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윗 썰정리: 브루딕 PWP

2015. 11. 2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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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딕으로 기억잃은 딕을 데리고 도망친 제이슨이 보고싶다. 배트맨이나 저스티스 리그가 찾지 못하도록 아예 다른 지구로 넘어가버려도 좋겠다. 대규모 재해상황이 벌어져서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각지의 히어로들이 총력을 기울이던 중 딕이 크게 다쳤는데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주워온 거였으면 좋겠다.

 

원래 두 사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으면 좋겠군. 조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가 되돌아온 제이슨은 배트맨을 위시한 뱃가 구성원들을 증오하고 있었고, 딕은 딕 나름대로 제이슨이 하도 이놈저놈 죽이고 돌아다니고 + 딕 본인은 둘째치고서라도 팀과 데미안까지 위협하고 + 사사건건 난입하고 깽판을 치니까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제이슨의 빨간 헬멧만 눈에 들어오면 으르렁거리면서 경계할 듯. 그런 딕의 태도가 제이슨을 더더욱 부채질해서 두 사람 사이가 말도 못하게 살벌했으면 좋겠다. 특히 제이슨은 딕 자체가 밉다기보단 브루스가 제일 아끼는 것이 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딕을 망가뜨림으로써 브루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싶은 거고, 딕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제이슨을 가차없이 대하겠지.

 

뱃가와 레드후드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점점 고조되고 있었음. 그러한 와중에 동해안의 주요도시를 휩쓰는 재난상황이 발생했고, 크게 다친 나이트윙을 레드후드가 발견했음. 의식 없이 건물 잔해 사이에 방치된 나이트윙을 내려다보며 레드후드는 소리없이 전율했음.

딕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살벌하게 날을 곤두세우며 신경을 긁어대곤 했었음. 그 재수없는 면상을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주고 팔다리를 작신작신 부러뜨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 제이슨이 진심으로 살기를 담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할 때마다 차갑게 코웃음을 치는 딕을 볼 때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음. 그리고 지금 나이트윙은, 만신창이가 된 채 의식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음. 마스크까지 박살나서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지만 어차피 여기저기 멍들고 피칠갑이 되었으니 누군가가 발견하더라도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겠다 싶었음. 제이슨은 묘하게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낌.

제이슨이 생각하시에 배트맨 이하 고담의 자경단원들은 하나같이 역겨운 위선자들이었음. 그중에서도 배트맨이 각별히 애지중지하는 나이트윙이라면 두말 할 여지조차 없었고. 재수없고 짜증나는 나이트윙이 피떡이 된 채 널부러져있는데, 그 한심한 꼬라지를 보면서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음.

하긴, 박살내도 내 손으로 짓밟아야 의미가 있는 거지. 제이슨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나이트윙에게 다가갔음.

신발 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아도 나이트윙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음. 쭈그리고 앉아서 목에다가 손가락을 대보았지만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음. 비릿한 쇠냄새가 물씬 풍겼음. 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리며 장갑을 벗고 다시 손 끝을 딕의 목에 가져다 댔음. 아주 미약하고 느린 맥박이 느껴졌음.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니 꼬라지가 참 가관이었음. 거대한 괴수가 껌처럼 씹다가 뱉어내면 이런 몰골이 되려나. 하여간 아무리 날고기는 히어로라고 해봤자 초능력이라곤 개뿔도 없이 피와 살로 된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거지 싶었음.

제이슨은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음. 폐허에 가깝게 초토화된 거리에는 빈집털이범들이나 갱단 끄나풀같은 놈들만 몰려다니며 상점이나 공공기물을 때려부수고 있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음. 어떻게 할까. 맥박과 호흡은 약하지만 안정되어 있는데. 네가 출혈과 저체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배트맨이 제가 아끼는 골든보이를 찾아내는 것이 빠를까. 제이슨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사이에 쇼윈도가 박살난 상점을 털던 잔챙이들 몇몇이 레드후드를 알아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음.

 

결국 제이슨은 딕을 제 세이프하우스 중 하나로 데리고 왔음. 중환자를 이송하는 조심스러움은 없었지만 어차피 죽으면 제 팔자인 거고. 살 놈이면 어떻게든 살아나겠지. 제이슨은 딕을 데려와 응급처치를 하고 제 침대에 눕혔음.

시간은 무던하게 흘러갔음. 딕의 상태는 악화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음. 무엇보다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음. 제이슨은 그러한 딕의 곁에 머물렀음. 문자 그대로, 머무르는 거였음. 중환자인 딕을 마냥 방치해두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극진하게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음.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걸 보면서 상처가 아물고 있나보다, 열이 나면 열이 나나보다, 낮아졌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돌아오나보다, 그냥 그러고 말았음. 물론 그때그때 필요한 의료적 처치는 꼬박꼬박 해주고 있었지만. 막말로 당장 딕의 심장이 멎어버려도 그냥 그러려니 싶을 것 같은 기분이었음. 처음 이틀 정도는 지금쯤 딕의 실종을 알게 되었을 배트맨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려면 어때 싶었음.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갔고, 딕이 깨어났음.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함께 반듯한 미간이 찡그려졌음. 링겔의 투약량을 조절하고 있던 제이슨은 못박힌듯 그자리에 멈춰서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촘촘한 속눈썹이 떨리는가 싶더니 창백한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열렸음. 제이슨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딕의 얼굴을 응시했음. 제이슨 본인도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딕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푸른빛이 선명했음. 초점 없이 무방비하게 허공을 떠돌던 눈동자에 서서히 이지가 깃들기 시작하는 순간은, 빈말로라도 딕과 사이좋다고 할 수 없는 제이슨에게조차 기묘한 충격으로 다가왔음.

나에게 독한 말을 쏘아붙일 때에도 네 눈동자는 그렇게 새파랬겠지. 그러고 보니 무기질적인 화이트렌즈를 통해서가 아닌 딕의 맨눈을 마주보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음. 제이슨은 물끄러미 딕을 내려다보았음. 눈을 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듯 깜박거리던 딕의 눈동자가 간신히 제이슨을 올려다보았음. 딕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타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에서는 바람소리만 새어나왔을 뿐이었음. 제이슨은 딕의 입안을 적셔주기 위해 물을 가지러 갔음. 그리고 거즈에 물을 적셔 돌아왔을 때, 딕은 다시 잠들어있었음.

 

일단 의식을 되찾고 나니 회복은 순조로웠음. 딕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딕이 정신을 차린 후 이틀이 지났을 무렵이었음. 그 때까지 기계적으로 딕을 간호하던 제이슨은, 묽은 유동식을 조금 먹고 자리에 누운 딕이 여기는 어디며 당신은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순간 동작을 딱 멈추었음.

무심하게 쟁반을 들고 일어나던 제이슨은 저도모르게 딕을 휙 돌아보았음. 안면근육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음. 가슴 한 쪽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음. 아니, 어쩌면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 같기도 했음. 거의 뚫어져라 노려보는 제이슨의 시선에 딕이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제이슨으로서는 그러한 딕의 반응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음.

제이슨이 딕을 발견해서 제 세이프하우스로 데리고 올 때만 해도,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 따위는 없었음. 그저 우연히 딕을 발견했을 뿐이고, 제 선에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은 그에 맞는 처치를 했을 뿐이었음. 딕이 점점 회복되어 의식을 되찾았을 때조차도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음. 평소의 그답지 않은 느슨함이었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었음. 이번 일을 기회삼아 무언가를 해볼 생각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신창이가 된 나이트윙은 제이슨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음. 제 팔자가 죽을 팔자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나이트윙을 치료하면서도 제이슨은 내내 시큰둥하기만 했음.

