더불에 보호비 명목으로 레드후드에게 상납금을 내고 있던 찌질이 잡범들까지 뒤통수를 쳤음. 그로부터 보름을 조금 넘긴 오늘까지, 제이슨은 숱한 히트맨들의 표적이 되어 사냥당하는 동시에 그들을 사냥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음.

딕은 찬찬히 세이프하우스의 벽과 테이블에 널린 지도와 종이와 사진들을 살펴보았음. 제이슨이 상대하고 있는 갱단들에 대해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자료들의 양은 고담에서 어지간히 굴러먹었던 나이트윙으로서도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였음. 제이슨은 명백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었음. 어쩌면 배트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잠시 머리를 굴리던 딕은 오라클에게 교신을 연결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었음. 배트맨이라면 틀림없이 부나방처럼 전면전을 벌인 제이슨을 질책할 것이 뻔했음. 딕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서 끙끙 앓는 제이슨을 한번 흘끗 쳐다보고, 갱단이 고용한 청부업자들 중 제가 아는 이름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세이프하우스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음. 시곗바늘은 겨우 자정을 조금 넘겼을 뿐이고, 해가 뜨기 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음.

그날 밤, 나이트윙은 소리 없이 어둠속으로 스며들어 청부업자 몇 명을 해치웠음.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세이프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제이슨은 좀 더 상태가 안정되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음.

 


딕은 제이슨이 회복되기 전까지 자신이 최대한 위험요소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이슨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음. 기분이 이상했음. 제이슨이 살아 돌아온 이후로 딕과 제이슨의 사이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음. 우연히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비아냥거리기에 바빴고, 총구와 스틱을 서로에게 들이밀며 쌈박질을 벌이는 건 예사였음. 오늘만 해도 제이슨의 부상이 아무리 심했을지언정 의식만 붙들어매고 있었다면 딕의 도움을 거부했을 거임. 딕 역시 두번 물어보지 않고 쿨하게 제이슨을 남겨두고 떠났을 테고.

딕은 적당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제이슨의 옆자리에 누웠음. 그리고 제이슨과 제 손목을 수갑으로 연결했음. 혹시라도 자신이 잠든 사이에 제이슨이 먼저 깨어나서 떠나지 못하도록. 물론 제이슨이라면 수갑 따위야 쉽게 풀어낼 수 있겠지만 그동안 딕이 깨어나서 제이슨을 제압할 수 있을테니까. 지금의 상태로 혼자 밖에 나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였음. 딕은 일단 한숨 자고 오늘 중으로 케이브에 들러서 강력한 수면제를 좀 챙겨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음.

 


제이슨이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이틀간은 매사가 순조로웠음. 갱단들과 레드후드 사이의 전쟁에 나이트윙이 끼어들었다는 정보는 아직 퍼져나가지 않았고, 나이트윙은 브루스에게도 비밀로 한 채 조금씩 상황을 정리해나갈 수 있었음.

제이슨이 깨어난 후 사흘간은 수면제가 큰 역할을 했음. 딕은 제이슨을 주구장창 재웠음. 심지어는 나이트윙 수트로 갈아입고 세이프하우스를 나서기 직전에 자는 제이슨을 일부러 깨워서 수면제를 먹이고 다시 재우기도 했음. 아무렴. 순조롭게 회복되려면 자고로 잠이 최고지.

상처에서의 통증과 수면제의 영향으로 비몽사몽간에 딕이 주는대로 고스란히 약을 다 받아삼키던 제이슨이 버럭 성질을 내며 수면제를 거부한 것은 그러고도 나흘이 더 지난 다음이었음. 오랜만에 잠에 취하지 않은 멀쩡한 상태로 깨어난 제이슨은 진심으로 화를 냈음. 길바닥에 쓰러져있던 자신을 딕이 주워와서 치료해줬다는 사실은 이미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음. 자신의 의사에 반해 맘대로 약을 먹이고 며칠동안이나 침대에 쑤셔박혀 잠이나 쳐자도록 만든 딕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랐음. 그 누구라도, 설령 배트맨이라 해도 자신을 휘두르고 강제할 수는 없었음.