그런데, 딕에게 기억이 없다는 거임.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음. 배트맨이 혈안이 되어서 딕을 찾고있을 것이 분명했음. 지금 이 순간에도 추적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을 터였음.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이슨은 배트맨이 찾아오건 메트로폴리스의 빅블루가 찾아오건 거리낄 것이 없었음. 엉망으로 다쳐서 적에게 구조된 나이트윙과, 그런 나이트윙을 이제서야 찾아낸 배트맨의 무능력함을 실컷 비웃고 조롱해주며 참담해하는 배트맨의 표정을 감상하는 것으로 얼마든지 저열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었음. 자존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속칭 고담의 히어로들을 만날 때마다 두고두고 들먹이며 조롱해줄 건덕지가 생기는 건 덤이었고. 이래저래 제이슨으로선 아쉬울 것이 없었음.

하지만 지금은, 기억 잃은 딕을 제 손에 거머쥐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음.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음. 딕은 제 수중에 있었음.

 

제이슨은 나이트윙이 얼마나 완고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음. 이번 일을 빌미로 다시는 제이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조건을 내건다 해도 나이트윙이 그것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만무했음. 아무리 목숨을 빚졌다 해도 딕은 사사건건 제이슨을 방해하려 할거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들을 보호하겠답시고 제이슨에게 날을 세울 테고, 살인을 저지르려 하면 훼방을 놓고 일을 파토내려 들 것임에 틀림없었음.

그렇다고 제이슨이 부상당해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나이트윙을 감금하고 괴롭히고 폭행한다 해도, 그는 꺾이지 않을 거임. 다친 상태의 나이트윙을 망가뜨리고 짓밟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 결국 제이슨이 기껏 나이트윙을 주워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번거롭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치료나 해주고, 박쥐가 나이트윙을 찾으러 오건 나이트윙이 알아서 기어나가건 제 갈길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밖에 없었음.

하지만 나이트윙이 아닌, 기억이 없는 딕 그레이슨이라면 달랐음. 제 수중에 있어도 결코 제것이 되어주지 않을, 그래서 결국에는 그냥 풀어줘야 할 새가 아니었음. 제이슨은 전율했음. 지금이라면. 이대로 박쥐의 시야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딕의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고 있던 제이슨은, 밖에서 들려오는 파열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음. 불안한 표정의 딕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음. 창밖에선 바이크를 탄 갱단원들이 폐허가 된 거리를 질주하며 소란을 피워대고 있었음 제이슨은 다시 딕에게로 고개를 돌렸음. 아직 다친게 다 낫지 않아 여기저기 멍들고 파리한 얼굴이 제이슨을 올려다보고 있었음.

"괜찮아 딕. 겁먹게 해서 미안해. 봐서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일단은 우리가 형제라는 것만 말해둘게 너는 많이 다쳐서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여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것 같아.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줘."

미리 준비하거나 연습했던 것도 아닌데, 혓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거짓말은 술술 잘만 나왔음. 딕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슨이 딕의 어깨를 놓고 일어나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제이슨의 소매를 붙들었음. 제이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을 생경한 기분으로 마주보다가, 딕의 손등에 조심스레 제 손을 겹쳤음.

"괜찮아. 금방 올게. 너를 차에 태워서 이동하려면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제 소매를 잡은 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의 이마에 입을 맞췄음. 놀란 듯 파란 눈을 크게 뜨는 딕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앗차 싶었지만, 딕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적당히 무마했음.

급하게 방을 나서는 제이슨의 발치에 플라스틱 쟁반이 채였음. 제이슨은 짧게 심호흡을 했음. 심장이 쿵쿵 울렸음. 박쥐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추적의 단서가 될만한 흔적을 지워야 했음.

 

제이슨은 딕과 함께 다른 도시로 옮겼음. 딕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차량을 이용한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음. 새로운 가명과 현금으로 적당한 맨션을 수배해서 빌린 제이슨은 고작 몇시간 흔들리는 차를 탄것만으로 상태가 악화된 딕을 정성껏 돌보았음. 어쨌든 딕은 젊었고, 제이슨은 부상자를 돌보는 것에 의외로 괜찮은 재능을 갖고 있었음.

딕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끝장나버릴 수 있는 상황이건만, 제이슨은 개의치 않았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음. 딕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혹시 기억이 돌아올 조짐이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캐물었다가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음.

흑발에 푸른눈을 가진 건강한 체격의 두 청년들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형제로 받아들여졌음. 젊은 총각이 아픈 형 돌보느라 고생한다는 것이 수다떨기 좋아하는 근처 젊은 엄마들의 중평이었음. 제이슨은 특유의 날카로운 살기를 갈무리한 채 양의 탈을 쓰고 주변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냈음. 딕의 회복은 순조로웠고, 두어달이 채 지나기 전에 부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음.

그동안 제이슨과 딕은 무척이나 친밀해졌음. 딕은 자신에게 제이슨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미안해했고, 제이슨은 그러한 딕에게 괜찮다고, 무리할 필요 없다고 어른스럽게 대답해주었음. 외상은 거의 아물었지만 딕은 아직까지도 잦은 두통에 시달렸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읽거나 하면 금세 어지러움을 호소했음. 자연스레 신문이라던지 인터넷 기사같은 것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소소한 사실조차 제이슨에게는 유리한 측면이었음.

현금은 충분했지만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제이슨은 적당한 파트타임잡을 구했음. 딕을 집에 혼자 남겨두는 것이 좀 걱정되었지만 원체 사교성이 좋은 딕은 금세 이웃 주민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옆집 아주머니에게 레시피를 전수받아 어설프게 만든 스페인식 빠에야가 식탁 위에서 모락모락 김을 올리며 제이슨을 맞이하는 생활은 나쁘지 않았음.

 

"우리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나봐."

어느 날 저녁, 둘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마친 후 소파에 늘어진 딕이 문득 말을 꺼냈음.

"그건 갑자기 왜?"

제이슨이 무심하게 물었고, 딕은 그냥, 하고 대답했음.

"너랑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해."

딕은 소파 아래 러그가 깔린 바닥에 앉아있는 제이슨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어. 너는 나한테 무척이나 소중한 동생이었나봐."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음. 그렇다고 굳이 딕을 밀어낸 것도 아니었지만.

 

제이슨은 나날이 심란해졌음. 무방비하게 저에게 웃는 딕을 마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하면서도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이었음. 제이슨을 경계하지 않는 딕을, 제이슨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딕을, 제이슨을 유일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웃고 말하고 친근하게 부대끼는 딕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어째서 그가 그토록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음. 파란 눈동자에 친애를 가득 담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딕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음.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형제라고 말해두는 게 아니었는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지껄인 과거의 자신이 한심했음.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미묘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제이슨을 딕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음. 제이슨이 일을 쉬는 어느 휴일날, 딕은 제이슨에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고 넌지시 물었음. 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이슨의 표정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엔 애매했지만, 빈말로라도 편해보이지는 않았음. 문득 제이슨이 딕의 얼굴 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딕은 싫은 기색도 없이 눈을 감으며 제이슨의 손바닥에 기대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였음. 뺨에 닿는 제이슨의 손은 크고 거칠었음. 딕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이슨은 어쩐지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음.

"고민거리가 있으면 혼자서 전전긍긍하지 말고 나에게도 말해줘. 둘 뿐인 가족이잖아. 숨기려고 하지 말아줘."

딕이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제이슨은 씹어뱉듯 우리는 형제가 아니라고 대답했음.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당황한 딕이 뭐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홱 잡아당기며 얼굴을 바싹 끌어당겼음. 딕은 반사적으로 제이슨을 뿌리치려 했지만, 제이슨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딕의 손목을 붙들어 제 쪽으로 당겼음.