하지만 제이슨이 화를 내건 말건 딕은 뻔뻔할 정도로 태연자약할 뿐이었음. 딕이 쟁반에 담아 내민 인스턴트 수프를 뿌리치고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제이슨은 그러나 다음 순간 곧장 딕에게 납작 찍어눌러졌음. 진정하라고. 오른쪽 정강이가 두 군데나 골절됐다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뺀지르르하게 웃던 방금 전과 달리 담담했음.

제이슨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틀었고, 등 한가운데와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던 손은 의외로 순순히 떨어져나갔음. 제이슨은 짜증스럽게 제 옷을 탁탁 털어내며 돌아누웠음. 그리고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딕을 향해서 입술 한쪽을 비죽이 말아올렸음. 박쥐아빠가 애지중지하는 귀한 새가 이런데서 시간이나 허비하고 있어서 되겠냐고. 지금 나한테 걸린 현상금이 얼마인지 아냐고. 지금 이 집에 며칠째 머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너도 안전치 못할 거라고. 제이슨은 한껏 목소리를 비비 꼬며 이죽거렸지만, 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음. 다 안다고. 갱단이 연합해서 네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것도 알고, 주 경계 바깥에서까지 섭외한 청부업자들이 너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고. 며칠간 여기에 드나들면서 추적하는 사람이나 미행이 없는지 철저히 경계했으니 당분간은 좀 더 머물러도 될 거라고. 며칠간 푹 쉬면서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네 몸이 정상이 아닌 건 너 본인이 더욱 잘 알 거라고.

딕은 최대한 오해가 없도록 차분하게 설득했지만, 제이슨은 삐딱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음. 나를 돕는 의도가 뭔데?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살가운 사이였다고? 제이슨이 쏘아붙이듯 말했고, 딕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음.

글쎄, 왜일까. 딕 본인도 그게 참 궁금했음.

 

어째서 태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이슨은 당분간 현재의 거처에서 딕과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음. 마음대로 하라며 침대에 다시 벌렁 드러눕는 제이슨의 반응에 딕은 내심 안도했음. 그리고 스스로가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생경해했음. 어쩌면 자신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제이슨을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솔직히 말해서 이 피난처에서의 짧은 휴식도 제이슨이 제대로 정신을 추스리는 시점에 당연히 끝날 거라 생각했었는데. 며칠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었음. 딕은 묘한 기분으로 돌아누운 제이슨을 응시했음.

그날 밤, 딕은 밤외출을 하지 않고 세이프하우스에 머물렀음. 제이슨은 지난 며칠간 수면제에 취해 비몽사몽하던 와중에도 딕이 밤마다 거리에 나갔다 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 그래서 제 침대 옆에서 빈둥거리는 딕을 향해 이죽거렸음. 오늘은 왜 안 나가냐고. 네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내빼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냐고. 일부러 배배 꼬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면서도 제이슨은 딕이 평소처럼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음. 혹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하든지.

하지만 제이슨의 예상과 달리 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제이슨을 쳐다봤다가 눈꼬리를 접으며 눈웃음을 쳤을 뿐이었음. 왜 그래 제이슨. 심심해?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느물거리는 딕의 말투에 제이슨의 표정이 단박에 썩어들어갔음. 짜증을 내며 홱 돌아눕던 제이슨은 갈비뼈 안쪽을 쿡 쑤시는 통증에 큽, 하고 숨을 삼켰음. 그를 거의 죽음 직전의 위기까지 내몰았던 부상이 새삼스레 존재감을 과시했음.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딕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제이슨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아픈 티를 안 내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음. 시발시발 속으로 저절로 염불이 외워졌음. 딕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서 순간적으로 발끈했지만, 유치한 짓거리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꿋꿋이 버텼음.

자자. 잠이나 자자. 제이슨은 몇 겹이나 겹쳐놓은 베개에 머리를 꾹꾹 묻으며 애써 잠을 청했음. 지난 며칠간 딕이 얼마나 주구장창 재워놨는지, 눈을 감고 호흡을 깊게 조절해도 잠은 안오고 정신은 말똥말똥해지기만 했음. 이럴 때는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 손질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근거없는 오기때문에라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음.

카우치에서 일어난 딕이 보드판이 걸려있는 벽으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음. 보드판과 테이블에는 제이슨이 불철주야 수집해놓은 각 갱단들의 근거지와 히트맨들과 청부업자들과 기타등등에 관한 자료가 빼곡하게 꽂혀있었음. 딕이 펜으로 뭔가를 찍찍 긋는 소리와 몇 개의 종이를 떼어내는 소리와 또 다른 종이를 핀으로 꽂는 소리가 들려왔음. 제이슨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음. 제이슨은 타인이 제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병적으로 질색했음. 하지만 여태 자는 척을 해놓고 이제와서 벌떡 일어나서 내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짜증을 부리면 제 모양새만 이상해질 것 같았음. 미안하다고 사과하긴 커녕 깐죽거리면서 속이나 긁어댈 딕의 반응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음 제이슨은 어금니를 박박 갈며 베개를 꾸욱 움켜잡았음. 딕이 내밀었던 스프그릇을 팽개쳤던 덕분에 저녁나절 내내 비어있던 속이 쓰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슨이 꿋꿋이 유지하고 있던 평정은, 제 옆자리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오는 딕의 기척에 와장창 깨어졌음.

제이슨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또다시 갈비뼈 안쪽으로 쿡 찌르는 통증이 느껴져서 움찔한 것은 딕이 알아채지 못했기를 소망함...) 딕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음. 뭐냐고. 침대도 좁은데 왜 기어들어오냐고. 저기 카우치에서나 자라고.

하지만 딕은 성질부리는 제이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만 껌벅거렸을 뿐이었음. 기억 못하나본데 여기에 온 이후로 계속 네 옆에서 잤다고. 그래야 네 상태가 갑자기 변했을 때 내가 바로바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리고 순진한(척 하는) 얼굴로 웃으면서 덧붙였음. 걱정 말라고. 나 잠버릇 별로 안 심하다고. 나 때문에 네가 불편할 일은 없을 거라고.

제이슨은 기가 막혀서 저절로 쩍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고, 치밀어오르는 혈압을 꾹꾹 누르며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음. 잘 자, 제이슨. 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음. 제이슨은 저도모르게 인상을 썼음.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리나 비켜주고 입발린 소리를 하든가.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딕과 자신은 참 서로 상성이 안 맞는다 싶었음.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린 것에 비해 제이슨은 금방 잠들었음. 지금까지 억지로 자는 척 하면서 뒤척거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깊게 골이 패였던 미간이 펴지고 잔뜩 찌푸렸던 표정도 풀어졌음. 호흡 역시 점점 깊고 느려졌음. 아무래도 부상이나 기타등등의 스트레스로 몸이 많이 축나긴 했던 모양이었음. 기억나지 않는 꿈속을 헤매는 얕은 수면은 아침까지 자다깨다 이어졌음.

그리고 딕은, 잠버릇이 없긴 개뿔이. 제이슨은 몇 번이나 옆에서 치대는 딕 때문에 선잠에서 깨야 했음. 바로 다시 잠들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좁은 침대를 부대끼며 같이 쓰기엔 정말 최악의 상대였음. 아마 지금까지는 수면제 때문에 깊이 잠들어서 못 느꼈던 것뿐이겠지. 제이슨은 내일부터는 필히 딕을 침대에서 쫓아내야겠다고, 만약 딕이 안 나가겠다고 버틴다면 차라리 제가 카우치에서 자야겠다고 거듭 다짐했음.