가만히 있으라고. 잠시만 피하지 말아보라고.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제이슨의 목소리가 어쩐지 절박하게 느껴져서, 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껌벅거렸음. 제이슨이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을 때도 딕은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음.

"기억나?"

제이슨이 물었고, 딕은 멍청하게 제이슨을 쳐다보고 있다가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제이슨은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키스했음.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등줄기를 천천히 위아래로 쓸어주자 체리보이처럼 잔뜩 긴장한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음. 마시멜로처럼 말캉한 혀는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거나 피하지도 않았음. 제이슨은 아예 이대로 딕을 쓰러뜨려버릴까 고민하다가 눈에 띄게 긴장한 딕의 모습에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음.

"우리는 같은 집에 입양된 고아였어.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의 이런 관계를 달가워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왔던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제이슨이 찬찬히 설명했고, 놀라고 당황한 얼굴의 딕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음. 제이슨의 시선이 딕의 입술을 향했고, 딕은 그제서야 뒤늦게 얼굴을 붉혔음.

"미안해, 제이슨. 기억나지가 않아."

디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제이슨은 어른스럽게 괜찮다고 대답했음.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딕의 모습에, 제이슨은 은밀한 만족감을 느꼈음. 상대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따윈 자리할 구석이 없었음.

 

그 날 이후로 제이슨은 천천히, 그러나 명백하게 형제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스킨쉽을 시작했음. 퇴근해서 돌아온 제이슨을 반갑게 맞이하는 딕을 마주 끌어안으며 늘씬한 등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는 손길에는 분명한 성적 함의가 담겨있었음. 딕은 처음에는 좀 어색해하는듯 했지만 이내 적응해나갔음. 그리고 하루이틀 시간이 흐를수록 저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더더욱 미안해했음.

제이슨은 혹시라도 자신이 딕에게 하는 스킨쉽들이 불쾌하거나 싫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딕에게 당부했음. 네가 불편해하면 그 즉시 멈추겠다고. 그리고 그런 제이슨에게 딕은 싫지 않다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오히려 책망하듯 대답했음.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네가 닿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냐고. 어린애처럼 자신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제이슨은 한숨을 내쉬었음. 딕이 종알거리면서 입김이 닿은 귓불이 근질거렸음.

목 안쪽에서 들끓는 뜨거운 덩어리를 꾸욱 삼킨 제이슨은, 딕의 어깨를 살짝 밀어니며 애써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음. 저를 올려다보는 딕의 표정은 머릿속이 꽃밭이라도 되는 양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음. 제이슨은 충동적으로 딕을 잡아당겨서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음. 등과 허리를 더듬어 내려간 손아귀가 엉덩이를 주무르듯 움켜쥐더나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음. 맞붙은 고간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느껴져서, 딕은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음. 거듭 입술을 겹치며 딕을 어루만지던 제이슨이 간신히 떨어져나가서는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섬주섬 변명하는 제이슨을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던 딕은, 이내 제 쪽에서 제이슨을 잡아당기며 어색하게 끌어안았음. 제이슨이 다시금 사과했고, 딕은 고개를 저었음. 좀 놀랐을 뿐이라고.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더 미안하다고. 그냥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을 거라고.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이후로는 딕에게 일체의 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접촉을 하지 않았음.

 

두 사람은, 겉으로는 예전의 형제같은 관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음. 시덥잖은 식사준비를 하면서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제이슨이 파트타임 일을 끝내고 돌아올 시간 즈음에 맞춰서 딕이 산책 겸 마중을 나가기도 했음. 게임기를 TV에 연결해놓고 레이싱 대결을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서로 빈정상해서는 옥신각신 쌈박질을 벌이기도 했음.

그날도 다르지 않았음. 대전 격투게임이 실제의 우격다짐으로 번져서 신나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어느 날, 물끄러미 딕을 쳐다보던 제이슨이 중얼거렸음. 안고 싶어. 발라당 드러누운 채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던 딕이 제이슨을 마주보며 해사하게 웃었음.

"그래."

쾌활하게 대답한 딕이 두 팔을 벌려 제이슨을 와락 끌어안았음. 제이슨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딕의 팔을 떼어냈음. 양 손으로 딕의 상완을 움켜잡고 밀어내며, 제이슨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짜증내듯 말했음. 제이슨을 빤히 쳐다보는 딕의 새파란 눈동자에는,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음.

"....내가 생각하는 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조용하게 대답하는 딕의 목소리는 쓸데없이 침착했음. 그래서 제이슨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음.

* * * * * * *

 

제이슨은 스스로를 자제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음. 속고 있는 딕으로서야 모르겠지만 이것이 둘의 첫경험이었으니까. 딕의 옷을 벗기는 손이 갓 열여섯을 지난 애송이마냥 초조하게 떨렸음.

딕의 안에 들어간 순간, 제이슨은 어쩌면 자신이 바랐던 것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음. 자신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이트윙에게 그렇게나 바득바득 화를 내며 달려들었던 것은 처음부터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대립하던 시절이 까마득하게 먼 과거처럼 느껴졌음.

딕은 적극적으로 제이슨에게 응했던 것치고는 좀 많이 아파하는 것 같았음. 신경이 좀 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멈추기엔 너무 기분이 좋았음. 제이슨은 주의깊게 딕의 반응을 살피며 괜찮냐고, 많이 힘드냐고 틈틈이 물었음. 물론 여기서 딕이 힘들다고 대답한다 해도 그 즉시 멈출 수 있을지는 본인으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딕이 너무 아파하기만 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세를 좀 바꿔볼까 하고 몸을 뒤로 무르던 제이슨은, 딕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이슨을 올려다보며 괜찮다고, 계속하라고 속삭이는 순간 본능에 굴복했음.

아픔과 쾌감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제 밑에 깔려 우는 딕의 모습은 환상적이었음. 이대로 영원히 딕의 안에 제것을 묻어두어도 좋을 것 같았음. 사랑해. 디키버드. 때려죽여도 제 입에서 나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낯간지러운 말이 잘도 튀어나왔음. 더더욱 신기한 사실은 그것이 진심이었다는 것이었음.

 

 

딕의 몸을 갖게 됨으로써 더더욱 욕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음. 이 관계를 절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새삼스러운 불안감이 스물스물 번져올랐음. 제이슨은 초조해졌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도시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았음. 당장 오늘 밤에라도 저 창문을 박살내며 분노한 배트맨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음.

가끔씩 불안감과 초조함이 극에 다다랐을 때, 제이슨은 딕을 거칠게 대하곤 했음. 속도 없는 딕은 그러한 제이슨을 한없이 받아주었음. 고분고분히 저에게 안긴 몸에 짜증과 울화와 신경질을 죄다 쏟아붓고 나면 가슴 한구석에 막막하던 불안감이 약간은 해소되는 느낌이었음. 그렇게 내내 시달리던 딕이 지쳐 잠든 새벽이면 제이슨은 울적하게 딕을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곤 했음. 딕은 대부분의 경우엔 완전히 잠들어서 제이슨의 사과를 듣지 못했지만, 가끔씩 잠결에나마 제이슨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제이슨을 마주 끌어안아주곤 했음.

다친 딕을 무작정 데리고 들어와서 함께 살게 된지 몇 달밖에 안 되는 맨션이었지만, 어느새 둘만의 추억이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음.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았던 딕은 이웃들과도 꽤나 친해져 있어서, 제이슨은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음. 그랬기 때문에 어느 날, 제이슨이 충동적으로 딕한테 이사가자고 말했을 때 딕이 의외로 싫은기색 없이 그러자고 대답해서 제이슨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안도했음.