 

다음날 밤에는 딕이 나이트윙 수트를 입고 거리로 나갔음. 하루동안 맨정신의 제이슨과 함께 지내본 결과 이대로 제이슨이 말없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음. 사실 판단을 내리기엔 근거가 빈약했지만, 왠지 느낌상 그럴 것 같았음. 배트맨 휘하의 자경단원들은 모두가 뛰어난 탐정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딕은 특히 직감이 발달한 타입이었음. 그리고 이번에도 타고난 직감은 딕을 배신하지 않았음. 날이 샐 때까지 갱단에서 고용한 히트맨들을 상대하고 돌아왔을 때, 시큰둥한 말투로 왔냐고 묻는 제이슨의 인사에 딕은 속으로 조금 웃었음.

 


* * * * * * *

 


지금이야 빈말로라도 원만하다 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제이슨이 로빈이었던 시절의 슨딕 두 사람은 제법 사이가 괜찮았음. 솔직히 말하면 괜찮은 정도 이상이었음. 당시의 제이슨이 어렸던 만큼 본격적으로 밀당을 하거나 썸을 타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생길 듯한 조짐은 분명히 있었음.

물론 처음에야 딕은 딕 나름대로, 제이슨은 제이슨 나름대로 '배트맨의 파트너 로빈' 이라는 자리에 엮여서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음. 하지만 딕은 천성적으로 사람을 집요하게 미워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그 상대가 어린애라면 더더욱) 제이슨은 건방진 꼬맹이이긴 했지만 뒷골목에서 구른 것 치고는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었음. 아니, 어쩌면 뒷골목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포식적인 세력다툼을 벌이는 상류층 자제들보다 순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름. 웨인의 피후견인으로서 소위 있는 집 자식들과 접할 기회가 꽤 있었던 딕으로서는 부유층에 속한 아이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잘 알았음.

처음 필드에서 로빈 복장을 입고 뛰어다니는 소년을 봤을 때는 충격을 받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애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음. 스스로가 로빈임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딕에게 뻐기는 제이슨의 모습은 얄밉다기보단 그냥 좀 미묘한 기분을 들게 했을 뿐이었음. 저런 꼬맹이가 브루스의 성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반, 브루스도 딕 본인이라는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제이슨에게는 좀 더 유연하게 대하겠지 싶은 마음이 반. 어쩌면 제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한 질투가 조금 섞여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고.

어쨌든 몇 번 같이 팀업도 해보고 멘토링도 해주고 필드에서 자주 부딪히다 보니 둘은 꽤 친해졌음. 딕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경단 활동에 대해서 친구나 지인들에게 밝힐 수 없다는 것에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음. 물론 타이탄즈 팀원들을 위시한 또래 히어로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초능력자인 그들과 어울릴 때는 그 나름대로의 소외감을 느끼곤 했음. 게다가 십여년동안 전적으로 의지하며 함께했던 파트너와 반강제적으로 결별했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딕에게 큰 상처가 되었음. 성인이 되었으니 독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느정도 마음의 준비도 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겸사겸사 잘됐다 치기엔 아무리 낙관적인 성향의 딕이라 해도 데미지가 컸음.

가끔씩 홀로 바람부는 옥상 끝에 서서 어둠이 내린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막막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오곤 했음.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음. 누구라도 좋으니 너는 잘 하고 있다며 격려해주고 이끌어준다면 좀 더 확신을 갖고 내 길에 매진할 수 있을 텐데. 자고로 마음이 힘든 것은 몸이 힘든 것보다 몇 배나 고달프기 마련이었음.

차마 남에게 말 못할 나약함을 극복하게 해준건 의외로 새로운 로빈이었음. 제이슨이 딕을 이끌어줬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었음. 그 반대였음. 딕은 필드에서 제이슨을 만날 때마다 가르치고 조언해주고 이끌어주는 입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흔들리던 마음을 가다듬고 한 사람의 히어로로서 진정하게 독립할 수 있었음. 그리고 생각했음. 어쩌면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브루스도 스스로의 길에 의문을 갖고 혼란스러워 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로빈으로 들였을 적의 브루스는 마치 모든 일에 확신과 해답을 갖고 당당하게 선 성벽처럼 느껴졌지만, 차마 어렸던 딕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자신은 브루스가 배트맨으로서 완성되는 것에 알게 모르게 일조했는지도 모르겠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음.

 

아무튼 딕은 제이슨과 꽤 즐겁게 어울려 다니곤 했음. 물론 제이슨은 대부분의 패트롤을 배트맨과 함께했고, 그래서 두 사람이 단 둘이 만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딕은 느즈막히 생긴 동생을 귀여워했고, 제이슨은 저를 애취급하는 딕의 태도에 무시하지 말라며 펄펄 뛰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딕의 말을 잘 따랐음. 어쨌든 뒷골목에서 아픈 어머니를 홀로 건사하며 물질적이고 심적인 여유라고는 조금도 없이 살아왔던 제이슨이니 어느정도의 애정결핍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음. 누군가의 관심과 보살핌이 간절했지만, 너무나도 바쁘고 불안정한 삶이었기에 스스로의 결핍조차 깨닫지 못한 삶이었으니까. 자신에게 잘해주는 잘생기고 능력 좋고 다정한 형을 좋아하지 않는 게 더 힘들었을 거임.

브루스는, 그리고 딕은 제이슨의 짧은 생애에서 처음으로 롤모델이 될만한 어른이었음. 술에 꼴아있거나 약에 취해있거나 욕설을 지껄이거나 손찌검을 해대지 않는 성인 남성을, TV가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 자체가 제이슨에겐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딕에게 츤츤거리던 제이슨이었지만, 강아지같은 표정을 하고 딕을 졸졸 따르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

딕이 제이슨을 리틀윙이라고 부르며 꼬맹이취급을 할 때마다, 제이슨은 사춘기 특유의 오기와 허세를 부리며 곧 너보다 훨씬 크고 강해질 거라고 큰소리를 쳐댔음. 그럴 때마다 딕은 여유롭게 웃으면서 부디 내가 반할 만큼 멋진 남자로 자라달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음. 발끈해서 빽빽거리는 제이슨의 반응은 하나같이 뻔해서 놀려먹는 재미가 있기도 했고, 가끔 귀가 빨개져서는 툴툴거리는 모습이 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음.

하루는 나이트윙과 로빈이 조깅코스가 조성된 공원에서 패트롤을 돌게 되었음. 노숙인들을 상대로 한 연속적인 폭력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음. 마침 꽃가루가 날리는 계절이었고,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느리고 더운 바람이 불었음. 민들레처럼 솜털이 폭신폭신한 꽃가루가 나이트윙의 머리카락에 붙었음. 제이슨은 별 생각 없이 손을 내밀어 꽃가루를 떼어냈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 쪽을 돌아보는 딕과 눈이 마주쳤음.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제이슨의 귀가 반박자 늦게 확 물들었음.

, 아니, 난 그냥.... 꽃가루가 붙어서. 제이슨은 제가 왜 당황했는지도 모른 채 어물어물 변명을 주워섬겼음. 제이슨을 바라보던 있던 딕의 눈동자가 이내 슬쩍 눈꼬리를 접으며 휘어졌음.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가 나네, 리틀 윙. 담배 피웠어? 딕이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물었고, 제이슨은 허둥거리며 제 팔이며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음. 당황한 얼굴의 제이슨이 냄새 많이 나냐고 물었고, 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음.

머뭇거리던 제이슨은 '배트맨에게 말 안할거지?' 하면서 조심스럽게 딕의 눈치를 살폈음. 딕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 시간을 좀 끌다가 제이슨이 안달복달할 즈음에서야 웃으며 말 안한다고 대답했음. 딕이 브루스한테 이를까봐 심장 쫄려했던 제이슨은, 딕으로부터 몇 번이나 말 안한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원래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담배도 좀 필 수 있는 거라고 허세를 부렸음. 딕은 여자애들이 키스할 때 싫어할 거라고 대꾸했고, 제이슨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딴 계집애들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그러냐고 대답했음. 딕은 작게 웃어 넘겼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음.