 

예전에는 괜히 긁어부스럼이 될까봐 딕에게 과거가 기억나는지 캐묻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갔던 제이슨이, 언제부터인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며 혹시 뭔가 기억나는게 있냐고 추궁하듯 묻기 시작했음. 그럴 때마다 딕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미안하다고 대답했음. 그러면 제이슨이 딕을 끌어안으면서 괜찮다고, 어차피 지금이 중요한 거 아니냐고. 너랑 내가 이렇게 함께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예전 일은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거임. 딕은 그럴 때마다 네 말이 맞다고,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고 대답하곤 했음. 일말의 의심조차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들으며 제이슨은 죄책감을 애써 억눌러야 했음.

 

제이슨과 딕은 새로 옮겨간 도시에서 채 넉달을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음. 그 다음부터는 딕이 오히려 먼저 나서서 우리 이사 가자고, 이 동네는 너무 덥다고 or 춥다고 or 지루하다고 or 번잡하다고, 나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 가보고 싶다고 제이슨에게 졸랐음.

제이슨은 처음 두어번 정도는 집을 옮길 때마다 파트타임 잡을 구했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그만두고 차명계좌에 모아둔 돈이나 쓰면서 하루종일 딕이랑 집에서만 머물렀음. 그 즈음에는 딕도 이웃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을 그만두었음.

 

수시로 신분증을 바꾸고, 계좌를 바꾸고, 외출할 때마다 가명을 쓰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탐정으로부터 영원히 숨을 수는 없었음.

 

그리고 더이상 머물 수 없을 보금자리에 배트맨이 들이닥친 날, 제이슨은 딕의 기억이 이미 진작에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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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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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물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브루딕+뎀딕 근본없는 판타지 AU가 보고싶다. 남북으로 기다랗게 생긴 대륙의 중앙에 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다. 적도를 살짝 빗겨간 위도상에 띠처럼 둘러진 사막이라 육로를 통해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갈 수밖에 없는 지대여야 한다. 무역상들이 험준한 산맥과 고원을 통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바닷길과 사막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바다가 잔잔하고 폭풍이 뜸하면서 바람 방향이 잘 맞을 때는 배를 통해 물건을 실어나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사막을 통해서 움직이겠지.

 

사막을 종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 중앙에 있는 도시에 들러 물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도시의 영주는 브루스 웨인임. 그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오랜 생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함. 도시에는 크고 작은 물물거래 시장이 세군데 있음. 주민들은 도시를 들러가는 여행객들이나 무역상인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임. 여관이라든지 음식점이라든지 잡화상 등등. 사막을 뚫고 도시까지 오느라 지치고 탈진한 짐승들을 저렴한 값에 사들였다가 잘 먹이고 잘 재워서 튼튼해지면 그 다음 손님들에게 비싼 값에 되파는 일을 하기도 하고, 망가진 장비들을 수리해주는 전문 수리점도 있고. 보급품을 추가로 구매하거나 교환할 수 있는 곳도 있었음. 물론 사막을 건너는 일은 건장한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일 터이니 다치거나 병든 사람들을 위한 병의원도 많을 것이다.

 

작지만 인구밀도 높고(대부분이 유동인구지만) 복작복작하게 돌아가는 이 도시는 일년 내내 풍족하게 솟아나오는 물을 기반으로 번영한 곳이었음. 샘은 도시 한가운데 존재하는 영주의 저택을 중심으로 도시의 곳곳에 존재했는데, 이 샘을 유지시키는 것은 오로지 브루스의 힘이었음. 그래서 브루스 웨인은 본인이 도시를 통치하거나 다스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영주로 받들어졌음. 매사에 무감정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칭송하건 말건 떠받들건 말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의 집에는 그가 애지중지 아끼는 애첩이 있었고, 영주와 영주의 애첩이 집사와 함께 셋이서 살아가는 비밀의 저택에 어느날 한 어린아이가 유모의 손을 잡고 찾아옴. 브루스의 친자임을 주장하는 데미안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음.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와 함께 저택을 찾아온 아이는 대여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어렸음. 도시 사람들은 물론 도시를 자주 드나드는 노련한 무역상이나 그들의 경호를 맡은 용병들까지도 갑자기 출현한 영주의 아들에 무척이나 놀랐음. 그도 그럴것이 영주는 여자를 별로 가까이하지도 않고(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 거지만) 어쩌다가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감정없는 석상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수십년째 사막을 떠나지 않고 있는 영주가 대체 언제 여자를 만나서 애까지 만든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음. 소년이 보기드문 흑발에 선명한 푸른눈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유모는 도시 내에서 자발적으로 결성된 경비대에게 호되게 혼쭐이 나서 쫓겨났을 거임.

어쨌든 감히 영주의 사생활에 관여할 정도로 간 큰 인물은 없었던 터라, 사람들은 소년이 유모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음. 그리고 며칠 후, 집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해주는 소녀의 입을 통해 그 꼬맹이가 영주의 아드님으로서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그렇게 사람들은 그 애가 영주의 친자임을 알게 되었음. 애엄마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어차피 안다고 해서 그들이 참견하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작은 도시를 웅성거리게 했던 작은 소요는 그럭저럭 가라앉았음.

 

* * * * * *

 

어린 데미안은 제 아버지랑 똑같이 무감정한 생물이었음. 차이점이라고 해봤자 브루스가 돌로 깎아 만든 석상같다면 데미안은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같다는 정도?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새파란 눈동자로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나 하는 귀염성 없는 꼬맹이었건만, 딕은 그런 데미안을 무척이나 좋아했음.

넓기만 하고 사람이라고는 셋밖에 없는 저택에서 화초나 동물들만 벗삼아 외롭게 살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음. 물론 드넓은 저택의 관리를 돕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딕이 말 좀 붙여보려고 해도 지나치게 정중하고 깍듯이 대하기만 했으니까.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다들 딕을 보면 어려워하기만 했음. 딕은 원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러고싶진 않았음. 그래서 딕은 언제부터인가 브루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저택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더더욱 벌어지게 만들었음.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까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브루스가 딕을 위해서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은 귀여웠지만 딕은 외로웠음. 그러던 와중에 제 허리춤에도 안 오는 꼬맹이가, 그것도 브루스의 친아들이라는 애가 저택에 들어왔으니 기쁘지 않을리가 없지.

 

딕은 브루스랑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색밖에 없는 꼬맹이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안아보고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젖살때문에 통통한 뺨도 잡아당겨보면서 브루스 당신이랑 똑같이 닮은 애라고 호들갑을 떨어댔음. 정작 브루스는 멀뚱한 눈으로 딕과 데미안을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지만.

딕은 그날부터 데미안의 고사리같은 손을 잡고, 혹은 아예 제 팔에 안아서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음. 데미안은 낯선 딕이 저를 덥썩덥썩 끌어안고 수선스럽게 토닥거리고 뽀뽀하고 극성을 떨어대는게 싫은 듯 볼이 좀 불퉁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딕을 따라다녔음. 데미안을 데리고 왔던 귀머거리에 벙어리 유모가 데미안의 외가로 돌아가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아침이 되어 드넓은 저택의 넓디넓은 제 방 한가운데 어른 대여섯이 뒹굴어도 충분할 만한 침대에서 눈을 뜨면, 적막함과 고독함을 느끼기도 전에 아침나절부터 들이닥친 딕이 데미아아안~!! 하면서 데미안을 일으켜 후다닥 세수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손 붙들고 나와서는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음.