사람 없는 공원에는 별다른 범죄의 조짐이 느껴지지 않았음. 쉴 만큼 쉬었으니 슬슬 자리를 옮겨볼까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제이슨이 불쑥 물었음.


"너는 어때?"

"? 뭐가?"

"담배 말이야. 너는 담배피는 여자랑 키스하면 어떤데?"


뜬금없는 질문에 딕은 뺨을 긁적거리며 도록도록 눈을 굴렸음.


"글쎄.... 나는 별로. 상관 안하는데."


잠깐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을 때, 제이슨 본인은 티가 안 났다고 생각했겠지만 내심 안도하는게 눈에 보여서 딕은 속으로 조금 웃었음.

 


* * * * * * *



하루는 케이브에 들른 나이트윙이 배트맨과 다툰 적이 있었음. 나이트윙은 화를 내다가 침울해 하다가 결국 낙담한 채 케이브를 뛰쳐나갔고, 제이슨은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걸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음.


"할 말 있나, 로빈."


배트맨이 딱딱하게 물었고, 제이슨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음. 배트맨과 로빈은 함께 패트롤을 돌았고, 제이슨은 케이브로 복귀하기 직전에 잠시 볼일이 있다며 브루스와 헤어졌음. 브루스는 잠시 묵묵히 제이슨을 쳐다보다가 늦지 않게 돌아오라며 배트모빌의 창을 올리고 가속 페달을 밟았음.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새까만 차체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음.

제이슨은 딕과 둘이서 자주 만나던, 정확히 말하면 딕이 자주 가던(그래서 제이슨이 찾아가곤 하던) 한 고층건물의 옥상으로 향했음. 그리고 가고일상에 걸터앉은 딕을 발견했음. 멍하니 야경을 내려다보는 나이트읭의 모습은, 새삼 배트맨의 넓고 단단한 어깨에 비하면 작게 느껴졌음. 제이슨은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갑자기 막막해져서 머뭇거리다가 주춤주춤 딕의 옆으로 다가갔음. 익숙한 발소리를 듣고 슬쩍 뒤를 돌아본 딕이 살짝 미소지었음. 잘만 떠들고 깔깔거리던 평소와는 다르게 어쩐지 기운없어 보이는 미소였음.


"안녕. 리틀 윙."


제이슨은 어색하게 고개만 한번 끄덕하고 딕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음. 딕이 다시 야경으로 시선을 향했고, 제이슨은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뻘쭘한 기분에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었음.

그렇게 하염없이 딕의 옆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죽인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슬 지평선부터 뿌옇게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거리에 자동차가 한두 대씩 늘어나기 시작했음. 제이슨은 흘끔 딕의 옆모습을 쳐다보았음. 마스크를 쓰고있긴 했지만,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긴 얼굴이었음. 아니 뭐, 미남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는 있었는데, 처량맞게 눈꺼풀을 내리깐 옆얼굴은 의외로 예쁘장하게 보이기도 했음.

일단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하늘의 농도 역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음. 이제 슬슬 가봐야할 시간이었음. 제이슨은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만 가봐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음. 여태 멍청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도시만 내려다보던 딕이 제이슨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음.


"고마워."


쌀쌀한 새벽공기에 살짝 잠긴 목소리였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가감없이 느껴졌음. 제이슨은 내심 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딕이 저렇게 말하면서 저런 표정으로 웃어주니까. 어쩐지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가슴 안쪽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음.

그래서 제이슨은 충동적을 딕에게 키스했음. 키스라고 해봤자 그냥 입술만 짧게 겹쳤다가 떨어졌을 뿐이었지만. 딕의 입술을 생각보다도 말랑했고, 표면이 살짝 말라있었음.

하지만 제이슨으로서는 그 감촉을 음미하거나 할 여유도 없었음. 정말로, 진심으로,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터라,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을 즈음에는 혹시 비웃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전전긍긍 했을 뿐이었음. 그리고 의외로,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딕은 가만히 제이슨을 응시하기만 했음. 약간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불쾌하거나 싫어하는 낌새도 없었고, 제이슨을 비웃는 기색도 없었음.