 

데미안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없는 아이였고, 덕분에 딕이 귀찮고 성가실 때도 인상이나 좀 찡그리고 볼만 좀 불퉁해질 뿐 이렇다 저렇다 불평하진 않았었음. 반대로 딕이 데미안을 데리고 나와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으로 데려가서 생전 처음 보는 달다구리한 디저트를 맛보여줬을 때에도 이거 좋다느니 맛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안했지만.

딕은 데미안의 눈이 커지면서 열심히 스푼을 놀리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고, 데미안이 제 그릇을 다 비우자마자 딕 자신의 접시도 슬그머니 데미안의 앞쪽으로 밀어주었음. 말은 없어도 표정으로 티를 다 내니 보기만해도 귀엽고 재미있었음. 브루스도 데미안의 반만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두 부자를 아무것도 없는 한 방에 넣어놓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서로 한 마디도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것이 뻔해서 웃기면서도 슬펐음.

시간이 지날수록, 데미안은 딕이 온종일 제 옆에 있는 생활에 알게모르게 익숙해졌음. 그래서 어느날 밤 악몽을 꾸었을 때, 저도모르게 발걸음이 딕의 방으로 향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침실이건 서재건 복도건 저택의 모든 벽에는 유리를 끼우지 않은 아치형의 창이 일정한 간격으로 길쭉길쭉하게 나 있었음. 어스름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들어와 어두컴컴한 방 안을 파르스름하게 비췄음. 사위는 고요했음. 사막의 밤답게 기온이 서늘했음.

데미안의 방은 수로를 내어 조성한 후원과 가까웠음. 깊은 땅속에서 갓 솟아나온 신선한 샘의 물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왔음. 악몽에 시달리며 축축하게 배어나온 식은땀이 싸늘하게 식어갔음. 데미안은 꾸물꾸물 침대에서 내려왔음.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타이투스가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어린 주인을 쳐다보았음. 데미안은 실내화도 신지 않은 맨발로 돌바닥을 밟으며 타박타박 제 방을 나섰음. 한낮의 뜨거운 기온에 달궈졌던 대리석은 해가 저문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음.

긴 복도를 지나 방향을 꺾고 꺾어서 딕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묵묵히 데미안의 뒤를 따르던 타이투스가 딕의 방 문앞에서 데미안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음.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타이투스를 물끄러미 응시했음. 타이투스는 귀를 납작하게 접고 자세를 낮춘 채 데미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낑낑거리고 있었음. 데미안은 작은 손으로 타이투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줬음.

"방으로 돌아가."

충성스러운 개는 차마 어린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음. 마지못해 뒤로 돌아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시무룩했음. 데미안은 딕의 방 문을 열었고,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로 종종종 다가갔음.

 

얇게 자아낸 실크로 하늘거리는 차양을 걷어냈을 때, 데미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새까만 이불을 나눠 덮고있는 딕과 제 아버지의 모습이었음.

인기척에 설핏 잠에서 깬 딕은 침대 옆에서 유리알같이 파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데미안을 보고 꽤나 당황했음. 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상체를 약간 일으키며 무슨 일이냐고, 잠이 오지 않냐고 데미안에게 물었음.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 기울인 채 딕을 응시하기만 했음. 딕은 더듬더듬 제 가운을 찾아서 이불 안에서 꿈지럭거리며 꿰어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데미안을 안아올렸음.

나쁜 꿈이라도 꿨어? 여태까지 안 잔거야? 딕은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후원으로 나왔음. 물을 가득 채워 찰랑거리는 수로의 수면 위로 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음. 어린애를 재우려는 것처럼 데미안을 안고 부둥부둥 어르며 후원을 걷고있는데, 불쑥 데미안이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딕은 당황해서 뭐? 하고 대답하며 걸음을 멈췄고, 딕이 정신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재차 물었음. 네가 아버지의 애첩이야? 아버지랑 섹스했어?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딕은 엄청, 당황하고 말았음.

얼굴이 확 달아오른 딕은 어버버버 말까지 더듬으면서 아니라고, 나랑 브루스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아니 그보다도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얘기는 들은 거냐고, 너처럼 어린 애가 할 말이 아니라고 허둥거렸음. 데미안은 덤덤하게 '엄마한테 들었는데.' 라고 대답했음. 딕을 빤히 쳐다보는 데미안의 시선이 얼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음. 식은땀까지 삐질 흘려대며 오해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던 딕은, 그렇다면 너와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관계냐고 묻는 데미안의 질문에 말문을 잃었음. 어물어물 입을 다무는 표정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두웠음. 글쎄. 무슨 관계일까.

항상 웃는 모습만 보여주던 딕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음. 그래서 데미안은 충동적으로 말을 덧붙였음. "말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데미안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음.

데미안은 착하네. 고마워. 뭐가 착하고 뭐가 고맙다는 건지 도통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딕이 고맙다니까. , 기분은 나쁘지 않았음. 데미안은 내친 김에 어설프게 딕의 목을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음. 이건 데미안이 이곳에 와서 딕에게 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스킨쉽인데,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런 걸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딕 본인이 좋아하는 행동이니까 데미안에게 자주 해주겠거니 싶었음. 그러니까 내가 딕한테 해줘도 좋아하겠지 뭐. 아니면 어쩔 수 없고. 데미안은 딕이 저에게 해주던 것을 흉내내어 쬐끄만한 손으로 어설프게 딕의 등을 다독여주었음. 그리고 예상대로 딕은 이렇게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주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음. 어느정도냐 하면, 데미안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뜨끈한 소금물에 어깨가 젖는 기분은 별로였지만 데미안은 그냥 잠자코 있었음.

 

* * * * * *

 

옛날로 돌아가서 딕이 사막의 도시에 처음으로 들른 것은 아주 어렸을 때였음. 대륙 곳곳을 유랑하며 공연하는 것을 업으로 삼던 부모님이 어린 딕을 정착해서 키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대륙 반대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거임.

그 때만 해도 도시는 지금보다 미묘하게 작은 규모였음. 그만큼 거주민들도 좀 더 적었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었음. 오래된 교역도시인 만큼 인프라는 제법 발달되어 있었고 물도 충분했지만, 지금처럼 도시 여기저기의 샘에서 물이 풍족하게 넘쳐나고 집집마다 화초며 과실수를 키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사막 기슭에 사는 소수민족의 명절 기간이었음. 무역상단에 가이드로 동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그들은 언제나 일정 이상의 인원이 도시에 머물곤 했음. 딕의 부모님은 그들의 축제에 어울려 춤과 음악을 제공했고, 마침 오랜만에 저택에서 나온 브루스도 그것을 관람했음. 덕분에 딕의 부모님은 분에 넘칠 정도로 후한 공연비를 받을 수 있었음.

그들은 좋은 대접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노잣돈도 넉넉히 챙긴 후 나머지 사막을 건너기 위한 여행을 떠났음. 그리고 이틀을 채 못가서 강도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 박살난 짐수레와 살해당한 시신들 사이에서 간신히 구조된 것은 부부의 어린 아들 뿐이었음.

영주가 있는 도시 안에서는 감히 약탈이나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걸음만 밖으로 나서면 무법지대였음. 다치고 탈진해서 사경을 헤매는 어린 소년을 보며 브루스는 거의 죄책감과도 같은 기분을 느꼈음. 영주의 심리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샘은 평소의 절반밖에 물을 흘려보내지 않았음. 작은 사막도시의 주민들은 처지가 불쌍하게 된 아이를 한마음으로 동정하고 걱정했음.

 

소년이 깨어난 후 브루스는 소년을 제 저택으로 데려왔음. 어린애를 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다행히 붙임성 좋은 아이는 무뚝뚝한 브루스에게도 살갑게 잘 웃어주었음. 집사와 둘이서 살던 집에 어린애가 생겼으니, 자연히 그만큼 일손이 필요해졌음. 아이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의사도 정기적으로 저택에 드나들게 되었고, 성장기라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의 옷을 짓기 위해 재봉사도 자주 드나들게 되었음. 아이의 몸에 맞는 가구를 맞추기 위해서, 놀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신발을 짓기 위해서,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저택의 사람들이 시장과 상점으로 나오는 일도 많아졌음. 딕은 귀여운 외모에 살가운 성격을 타고난 아이였고, 사람들은 그런 딕을 무척이나 아껴주었음. 딕이 비극적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의 도시를 유지될 수 있게 해주는 영주가 귀하게 키우는 아이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딕 자체가 귀엽기 때문이기도 했음.

브루스는 딕을 위해서 저택의 후원에 수로를 조성하고 맑은 물을 가득 채워 정원을 만들었음. 저택의 샘에서 24시간 솟아나오는 물은 수로를 채우고 정원을 휘돌아 도시 곳곳에 흘러들어가고 스며들었음. 강한 태양빛과 비옥한 토양은 충분한 물이 더해지자 온갖 화초와 과실수가 자라날 환경이 되었음. 딕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도시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인으로 자라났음.

 

딕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과 함께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었음. 도시에 정착해서 산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지만, 딕은 언제나 넓은 세상을 보고싶어 했었음. 그래서 딕은 스무살 생일이 되던 날 브루스에게 달려가 들뜬 얼굴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고 얘기했음. 무역상을 따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걸 보고 경험하고 공부하고 싶다고, 상기된 얼굴로 허락해달라며 재잘거리는 딕을 브루스는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음. 딕의 뒷편에는 제법 큰 규모의 무역상단을 이끄는 상인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 이 바닥에서 감히 영주님의 아이인 그레이슨 군을 홀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인이 거드는 말에 힘입어 딕이 더더욱 브루스를 졸랐고, 결국 브루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딕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날로 바로 짐을 꾸려 그 다음날 도시를 떠났음. 그리고 2년이 좀 안되는 시간동안 대륙의 남단과 북단에 있는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냈음. 마침 무역풍이 부는 계절이었고, 딕은 난생 처음으로 바다라는 것도 구경해보고 배라는 것도 타 보았음. 딕이 태어나기 전, 십대 중반의 부모님은 공연단과 함께 배를 타고 대륙의 건너편으로 건너왔었다던데. 건너들은 이야기로 막연하게 상상하기만 했던 바다와 실제의 바다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딕은 제가 보고듣는 모든것을 빠르게 흡수하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냈음.

물론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 낯선 지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배앓이를 하기도 했고, 험한 산길을 지나다가 강도떼에게 습격당해서 다리를 크게 다치기도 했음. 두세달이 지나며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게된 것을 제외하면 거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했지만, 다리를 치료하고 요양하느라 오랜만의 사막길에는 동행할 수가 없었음. 결국 딕은 집을 떠난지 2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제가 떠나온 도시로 돌아갈 수 있었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가슴이 뛰었음. 지금까지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하루라도 빨리 저택으로 달려가 브루스를 보고싶었음. 그동안 편지를 꾸준히 보내긴 했었지만 이 시대의 편지라는 건 짧아야 한달, 길면 두세달이나 있어야 도착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딕이 지난달에 부친 편지보다 딕 본인이 먼저 브루스를 만나게 생겼을 정도임.

딕은 제가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바리바리 사 모은 선물들과, 브루스에게 전할 수많은 이야기들을 안은 채 사막길에 올랐음. 그리고 상단과 함께 짐을 줄줄이 실은 낙타들을 이끌어 도시에 도착한 순간, 제가 떠나올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섣불리 도시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멈춰섰음.

집집마다 거리마다 활짝 피어있던 화초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음. 탐스러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던 과실수 가지에는 누렇고 시들시들한 이파리만 볼품없이 달려있을 뿐이었음. 당황스러워하는 딕에게 노련한 무역상은 놀랄 거 없다고, 요 몇 년간 특별히 물이 풍족해서 과실수도 키우고 화초도 가꿨던 것뿐이지, 원래 이 도시가 그렇게 나무 많고 풀 많고 그런 동네가 아니라며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음. 딕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렸음. 낯설었음.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려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기억하는 이곳은....

어쩔 줄 몰라하는 딕을 알아본 몇몇이 오랜만이라며 인사해왔음. 딕은 반갑게 그들에게 다가가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와락 끌어안았다가,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머뭇거리며 떨어졌음. 저를 동생처럼 조카처럼 귀여워하던 어른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거리감을 두는 것이 느껴져서 당혹스러웠음.

, 디키야. 그러지 말고. 얼른 영주님께 가보지 그러니. 은근슬쩍 눈치를 주는 뉘앙스에 딕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음. 도시에 도착하면 브루스를 제일 먼저 만나려 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묘하게 내외하는 반응이 서운했음.

 

그 길로 저택으로 향한 딕을 알프레드가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맞이했음. 그에 비하면 브루스의 반응은 좀 더 미적지근했음. 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녀왔냐고,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냐고 물었을 뿐임. 피곤할 텐데 일단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저녁이 준비되거든 부르겠다고. 브루스는 딕이 2년 가까이 도시를 떠나있던 것이 아니라 단 사나흘 정도 집을 비운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음. 그러면서도 딕의 얼굴에 못박힌듯 고정된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브루스는 딕이 어렸을 때부터 원체 무뚝뚝한 성격이었고, 웬만해서는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정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스물 남짓한 평생의 반 이상을 브루스와 함께 지낸 딕은 브루스의 표정을 캐치해내는 것에 그 누구보다도 익숙했지만, 그러한 딕조차도 지금의 브루스의 얼굴은 읽어낼 수가 없었음. 감정 없는 무표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음. 오히려 그 반대였음. 온갖 색깔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래서 차마 뭐라고 콕 찝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음.

딕은 말문을 잃고 머뭇거렸음. 브루스는 언제나 자신보다 크고 노련하고 강하고 성숙한 어른이었는데. 그런 브루스가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느껴졌음. 결국 딕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제 방으로 왔음.

신선하고 깨끗한 물로 먼지를 씻어낸 딕은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음. 그리고 왠지 답답한 기분을 전환하고자 후원으로 나왔다가, 자신이 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정원의 모습에 저도모르게 멈춰섰음. 수로의 물은 잠가버렸는지 물기하나 없이 말라있었고, 어수선할 정도로 온 사방에 흐드러져있던 화려한 수목들은 싹 정리되어 있었음. 짧은 풀과 단정하게 조경된 몇 그루의 나무들. 그리고 정확히 있어야 할 위치에 놓여있는, 장인의 작품이 분명한 조각들. 잘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으로 꾸며진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딕이 기억하는 모습과는 지나치게 달랐음.

딕은 황망한 기분을 추스르지 못하고 도망치듯 정원에서 나왔음. 그 길로 알프레드를 찾아간 딕은 정작 노집사를 대면하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음.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딕의 얼굴을 마주보며, 알프레드는 안쓰러운 표정을 했음.

정원을 보셨군요. 딕은 목이 메어서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음. 알프레드는 딕을 자리에 앉히고 따뜻한 차를 한 잔 건네주며 조용한 목소리로 위로했음. 도련님은 아주 어렸을 적에 저택에 오셨으니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원래 후원에는 수로같은 것은 없었답니다. 단지 샘 하나가 있어서 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만큼의 물이 솟아나오고 있었을 뿐이지요. 도련님이 떠나실 적의 모습과 달라서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도시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없답니다.