 

그 날, 제이슨은 제가 무슨 정신으로 케이브까지 돌아왔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음. 알프레드가 늦었다며 은근히 잔소리를 했지만 그 역시 듣는둥 마는둥 했음.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온통 시끄러웠음. 밤을 꼬박 새버려서 피곤하긴 한데, 이리 눕고 저리 돌아누워 봐도 잠은 오지 않았음. 다음번에 만났을 때 딕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 않았음.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딕이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제이슨의 예상이 맞았음. 딕은 딱히 그날 새벽의 일을 들먹이지도 않았고, 보이지 않는 벽을 치며 거리를 두지도 않았음. 그냥 예전처럼 제이슨을 대했음... 이라고는 해도, 100퍼센트 예전과 같았느냐고 묻는다면....글쎄? 대부분은 평소와 같았지만, 아주 가끔씩. 뭔가 간질간질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불었음.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가 있긴 있었음.

어쨌든 딕은 어른이었고, 제이슨은 어렸음. 어린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지금껏 빈곤하고 고단한 삶에 치여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이 문제였음. 최소한의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살다가 갑작스레 만난 상대를 동경하고 좀 더 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음. 제이슨은 좀 더 자라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배우며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음.

딕은 기다릴 수 있었음. 제이슨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울리고 교류하고 감정을 나눈 이후에도 자신을 원한다면 그 때는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음... 결국 그런 날은 오지 않았지만.

 


* * * * * * *



제이슨이 죽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레드후드라는 이름의 자경단, 혹은 빌런이 고담에 나타났음. 그리고 딕은 레드후드의 정체가 밝혀진 날을 기억함. 케이브로 돌아온 브루스의 표정은 전에 없이 참담했음.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는 브루스의 손이-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설핏 떨리는 것처럼 보였음.


"."


무겁고 침통한 목소리에 압도되어서, 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음.


"....제이슨이...."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브루스의 모습은 평소의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머뭇 내밀어진 손은, 차마 브루스의 어깨에 닿지 못하고 거두어졌음.

 

이르건 늦건 나이트윙이 레드후드와 부딪히게 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음. 딕에게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음.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제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었음. 나이트윙은 레드후드를 상대함에 있어서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고 가차없이 굴었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상대하는 것이 딕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었음. 제이슨이 로빈이었던 기간은 헤아려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짧았음. 둘 사이에 있던 추억이라고 해봤자 고작 한 줌에 불과했음. 두 사람은 크게 부딪히고 싸운 적조차 없었음. 그냥 사이좋게만 지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음. 딕은 제이슨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지도 못했었음.

내가 사랑했던 소년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 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며 그나마의 추억까지 흙발로 짓밟는 저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조커는 제이슨을 죽였고, 라자러스핏은 부서진 육신을 되돌려주는 대신 제이슨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버렸음.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서 고담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것이 그대로인 거임. 자신은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괴물이 되어버렸는데. 제가 자란 이 미친 도시는, 배트맨은, 딕은, 하다못해 조커까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 모습 그대로였음. 제 자리는 저의 대체품인 꼬맹이가 버젓이 차지하고 있고. 바뀐 게 있다면 자신을 향하는 딕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 뿐이었음. 나라고 이 꼴을 보겠다고 돌아온 것이 아닌데. 애초에 죽음도 제 의사가 아니었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제이슨의 의사가 아니었음. 하물며 너에게까지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야, 살아 돌아오고 싶지도 않았음.

 


* * * * * * *

 


현재로 돌아와서, 딕은 팔꿈치로 상체를 받치고 고개를 돌려서 잠든 제이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들러붙어 있었음. 열은 없었는데. 부상의 통증 때문인지 악몽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음.

다친 제이슨을 돌보면서 딕은 제이슨의 잦은 악몽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이것 역시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제이슨이 원래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었는지 딕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음. 단지 제이슨이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 같으면 옆에서 제이슨을 슬쩍 건드리거나 흔들어서 깨울 뿐이었음. 제이슨은 딕의 잠버릇이 험해서 번번이 제 수면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제이슨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제이슨 본인이었음.

딕으로서는 제이슨을 괴롭히는 악몽이 도대체 어떤 것일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음. 푹 쉬어야 다친 게 빨리 나을 텐데. 그나마 잠든 순간조차도 편히 쉬지 못하는 제이슨이 새삼 안쓰러웠음.

거리에는 아직도 레드후드를 노리는 청부업자들과 갱스터들이 눈을 희번뜩거리고 있었음. 혼자서 무슨 적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고 다닌 걸까. 기분이 영 좋지 않았음. 요새는 그나마 딕과 제이슨의 관계가 좀 나아진 편이었지만 제이슨이 돌아와서 레드후드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무렵에는 딕 자신도 제이슨에게 있어서 적이나 다름없었을 거임.

문득 제이슨이 약하게 신음하며 뒤척거렸고, 딕은 물수건이라도 만들어 와서 땀이라도 닦아줘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음. 주섬주섬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제이슨이 딕의 팔목을 붙들었음.

팔을 부러뜨릴 것 같은 악력에 저도모르게 신음소리를 낸 딕은 반사적으로 제이슨을 뿌리치려 했음.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동공이 수축한 채 공포에 질린 제이슨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었음.

딕은 거듭된 훈련으로 뼛속까지 새겨진 방어행동을 가까스로 멈췄음. 식은땀으로 범벅된 제이슨은 핏기 없는 얼굴로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음.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는 고통과 공포와 절망의 그림자에 압도당한 딕은 차마 말문도 열지 못하고 제이슨을 마주보기만 했음.

초점 없이 떨리는 눈동자에 서서히 이지가 돌아오기 시작하는 순간은 그러나 자기혐오와 괴로움으로 가득했음. 제이슨은 제가 딕의 팔목을 움켜잡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딕을 붙잡은 손을 떨쳐냈음. 창백한 눈가로 벌겋게 피가 몰렸음. 씨근덕거리기 시작한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며 너른 어깨가 들썩였음. 딕은 지금 이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제이슨이 깊이 상처받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음. 아니, 상처는 언제나 제이슨을 갉아먹고 있었음. 단지 지금껏 철저히 숨겨왔던 그것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하고 딕 앞에 드러냈을 뿐.

딕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무작정 제이슨을 끌어안았음. 순간 뻣뻣하게 경직됐던 제이슨이 이내 딕을 밀쳐내려 했지만 딕은 필사적으로 제이슨을 부둥켜 안았음.


괜찮아, 제이슨.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는 딕 본인조차도 몰랐음. 그냥 당장 제이슨을 어떻게라도 지탱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음. 지금까지 딕은 과거 로빈이었던 제이슨과 살아돌아온 제이슨이 동일인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음. 하지만 악몽에 시달리는 제이슨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지금의 제이슨에게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꼬맹이가 남아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음.


딕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리던 제이슨은 딕의 입술이 눈가에 닿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음. 괜찮아 제이슨. 이제 괜찮아. 딕의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음. 딕의 입술이 닿은 눈시울이 뜨거웠음.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울분을 삼켰음. 네가 뭘 알아. 너 따위가 뭘 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딕의 입술이 눈가에서 뺨으로, 그리고 제이슨의 입술로 옮겨갔음. 연한 살갗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길 두어번 반복하던 딕은 살짝 제이슨의 아랫입술을 머금었음. 벌어진 틈새를 조심스럽게 비집고 들어온 혀가 제이슨의 치아를 훑었음. 악몽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휘저어진 머릿속으로 축축하고 말랑한 살덩이가 닿아오는 감각만이 선명했음. 반응 없이 딕의 키스를 받아내고만 있던 제이슨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딕의 등허리를 받쳤음. 생소한 무언가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늘씬한 등허리를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내리던 손바닥은 이내 딕을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겨 안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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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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