찻잔을 두손으로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딕이 울적한 목소리로 알프레드에게 물었음. 나 때문인가요? 내가 여길 떠나서? 알프레드는 고개를 저으며 딕의 어깨를 두드렸음.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딕 도련님께도, 브루스 주인님께도 지나치게 가혹하신 말씀 같군요.

딕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음. 브루스는 안그래도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고, 어딘가를 다치거나 병들어서도 안됐음. 스스로의 감정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브루스는 언제나 스스로를 극도로 억누르며 감정적인 평정을 유지하곤 했음.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게 달린 수많은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으니까. 도시와 정원이 예전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의 이유를 따져 물으며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도시가 돌아갈 수 있도록 샘을 유지시켜주는 브루스에게 감히 해서는 안될 말이었음.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딕의 탓이 아닌 것은 아니었음. 딕은 아름답던 화초들과 정원수와 과실수가 사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그동안 브루스가 느낀 외로움과 슬픔과 고독이 반영된 결과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음. 제가 정신없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에 푹 빠져있는 동안, 브루스는 늘 똑같기만 한 이 저택에서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냈을까.

 

그날 저녁, 외지인들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두 군데가 문을 닫았음. 요리사와 종업원들이 전부 저택의 저녁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고용되었기 때문이었음. 딕과 동행하여 도시에 들어온 상단은 무척이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

음식은 무척이나 훌륭했지만, 저녁나절 내내 심란했던 딕은 별로 많이 먹지 못했음. 상석에 앉아있던 브루스의 무덤덤한 시선은 내내 딕을 향하고 있었음. 결국 딕은 이마 쉬러 가겠다고 양해를 구하며 먼저 일어섰고, 브루스는 무던한 목소리로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툭 말을 던지고 같이 일어섰음. 손님을 대접하는 집주인답지 않은 태도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음. 상단의 상인들과 길잡이들과 호위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음식과 술을 즐겼고, 브루스와 딕은 떠들썩한 연회장을 떠나 한적한 복도를 걸었음.

이렇게 둘이서 함께 저택을 거니는 것도 무척이나 오랜만이었거늘,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음. 브루스를 만나면 그동안 쌓아놓은 이야기들을 밤새도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길고 적막한 복도를 앞만 보면서 나란히 걸으려니 참을 수 없이 어색했음. 그래서 비로소 제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음.

브루스를 돌아보며 나는 좀 일찍 자야겠다고, 당신도 피곤하면 굳이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말고 쉬라고 말하려는데,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브루스의 시선에 붙들려 어물어물 말끝이 흐려졌음. 브루스는 그렇게까지 딕에게 가까이 붙어서있지는 않았음. 딱히 야릇한 긴장감이 조성된 것도 아니었음. 오히려 예전에 비하면 좀 더 멀찍이 거리를 둔 채로,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 서서 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음.

이마에서 눈썹으로, 눈으로, 뺨으로, 곧게 솟은 콧날을 따라 내려와서 입술과 턱으로,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지 새삼스레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브루스의 시선이 찬찬히 딕의 얼굴을 살폈음. 딕 역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딕의 뺨을 쓸었음. 아주 깨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는 것마냥 조심스럽게 덧그리는 손끝이 흰 뺨에 잠시 머무르다가 이내 떨어져나갔음. "....쉬려무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브루스는 자리를 뜨지 않았음. 딕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을 때까지.

알프레드가 매일 정리해놓은 방은 딕이 떠나기 전과 똑같았음. 책갈피가 중간에 꽂힌 채 홀로 책상위에 올려둔 책마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음. 딕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음. 울고 싶었음. 그날 밤, 딕은 한 숨도 자지 못했음.

 

다음날 딕은 시장으로 나왔음. 제가 좋아하는 노점과 디저트 가게에도 들르고, 반가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음. 언제나 외지인들로 붐비는 도시는 북적북적했지만, 묘하게 예전의 활기찬 모습과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음.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묘하게 여유가 없었고, 늘 반짝이던 간판들이나 새하얗던 노점상의 천막들도 묘하게 텁텁해보였음. 풍족할 때는 쉽게 느껴지지 않던 변화들이, 그 풍족함이 사라지니까 대번에 티가 났음.

딕의 또래의 청년들이나 딕보다 어린 아이들은 물론, 오래전 원래 도시의 모습을 기억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조차 근 2년간의 변화에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음. 그 누구도 대놓고 딕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머무를 거냐고 넌지시 묻는 질문의 행간에는 말못할 간절함이 느껴졌음. 철없는 일곱살배기 꼬맹이 하나가 딕의 다리에 답삭 매달리며 오늘아침에는 샘에 물이 가득 찼었다고, 덕분에 오랜만에 밀렸던 양털을 다 빨았다고 자랑했다가 제 엄마한테 엉덩이를 팡팡 얻어맞고 찡찡 울음을 터뜨렸음. 애엄마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애가 어려서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쉬다가 가라고 딕에게 몇번이나 사과했음.

딕은 당황했음. 어째서 나한테 미안해하는 걸까. 딕은 어렸을 때부터 도시와 시장 곳곳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자랐고, 또래들과 어울려 짖궂은 장난을 치다가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은적도 많았음. 형 동생 할 것 없이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고, 사람들은 영주님이 키우는 아이인 딕을 무척이나 귀여워하며 이것저것 먹을것을 손에 쥐어주곤 했음. 어느정도 자란 이후에는 베이비시터를 자처하며 코찔찔이들을 돌보기도 했었고. 공방이나 수리점에 드나들며 잡다한 도구들을 다루는 법을 물어보고 배우기도 했었음. 딕에게 있어서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어렸을 적 캐러반에서 저를 돌봐주던 이모나 삼촌들과 마찬가지였음. 그런 사람들이 자신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고작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떠나있었을 뿐인데. 역시 나는 외지인일 수밖에 없는 걸까?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서?

하지만 딕 역시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것뿐이었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딕은 하루종일 시장주변의 가게를 돌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일찌감치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음. 그 날의 저녁식사 역시 전날 못지않게 휘황찬란했고, 딕은 입맛이 없었지만 브루스와 알프레드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으로 제 몫을 먹었음.

전날 밤에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기 때문인지, 딕은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들었음. 얕은 선잠이 금방 깊은 숙면이 되었다가, 기억나지도 않는 꿈을 몇개 연달아 꾸기도 했음.

한참을 깊은잠과 얕은 잠을 반복하던 딕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무언가에 이끌리듯 눈을 떴음. 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는 브루스와 눈이 마주쳤음. 딕은 잠에 취해 멍한 기분으로 브루스를 올려다보았고, 브루스는 석상처럼 조용히 앉아서 딕을 내려다보았음.

문득, 브루스가 흘러내린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려 덮어줬음. 사막은 낮기온이 뜨거운 만큼 일교차가 심해서, 꼼꼼하게 침구를 챙기지 않았다간 감기라도 걸리기 십상이었음. 어설프지만 다정한 손길로 이불을 잘 펴서 덮어주는 브루스를 올려다보며, 딕은 잠에 취한 채 배시시 웃었음. 그리고 금세 다시 잠들었음.

다음날, 오전 느즈막히 일어나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온 딕은 수로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 투명한 물을 보며 말문을 잃었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음.

 

그날 딕은 하루종일 후원에 머물렀음. 오후에는 브루스도 와서 함께 디저트와 차를 즐겼음. 같은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딕은 브루스의 집무실로 찾아갔음. 그리고 제가 근 2년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것들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음. 브루스는 내내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딕의 말을 열심히 듣고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음. 그래, 그랬니, 그렇구나, 하고 대꾸하는 대답은 영 시원찮았지만, 딕은 그것만으로도 잔뜩 고무되어서 제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줄줄 쏟아냈음. 마치 스스로의 목숨을 보전하고 폭군을 일깨우기 위하여 천일하고도 하루동안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어느 나라의 왕비처럼. 밤을 새고서도 끝날것 같지 않던 이야기는 제가 사막도시로 돌아온 여정을 수선스럽게 과장하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음.

"....그래서 짠, 그리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구요. , 이제 질문있으면 해봐요. 무엇이든 다 대답해 줄게요!!" 딕이 자랑스럽게 뻐기면서 말했고, 브루스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음.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음. 딕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음.

"이제 웬만큼 돌아볼 건 다 보고 온 것 같아요. 재미있긴 했는데, 역시 몸은 힘들더라구요. 당신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어요. 이곳도 무척이나 그리웠구요. 나는 아무래도 여행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이것 봐요, 여기 다리에 흉터 보여요? 정말 아파서 죽을 뻔 했다니까요. 집에 돌아오니까 이렇게 편한데 말이에요. 그쵸? 역시, 내가 살 곳은 여기인 것 같아요."

쾌활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저절로 잠겼음. 그래서 마지막 한마디는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음. 브루스는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음. 왜요, 다 큰 자식이 계속 집에 눌러붙어 있으면 민폐인가요? 딕이 애써 웃으며 말했고, 브루스는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굳어있다가 반 박자 늦게 뻣뻣하게 고개를 저었음. 딕은 코를 훌쩍거리며 브루스를 끌어안았음.

아 정말 센스없는 아저씨. 이럴 때는 좀 안아주면 덧나나. 브루스가 꼼짝도 하질 않으니 그냥 내가 끌어안아야겠다. 딕은 두 팔로 브루스를 끌어안은 채 널찍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음.

그렇게 딕은 도시 한가운데의 넓은 저택에 살게되었음.

 

사람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안도했음. 어느 사이엔가 딕은 본의아니게 도시에서 영주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음. 예전과 다른 묘한 거리감은 딕의 마음을 편치 않게 했고, 자연스레 딕은 점점 저택 안에만 머무르게 되었음. 그래도 괜찮았음. 딕이 자유롭게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는 삶을 버리고 이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결국 브루스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니까. 가끔씩은 좀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음. 브루스가 딕을 위해 만들어준 정원은 아름다웠고, 화초들도 예쁘고 동물들도 귀여웠음. 그러니까 괜찮았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브루스는 딕을 건들지 않았음. 딕을 위해 온갖 귀한 화초를 가져다 심고, 진기한 동물들을 데려다놓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였지만 그뿐이었음.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가 딕에게, 딕이 브루스에게 연애 대상으로서의 관심이 없는 건 또 아니었음. 딕도 브루스를 좋아하고 원했음. 그래서 솔직히 브루스를 이해할 수 없었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나이차이? 나이로 따지자면 브루스보다 어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브루스는 도시의 가장 나이많은 노파가 소녀였을 때도 지금 모습 그대로라고 했었음. 딕이 처음 저택에 왔을 무렵의 차이에 비하면 두사람의 겉보기 나이 차이는 확 줄어있었음. 설령 나이차이가 좀 나면 어때. 딕은 성인이었음.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다 빠진 할아버지랑 연애를 해도 본인들만 좋으면 무슨 상관이겠음.

더군다나 딕은 이미 암암리에 브루스의 애첩으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있었음. 한창 나이의 싱싱하고 예쁘장한 청년이 최고급 옷감으로 지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하루종일 영주의 곁에 붙어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할 오해였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는 고집스럽게 딕을 안지 않았음. 언젠가 하루는 시무룩해진 딕이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냐고 대놓고 물어봤을 정도였음.

브루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묵묵히 저었지만, 딕은 브루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음. 충동적으로 딕을 향해 내밀어진 손은, 그러나 딕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거두어졌음. "....늦었구나. 이만 자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브루스의 뒷모습을 보며 딕은 심란해졌음.

 

브루스가 정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딕으로서도 굳이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었음. 연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브루스는 제 은인이었고, 소중한 가족이었음. 그를 위해 기꺼이 이곳에 머무를 수 있었음.

하지만 딕은 브루스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확실한 증거가 있거나 그래야만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느껴졌음. 마치 처음부터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처럼, 매일아침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저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음. 그의 눈빛에서, 가끔 어떠한 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는 모습에서. 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음.

단지 딕이 모르는 것이라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며 은총인 이 사막의 도시가, 그리고 마르지 않는 샘이, 브루스에게는 저주와 다름없다는 사실이었음.

 

브루스는 딕이 여행에서 돌아와 사흘째 되던 날, 앞으로 당신 곁에 머무르겠노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을 거절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었음. 그는 딕이 대륙 곳곳을 여행하며 부친 편지 한통 한통을 전부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고, 딕이 얼마나 바깥세상을 즐기고 있는지, 새롭게 접하는 그 모든것들을 얼마나 놀라워하고 경탄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음. 그런 아이가 자신을 위해서 이곳에 머무른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기쁨임과 동시에 슬픔이었음. 도시를 떠날 수도 없고, 아프거나 다쳐서도 안 되고, 슬퍼하거나 분노해서도 안 되는 이 저주받은 삶에 제가 아끼는 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음. 하다못해 일년에 단 한 달만이라도, 사막을 벗어나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차피 고민해봤자 불가능한 일이었음. 천연의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도시는 건조했고, 아무리 많은 물을 가득 저장해두고 떠난다 한들 금방 모래 사이로 스며들거나 증발되어버릴 것이 뻔했음. 부모님을 잃고 고향처럼 자란 도시가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딕 본인도 원하지 않을 거임. 결국 브루스는 지난 몇십년간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이고, 그런 자신의 연인이 되는 것은 딕에게 지나치게 가혹했음. 그래서 브루스는 딕을 안지 않았음. 딕으로서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가끔 브루스는 딕에게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묻곤 했음. 딕은 그 때마다 두 번 고민하지도 않고 됐다며 손사래를 쳤음. 딕은 바깥세상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고 있었음. 안 그래도 요새 자꾸 외로워지려고 하는데, 예전처럼 그렇게 훌쩍 떠났다가는 다시 돌아오기 싫어질까봐 스스로도 두려웠음. 홀로 고독할 브루스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실컷 즐기다 오는 것은.... 아니, 뒤늦게라도 돌아오기나 하면 다행이지. 애초에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옳았음.

딕은 차라리 브루스를 꼬시고 유혹해서 쓰러뜨리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음.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음. 목욕 시중을 들거나 마사지를 핑계로 스킨쉽을 조금씩 조금씩 늘리다 보면 넘어오지 않을까. 어차피 날도 덥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도 없겠다, 딕의 옷차림은 날이 갈수록 얇고 대담해졌음. (그리고 그로 인해서 딕이 브루스의 애첩이라는 루머는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렸음) 심지어 잠을 잘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이불속에 쏙 들어갈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음. 브루스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했지만,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한 얼굴은 전혀 그러한 티를 내지 않았음. 낼 수 없었음. 천진하게 '왜요, 뭐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딕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했음. 붙임성이 좋은 딕은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한 차림새를 한 주제에 브루스에게 잘만 들러붙었음. 비록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없었지만. 딕이 알몸으로 브루스가 자고있는 침대에 파고들었을 때, 브루스가 딕을 쫓아내거나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나름의 성과로 봐야할지 말아야할지 애매하긴 했음. 나가라고 하질 않았으니 진전이라면 진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래놓고 쿨쿨 잠만 잤을 뿐이니 실패라고 할 수도 있었음.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브루스도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며, 다만 딕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고있는 것뿐이라는 확신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음.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어린 데미안이 저택에 찾아왔음.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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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urntS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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